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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의 이야기 Oct 07. 2019

영화 <버닝> 리뷰

2018년, 수렁에 빠진 충무로를 우물에서 건져낸 역작

여러분 안녕하세요.
캐리 인사드립니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이창동 감독,

유아인, 전종서, 스티븐 연 주연의 영화, <버닝>입니다.


할 얘기가 무척 많은 작품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고,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방화>에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작년 개봉작인데 개봉 후 5일 정도가 지난 후에야 관람을 했 기억이 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척 행복했어요.
이처럼 좋은 작품 보는 것은 저에게 커다란 기쁨이자 보람이기도 하다는 것을 미리 이야기하며 <버닝>이 손에 꼽을만한 걸작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서술에 앞서 리틀 헝거란, 물질적인 부족에 의한 굶주림을 겪는 사람을, 그레이트 헝거는 의미와 관념에 굶주려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언급하겠습니다.
작중 초반에 주인공 종수와 해미가 이것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이 영화를 보다 잘 보고 해석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개념으로 작용하니까요.
그럼 리뷰 시작합니다.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가득 담겨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인 것은 물론, 작품 특성상 다소 관념적인 해석과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묘사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니, 원치 않는다면 읽기를 중단하시길 바랍니다.


영화에서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리틀 헝거입니다.
저소득층의 가난한 청년이고, 그러한 자신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종수는 해미(전종서)를 만납니다.
해미 또한 리틀 헝거입니다.
그러나 종수와는 크게 다른 방향을 보며 살아갑니다.
그녀는 리틀 헝거에서 벗어나,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죠.
종수와 해미는 어릴 적 소꿉친구였는데, 우연히 종수가 길거리 이벤트 같은 걸 참여했다가 시계를 사은품으로 받게 됩니다.
그곳에서 나레이팅 모델로 일하던 해미와 마주 거죠.
둘은 함께 술을 마십니다.
여기서 해미가 빈 손바닥 위에서 귤을 까먹는 판토마임을 합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귤이 없다 해도 귤의 촉감과 냄새, 맛을 알고 그것을 상상하면 원할 때 언제든 귤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죠.
다음 날, 해미는 종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둘은 섹스를 합니다.
해미는 창문에서 남산타워가 보이는 집에 혼자 살고 있습니다.
남산타워를 통해 하루 한 번, 반쪽짜리 빛만 들어오는 집이에요.

귤을 까먹는 시늉을 하던 해미의 행위와 그녀의 집에 들어오는 반 줄기짜리 빛닿을 수 없는, 그레이트 헝거로서의 삶을 향한 해미의 희망과 염원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이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사이퍼가 고기를 먹는 장면으로 표현되었던, 상상과 사실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스스로 애매모호한 인식을 갖춘다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의 부재를 망각함으로 부재를 실존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과 유사한 장면이죠.

둘은 아프리카 부시맨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해미는 아프리카로 해외여행을 갈 라고 합니다.
휴식이나 견문을 넓히려는 목적이 아닌 일탈이자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 위한, 하나의 염원을 향한 열망으로서의 여행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 위한 방법을 알지 못하죠.
해미가 여행을 떠난 동안 종수는 해미의 집에 찾아가 자폐증이 있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고양이 보일이의 밥과 물을 챙겨주고, 해미의 집에서 자위를 합니다.
작중 종수는 문예창작학과 출신이고 글을, 소설을 쓴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소설을 쓰는장면은 끝내 담기지 않았어요.
(후반부의 글을 쓰는 씬에서도 종수가 쓰고 있던 것이 소설이라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종수는 소설을 쓴다는, 맥거핀으로 자신을 치장합니다.
그리고 이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는 길을 알지 못한 채 그 목적을 향한 갈망만으로 스스로가 그레이트 헝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여기는 해미의 그것과 공립 하죠.
자본주의 속의 물리적 생존을 위한 행위가 급선무라 여기는 삶의 리틀 헝거 종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을 글로 창조해나가는 예술, 즉 소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사료를 먹고 배설한 흔적으로만 존재를 증명하며 끝내 실체를 보이지 않는 고양이 보일이 또한 그 자체로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메타포입니다.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는 상자 속에 핵융합 즉, 양성자 붕괴와 맹독의 발현을 절반의 확률로 장치한 후 고양이 한 마리를 함께 넣어두는 사고 실험입니다. 실험이 끝난 이후에도 상자를 열어 확인하기 전에는 '고양이가 방사능에 노출되어 살아남았거나 맹독에 노출되어 죽었을 것이니 죽음과 삶의 확률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이므로 물리학, 정확히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 지닌 모순을 정면으로 깐 셈이죠)
이창동 감독의 첨예하고도 잔인한 묘사가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종수는 여행을 마친 해미를 배웅하기 위해 공항으로 마중을 나갑니다.

여기서 스티븐 연이 연기한 또 다른 주인공, 벤이 등장합니다.
해미는 종수에게 여행지에서 만난 그를 소개하고 그들은 함께 곱창집에 갑니다.
자리가 끝나자 벤은 종수의 트럭 뒤에 세워진 자신의 포르셰에 해미를 태워 떠나고, 종수는 묘한 열등감을 느낍니다.
공항에서 곱창집까지는 자신의 낡은 트럭에 둘을 태웠었거든요.
그리고 얼마 후, 종수는 벤의 집에 갑니다.
해미도 벤의 집에 있어요.
그렇게 셋은 호화로운 벤의 집에서 모이게 되고 벤은 파스타를 요리합니다.
종수는 벤의 호화로운 집과 생활환경에 조금 위축됩니다.
이후 종수는 '메타포'의 의미를 묻는 해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화장실로 갑니다.
그는 벤의 집 화장실 서랍에서 여성용 화장품들과 장신구들을 발견하고 자신이 생각했던 벤의 여유롭고 호화스러운 모습과는 다른 위화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는 리틀 헝거인 종수 자신이 쓰지도 않는 소설을 쓴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그레이트 헝거 벤이 자신을 치장하는 행위입니다.
화장으로 자신을 꾸미고, 만났던 여성들의 장신구들을 전리품 삼아 모아두는 것이죠.
이날 종수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해미에게 벤을 '개츠비'에 비유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종수가 순간적으로 열등감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단순히 넘어갈 수 있다 생각합니다.


이 부분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종수는 실제로 소설을 쓰지는 않지만, 소설을 쓴다고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작가 지망생이라 여기며 살고 있는 인물이죠.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 호황기의 풍요로운 삶 이면에 만연한 윤리적 타락과 아메리칸드림의 허구성을 꼬집은 소설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 종수는 벤의 도덕적 해이라던지 타락, 혹은 이중성을 확신할만한 어떠한 것도 알지 못 상태예요.
화장실에서 봤던 물건들이 그러한 것이라 단정하기엔, 그것들은 '벤의 집 화장실에 있는 물건'이라는 점을 빼곤 사실 누구의 것인지, 어떠한 용도인지, 언제부터 있던 물건인지, 종수는 알 수 없습니다.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그런 종수가 벤을 개츠비에 비유한다는 건 애매한 열등감을 넘어 자격지심까지 느꼈다는 것이고, 급기야 자신의 가난을 자신보다 부유한 자의 탓이라 여기는 피해의식과 책임전가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상대적으로 현실 생 전선에 있는 자신이, 겉으로 호화롭지만 세상을 겪어본 것 같지는 않은 벤에 비해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 단정하는 리틀 헝거의 교만이죠.
종수가 생각하기에 벤은 그의 세계에, 정확히는 종수가 생각하는 종수와 해미의 세계에 느닷없이 들어닥친 불청객이며, 자신에게 무슨 얘긴지 알기 힘든 말들을 하며 사람을 무덤덤하고 다소 성의 없게 대하는, 실없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만난 후에도, 대화보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로 판단해 사람을 단정하는 종수는, 

진정성이 있나요?
실없고 가볍긴 마찬가지 아닌가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는 쪽은 종수가 아닌가요?
종수가 벤을 개츠비에 빗댄, 이 부분이 바로 그가 가진 '포크너적 분노'의 씨앗이 떡잎을 틔우는 시점이자 살인에 대한 암시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도 결국 살해 당해 최후를 맞)
그날 밤, 이들은 벤의 사교 모임에 함께 참석합니다.
종수는 끌려온 듯 그냥 가만히 있지만 해미는 의 친구들과 아프리카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어울려요.
그리고 해미는 벤과 그의 친구들 앞에서 아프리카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부족 추는 춤을 춥니다.
사람들은 그저 옅은 조소를 머금은 채 해미의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 위한 열망과,

그들과 함께 이 자리에서 동등하게 어울리고 있다는 것에서 느끼는 영예가 담긴 그 춤을 구경합니다.
해미는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것이며, 염원하던 그레이트 헝거에 단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한 것이 진실임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그 상황에서 자신이 느껴야 할 것의 정체가, 영광과 자만이 아닌 치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레이트 헝거들의 눈앞에서 열심히 춤을 춥니다.
벤은 해미의 아프리카 이야기와 춤에 별다른 감흥 느끼지 못하며 하품을 하죠.
저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습니다.
감독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마치 온몸이 흉터로 가득한 여인을 발가벗겨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물원에 전시하듯, 관객으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씬을 적나라하게 담아냈다는 것에 경탄을 금치 못했.
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미간을 찌푸리 입을 벌린 채 해미의 춤을 봤습니다.
종수는 해미가 구경거리를 자처하는 것 같아 불편해하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클럽으로 자리를 옮겨 분위기에 들떠 혼자 춤을 추는 해미를 뒤로 하고, 종수는 돌아갑니다.
며칠 후에는 해미가 벤을 데리고 종수아버지를 대신해 소를 키우고 있는 시골집에 찾아옵니다.
그들은 함께 와인과 샌드위치를 먹으며 대화를 누죠.

대화중에 해미는 종수에게 어릴 적 자신이 우물에 빠진 것을 종수가 구해준 일을 이야기하지만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종수에게 서운해합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노을로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에서 함께 대마초를 피웁니다.

해미는 마약에 취해 상반신을 벗고 춤을 춥니다.
밤이 깊자 종수는 벤에게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분노조절장애를 갖고 있는 아버지와 죽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죠.

여기에서 어머니의 옷을 태웠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 부분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벤도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오래돼 못쓰게 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을 즐긴다고, 사실 여기에 온 것도 미리 태울만한 비닐하우스가 있는지 보러 온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도 꼭 언급해야 할 요소가 있어요.
우선, 종수의 집은 파주인데 대북방송이 들릴만큼 휴전선과 가까운, 그야말로 남한과 북한의 경계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리틀 헝거인 종수의 세계에 그가 느끼기에  그레이트 헝거의 상징물이라 할만한 와인과 샌드위치가 선을 넘어 들어옵니다.
시기는 낮과 밤의 경계이고, 해 질 녘의 노을 진 하늘을 보며 함께 마약 즐김으로써 합법에서 불법으로의 전환 은밀한 범죄의 공유 절묘하게 그려냈죠.
이로 인해 서로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속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의 상징영화의 전개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기도 합니다.
종수는 이때부터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 위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하고, 해미는 거꾸로 자신 염원이 부질없었음을 깨닫고 종수에게 손을 내밀, 벤은 종수와 해미를 지겨워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종수는 벤에게 해미를 사랑하고 있다 말하고, 벤은 그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비웃어 넘깁니다.
그러자 종수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해미를 사랑한다고 말하죠.  

이때 잠에서 깬 해미가 밖으로 나오고, 벤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심이 극에 달한 종수는 해미에게 옷을 벗고 춤추는 건 '창녀'라고 쏘아붙입니다.
벤이 종수의 사랑에 대해 비웃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당치 않은 그레이트 헝거의 삶을,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갈망하는 해미와, 못난 열등감에 빠져 그런 해미를 잡아주않는 종수. 그런 종수도 해미와 두 번째 만난 날 섹스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물에 빠진 것을 구해줬던 기억을 상기하는 해미의 말에 숨은 뜻 허황의 늪에 빠진 자신을 그때처럼 다시 건져달라는 의미임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한 채, 옷을 벗고 춤을 췄던
그녀에게 창녀라고 합니다.
해미는 적어도 종수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종수도 해미에게만큼은 그렇게 이야기할 자격 없어요.
깊이도 없고 진정성도 없는 사랑.

그것이 종수가 외쳤던 사랑의 실체임을, 이미 벤은 알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벤과 해미는 떠나고, 그 이후로 종수는 해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종수는 해미를 찾아 나섰지만,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합니다.
중간에 해미의 어머니와 언니를 만나 그녀의 행방을 물으며 해미가 얘기했던 어릴 적 그 우물에 대해 묻습니다.
그러자 그런 우물은 없었다며, '해미가 원래 거짓말을 잘한다'라고 합니다.
종수는 벤이 해미의 행방을 알 것이라 확신하고 불안감을 느껴 벤이 이야기했던 아버지의 집 근처 비닐하우스 모두 살펴보지만 불에 탄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해미도 없습니다.
그리고 종수는 벤의 주변을 몰래 지켜보다 벤이 들어간 카페에 따라 들어가 우연을 가장해 벤과 마주 인사를 나눕니다.
종수 벤에게 '비닐하우스를 모두 봤지만 불에 탄 곳은 없었다'라고 말하자 벤은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일 수도 있다'라고 대답하며 새로운 여자 친구와 함께 카페를 나섭니다.
얼마 후에 종수가 어머니와 16년 만에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종수는 어머니에게 다시 해미가 말했던 우물에 대해 묻습니다.
그런데 종수에게 돈을 빌리러 나온 어머니는 '그렇다. 마을에 우물이 있었다'라고 성의없이 대답합니다.

종수는 계속해서 벤을 의심하며 그를 계속해서 미행합니다.
그러다 한 번은 벤에게 미행을 들 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 초대받기도 해요.

그러던 어느 날, 종수는 해미를 찾았다는 거짓말로 벤을 인적이 없는 들판으로 불러냅니다. 

종수는 그 들판에서 벤을 칼로 여러 번 찔러 살해합니다.
그리고 벤이 타고 온 포르셰에 벤의 시체와 피 묻은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는 불을 지릅니다.
목적을 잃은, 마치 포크너의 작품에서 튀어나온 듯한 분노의 폭발은 살인이고 결국 종수의 사랑은 얕고도 헤펐을 뿐이며, 가난에 대해 인정하지도, 맞서지도 못했고, 어느샌가 자아 속에 기형적으로 자라나 버린 자기 연민을 각성함과 동시에 자신이 간직해온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그것을 충돌시켜 사람을 죽이고, 쭉 입어왔던 자신의 옷을 벗어 함께 태워버린 것이죠.
영화는 멍한 표정의 종수가 알몸으로 자신의 트럭을 타고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참으로 대단한 영화라 아니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저는 이 버닝이라는 영화를 여섯 번 봤습니다.
상영 당시 극장에서 두 번을 봤고, 이후 영화 파일로 다운로드 받아 네 번을 더 봤죠.
단점이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벤의 포르셰나 호화로운 저택을 보여준 것은 좋았지만 후반에 다시 한번 종수를
그 집에 초대한 것은 과했다고 생각해요.

없는 편이 나았던 시퀀스입니다.
분노가 대물림된다는 것 자체도 구태의연한 클리셰라는 의견입니다.
종수의 아버지에 대한 스토리는 너무 가볍습니다.
벤을 찌른 칼이 종수 아버지의 폭력성이며 그것을 벤이 낡은 금고에 숨김으로써 분노의 대물림을 굳이 표현하려 했다면 아버지에 대한 입체적인 캐릭터 설정이 더해졌어야 합니다.
벤이 용산 참사 그림 앞에서 태연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 또한 세련되지 못한 연출입니다.
무슨 얘길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표현이 너무 뻔해 수가 얕아 보여요.
이러한 단점들이 드러났다는 것으로 이창동 감독의 퇴보를 엿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론 이러한 단점들이 결코 두드러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영화임에는 변함이 없지만요.
영화 <버닝>에 대한 평점은 6점 만점에 5점입니다.


아, 벤의 등장 씬에서는 인조광을, 종수의 등장 씬에서는 자연광을 쓴 것도 좋은 연출이었다 생각합니다.
이만 리뷰 마치겠습니다.
평안한 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캐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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