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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의 이야기 May 24. 2020

무거운 칼날로 심장을 관통하는 징벌의 이야기

영화 <윈드리버> 리뷰

칠흑 같은 밤.

 한 소녀가 뭔가에 쫓기듯, 죽을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며 설원 위를 달리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리뷰할 작품은 영화 <윈드리버>입니다.
저는 당시 이 영화를,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로 접했습니다.
길을 걷다가 영화관에 볼만한 영화가 있을까 싶어 들어가 우연히 보게 된 영화였죠.
무겁고 날카로운 영화입니다.
보는 내내 가슴 한편에 두고 애써 외면해왔던, 거북하게 자리 잡고 있던 불편함을 직시하도록 만들죠.
지루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지루함 속에는 깊은 슬픔과 증오, 분노가 깊게 가라앉아있.

그리고 이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서서히 알게 되면서 지루함과 고요함은 무거운 슬픔과 아름다움으로 치환됩니다.

테일러 쉐리던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에서 보여준 그의 각본이 영화 전반에 깔린 팽팽한 긴장을 통해 명분을 앞세운 정의와 그 부조리에 비수를 꽂았다면, <윈드리버>에서는 감춰진 진실과 무거운 슬픔으로 침략자들의 가슴을 서서히 관통합니다.

감독은 <윈드리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감독을 맡은 첫 작품에 이러한 이야기를 이 정도로 묵직하고 담백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우들의 연기와 캐릭터, 각본의 합이 꽤나 뛰어나서 저는 "이게 입봉작이라니"하며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그럼 리뷰 시작하겠습니다.
테일러 쉐리던 감독,

제레미 레너, 엘리자벳 올슨 주연의 영화, <윈드리버>입니다.
영화의 내용 전체를 담은 이야기이니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다면 페이지를 벗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미국의 와이오밍주입니다.

와이오밍은 과거 가장 많은 수의 여러 부족 원주민들이 터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며, 유럽인들의 탐욕에 의해 가장 잔인하게 침략당한 지역 중 한 곳입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가장 인구가 적으며, 이 땅의 주인이었던 그 많던 원주민들이, 현재는 전체 인구의 고작 2%의 비율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땅이죠.
감독은 이곳을 배경으로 침략과 학살의 역사와 보호라는 명목으로 철저히 고립된 원주민의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그렇게 지금껏 미국과 자본주의의 세계가 숨겨온 두 얼굴을 있는 그대로 끄집어내서 보여줍니다.
영화의 배경인 와이오밍 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에는 총 여섯 명의 경찰이 근무합니다.

대한민국 국토 면적의 2.5배 정도 되는 곳임을 감안하면 치안율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죠.
먼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인디언, 그러니까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미 대륙, 아메리카의 원주민은 인류학적으로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클로비스인이 그 기원이라는 학설이 현재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칭하는 인디언, 스페인어로는 인디오죠.

이제는 고유명사가 돼버린 이 '인디언'이라는 단어를 접하거나 불가피하게 사용게 된다 하더라도 거기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는 알아야 합니다.
1492년, 콜럼버스를 위시해 미 대륙에 이주한 유럽인들, 정확히는 원주민들이 그간 접하지 못한 온갖 세균과 무기를 가득 싣고 건너온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인디언을 해로운 벌레를 죽이거나 쫓아내는 방식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학살했습니다.
아즈텍과 잉카 일대를 포함한 전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천만 명의 인디언이 유럽인들의 무기와 세균에 죽임을 당했죠.

단순히 쫓아내거나 감금하는 수준이 아닌, 인간이 인간을 철저하게 박멸했던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결과적으로,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천만의 사람을 죽게 한 원흉이며, 미 대륙에서 탐험과 개척이라는 목적을 위해 약탈과 살인을 저지른 최초의 침략자인 것입니다.

일례로 처음 그가 발견한,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 섬에 살던 당시의 원주민 아라와크 족 25만 명은, 1650년에 정확히 0명이 됩니다.

멸종을 당한 것이죠.
그렇게 수백 년을 학살과 박해, 전시, 차별 속에 살아온 미대륙 원주민들은, 비로소 1928년에야 시민권을 얻습니다.

이 땅에 원래 정착해 살고 있던 원주민들에게 침략자들이 시민권을 준다니, 어이없는 일이죠.
사실 그 또한 ‘원주민도 인간이다’라고 인정한 정도이지, 차별은 여전했고 현재에도 인디언들은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2010년에는 마침내 미 연방정부가 원주민들에 대한 전쟁부터 정책까지 잘못된 것이었음을 최초로 공식 인정했고, 즐비한 원주민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차별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마지못해 말이죠.

물론 제가 이런 얘길 하는 것은 원인을 제공했던 당사자와 위정자를 포함한 정부의 정책을 잘못됐다 하는 것이지, 결코 나라 자체를 통틀어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대륙 국가들이 얼마만큼 무분별한 학살과 추악한 탐욕 위에 세워졌는지는 잘 알고 있어요.

개척이나 연방, 번영 따위의 대의를 앞세워 자행된 침략과 억압을 반대하며, 비난합니다.




영화로 돌아가 보죠.

제레미 레너가 연기한 주인공 코리는 와이오밍 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사냥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인이지만 인디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유는 영화의 초반부에 드러납니다.
코리는 인디언 여자를 아내로 두고 그녀와 함께 딸을 낳아 기르다가, 그 딸을 그만 잃어버린 경험이 있습니다.
그 커다란 상실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자신의 터전인 와이오밍에서 지내고 있는 것이죠.
그가 눈 덮인 평원의 가축들을 보호하기 위해 죽이거나 쫓아내는 맹수들은, 침략자들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어느 날 코리는 가축 하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고 이 일이 퓨마의 소행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지역의 퓨마는 멸종했다고 생각하는 코리는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맹수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근방을 수색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눈밭에 쓰러진 한 여인의 시신을 발견하는데, 가까이에서 시신을 확인하는 코리의 눈빛이 충격과 슬픔으로 물들어갑니다.

시신의 정체가 가까운 친구의 딸이자 죽은 딸의 친구였던 나탈리였기 때문이죠.
이렇게 사건은 시작됩니다.
앞서 언급했듯 와이오밍의 인디언 보호구역은 정체불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공권력을 투입해 즉시 조사에 임할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코리는 즉시 지역 경찰에게 신고를 하고, 사건 현장을 조사할만한 권한이 없는 그들은 연방수사국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온 FBI 요원 제인입니다.

엘리자베스 올슨이 연기했죠.


제인은 코리와 경찰의 안내를 받아 초동 수사를 마친 후, 혼자서는 광활하고 척박한 이 땅에서 막연하게 사건을 조사해 나갈 수 없다 판단하고 코리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사건의 수사는 시작되죠.
코리와 제인은 먼저 나탈리의 집으로 갑니다.
나탈리의 부모는 딸이 죽었다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상실감에 휩싸입니다.

아버지와 코리는 말없이 서로를 안아줍니다.  

말할 수 없이 깊은 슬픔과 상실감을 함께하는 그 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제인은 나탈리에 관해 이것저것 묻지만 곧 지금은 그런 대화를 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미안해합니다.

다음은 나탈리의 오빠를 찾아갑니다.

그는 나탈리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백인들을 향한 피해의식과 증오에 휩싸인 보통의 원주민 청년들과 함께 술과 마약에 찌들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나탈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빠 칩은 큰 충격과 함께 비통해하며, 코리에게 자신이 알고 있던 나탈리의 주변과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코리는 칩에게 마치 친형처럼 대하는데, 이 부분에서 코리를 대하는 인디언들의 태도를 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죠.
그렇게 코리와 제인, 그리고 지역 경찰은 여러 증언과 단서를 통해 사건이 일어난 장소로 갑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나탈리는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 맷과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사랑을 나누던 어느 날 밤, 함께 일하던 다른 백인 인부들이 술에 잔뜩 취해 나탈리와 맷이 있는 공동 숙소로 돌아옵니다.

그중 한 녀석이 나탈리의 몸을 더럽고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데 별다른 클로즈업이나 강조가 없는데도 정말 기분이 나빠질 만큼 그자의 그 눈빛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그러다 결국 술에 취한 그자가 나탈리에게 추파를 던지고 맷과 시비가 붙어 싸우게 됩니다.

수적으로 열세인 맷은 싸움 끝에 결국 죽고, 나탈리는 겁탈을 당하다 겨우 그곳을 빠져나와 도망칩니다.

그렇게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온통 눈과 얼음에 둘러싸인 들판을 달려 도망치다가 허파가 얼어붙어 죽게 된 것입니다.




제인과 지역 경찰은 단서를 따라 나탈리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해당 공사 현장을 찾아갑니다.
코리는 따로 다른 길로 빠지는데 산길을 걷다 작은 동굴 속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퓨마들을 발견해요.
굴 속에 숨어 몸을 움츠린 채 코리를 가만히 바라보는 퓨마의 가족, 그리고 퓨마들을 응시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 발걸음을 옳기는 코리.

이 장면이 이야기하는 것은 원래의 주인과 그들의 터전을 침략해 약탈한 낯선 존재들에 대한 경계와 미움, 증오입니다.
공사장에서 제인과 경찰관을 맞이한 자들은 사건 당시 술에 취해 범행을 저지른 범인들이지만 경찰과 제인은 아직 눈치채지 못하죠.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수사에 협조하는 듯 사건이 일어났던 컨테이너까지 안내하다가 갑자기 돌변해 총을 꺼냅니다.
이 과정에서 제인은 몸에 샷건에 맞아 눈밭에 쓰러지고 처음부터 함께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관과 대동한 경찰들은 총에 맞아 죽습니다.

방탄조끼 탓에 치명상을 피한 제인은 총격이 벌어지는 틈을 타 겨우 컨테이너 아래에 몸을 숨깁니다.
놈들은 제인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찾기 시작하는데 틈이 넉넉히 벌어진 컨테이너 아래에 몸을 숨긴 제인이 금세 발각돼 즉시 사살되는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죠.

그렇게 제인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갑자기 총소리와 함께 놈들이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멀리 자리 잡은 코리의 저격에 하나하나 죽어가는데, 한 놈이 살아남아 도망칩니다.

도망치는 자는 나탈리를 탐욕의 눈으로 응시하던 바로 그 녀석입니다.
온 힘을 다해 도망치던 놈은 결국 코리에게 잡히는데, 코리는 눈 덮인 산등성이에서 그에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있는 힘껏 달아나 보라고 말이죠.

이미 피투성이가 된 놈은 코리의 말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 도망치지만 얼마 못가 쓰러져 죽고 맙니다.

나탈리처럼 고결하고 강인한 정신과 한계까지 죽음에 맞서는 용기도 보이지 못한 채, 금세 쓰러져요.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부상을 입고 겨우 목숨을 건진 제인은 회복을 위해 병원에 입원합니다.

코리가 입원한 제인의 상태를 살피러 병원에 찾아와 상태를 묻자 제인은 "운이 좋았다"라고 대답합니다.

코리는 제인에게 "여긴 운이라는 것이 없는 곳이다. 운은 도시에서나 있지, 여기선 살아남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하는데 이 부분에서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의 마지막 알레한드로가 케이트에게 건넸던

작은 도시로 전출 가. 법이 존재하는 곳으로.
여기선 목숨 못 지켜,
여긴 늑대들의 땅이니까"


라는 대사가 묘하게 오버랩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코리가 잡지를 읽어주겠다며 몇 마디 더 꺼내자 제인은 그제야 "눈 위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라는 혼잣말과 함께 마침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오열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땡볕이 내리쬐는 네바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일하던 그녀가 총에 맞고 눈밭에 쓰러져 컨테이너 아래 숨은 채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를 뼛속까지 실감했습니다.
사건이 해결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탈리가 겪었을 아픔과 공포를 가슴속 깊이 공감하며 코리의 앞에서 온전히 슬픔을 꺼내놓는 제인의 그 눈물과 흐느낌이 관객의 가슴에 나탈리를 떠올리는 그녀의 심정을 무겁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코리는 나탈리의 집으로 가 나탈리의 아버지, 친구를 만납니다.

친구는 코리에게 집을 나가 연락조차 없던 아들 칩이 경찰서에서 데릴러 와달라 연락해왔다는, 그래도 적게나마 희망에 찬 소식을 전해줍니다.

코리는 친구에게 나탈리를 죽인 범인들의 죽음을 알리고, 둘은 말없이 허공을 응시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윈드리버>에는 조미료가 없어요.

별 자극도 없고, 맛깔스러운 포인트를 더해 시간이 잘 가게 하는 오락 영화도 아닙니다.

이 영화의 백미는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진실이 천천히, 변덕스럽지 않은 리듬으로 우리에게 다가옴과 동시에 지루함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드는 미움과 분노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잠시 입을 다물게 되더군요.

와이오밍의 아름다운 설경 속에 피어난 분노와 고립된 자들의 아픔이 가슴속을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작품은 한때는 기회의 땅이었으며 지금은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라는, 이 진실을 덮어 흐리는 기만을 정면으로 찌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죠.

때로는 아픔을 극복하려 복수를 다짐하기도, 아픔을 잊기 위해 옳지 못한 선택을 강행하기도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러한 잘못된 선택을 미리부터 걱정해 적절치 못한 조언이나 충고로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더 큰 불편과 아픔을 주기도 해요.  

저는 상대를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이라면 그 아픔을 지켜봐 주고 들어주고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겪는 사람이 느끼는 그 고통의 크기와 무게는 다른 사람이 함부로 정의 내릴만한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과거에 겪어본 일이라 해서 그 사람 또한 나와 같은 아픔을 느낄 거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며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무거울 수도, 이미 그 아픔에 짓눌려 버린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가족을 잃은 아픔과 분노를 통해 침략당한 자들의 고통을 무겁게 전달하는 영화 <윈드리버>에 대한 제 평점은 6점 만점에 5점입니다.

전반적으로는 담백했지만 사건을 해결에 나가는 과정에 있어 긴장감의 밀도가 다소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코리가 범인들을 직접 죽이기 보다는 제인과 함께 놈들의 만행을 고발해 법에 의해 심판받게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어느쪽이 더 나았을 거라 판단하기 힘들군요.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은 한 번쯤 보시길 추천합니다.
미국이라는 대륙과 그곳을 근근이 살아가는 그 땅의 원래 주인들을 주제로 만든 작품이라는 것 하나로도, 영화를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영화 리뷰로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캐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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