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엔 형제 감독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는 미국의 현대문학 소설가 코맥 멕카시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제목은 아일랜드 시인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의 첫 구절(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캐리 인사드립니다.
이번 리뷰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의 번역이 좋지 못하다 생각합니다.
윌리엄 예이츠 또한 '이 혼란하고 험난한, 아는 것 없이 육체적이며 금전적인 탐욕만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판을 치는 세상은, 더 이상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는 의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영화도 제목에 같은 의미를 담았습니다. 구시대적 경험과 지혜만으로 무장한 노인이 살아가기에
작품의 배경과 같은 혼돈과 탐욕, 불확실성이 점철된 세상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없다'라는 말은 확정적인 부재와 무존재를 뜻하고 '아니다'라는 말은 주어가 가리키는 배경에만 한정한 표현입니다.
맥락상 생략한 주어를 빼고 의역해보아도 '노인이 지낼만한 나라는 없다'와 '노인이 지낼만한 나라가 아니다'가 되는데, 후자 쪽이 모티프의 시 구절이나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에 훨씬 더 적합하다 하겠습니다.
코엔 형제 감독,
조쉬 브롤린, 하비에르 바르뎀, 토미 리 존스 주연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리뷰 시작하겠습니다.
스포일러의 여부를 떠나 작품 전반의 요소를 저의 철저한 주관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이니,
원치 않는다면 지금 읽기를 멈춰 주시길 바랍니다.
싸이코패스 살인마 안톤 쉬거는 자신을 체포한 경찰의 목을 졸라 죽이고, 아무렇지 않게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낸 후 경찰서를 빠져나옵니다.
밖으로 나와 길가의 차에 타고 있는 노인의 이마를 케틀건으로 쏴 죽이고는, 그대로 차를
운전해 그곳을 유유히 벗어납니다.
케틀건은 압축 공기의 순간적 힘으로 호스에 연결된 쇠막대기를 강하게 타격하는 방식의 도구인데, 주로 가축을 도살하거나 열쇠 구멍을 때려 잠긴 문 따위를 따는 용도로 쓰이죠.
안톤 쉬거는 차를 몰고 인적이 드문 한 휴게소에 들르게 됩니다.
이 휴게소 씬을 통해 관객은 안톤 쉬거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중요한 장면인데요.
잠시 보시죠.
휴게소 장면 앞 뒤의 맥락을 봐도 단지 먹을 것을 좀 사고 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들른 것일 뿐, 휴게소를 찾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보긴 힘듭니다.
그런데 다분히 일상적인 대화를 건네는 휴게소 주인의 말꼬리를 잡더니 상대의 의중과 대화의 내용을 무시한 채 자신만의 생각으로 흐름을 단정 짓고 극도의 긴장과 압박을 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산대 위에서 서서히 소리를 내며 펴지는 과자 봉지가 짙은 긴장감을 잘 표현해주죠.
그렇게 강제적으로 휴게소 주인의 목숨을 건 동전 던지기를 유도한 안톤 쉬거는 역시나 맥락과 관계가 없는 몇 마디 말들을 더 하더니 동전의 면을 맞춘 주인을 죽이지 않고 휴게소를 빠져나옵니다.
동전 앞뒷면 맞추기, 즉 코인토스를 한 것이죠.
이 부분을 싸이코패스의 전형적 특징인 사회적 소통능력의 부재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저는 그보다 안톤 쉬거라는 인물을 단순한 싸이코패스나 살인마가 아닌, 어떤 피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으로 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불가피한 ‘재해’이자 ‘재앙’이 의인화된 캐릭터입니다.
누군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예고 없이 찾아와 피할 수 없는 공포와 시련을 주고 절반의 확률로 목숨을 앗아가거나 살려주는 것이죠.
안톤 쉬거의 코인토스와 영화 <다크 나이트>의 투페이스, 하비 덴트의 코인토스는 광기의 표출과 자기 합리화,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는 같지만 궁극적인 목적과 결과에 있어서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가 행하는 코인토스는 정해진 결과를 상정한 채 스스로의 광기를 억누르기 위한 장치로서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죠.
퇴역한 군인 르웰린 모스는 사막 지역에서 짐승들을 사냥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는 영양 하나를 빗맞히고 이를 씁쓸해하며 영양 무리가 있던 곳으로 걸어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피를 흘리며 걸어가는 개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죠.
총에 맞아 다리를 저는 검은 개가 모스를 향해 뒤돌아 보는 장면은 모스가 품게 될 탐욕을 향한 복선이자, 앞으로 그에게 닥칠 운명에 대한 상징과도 같습니다.
개가 걷는 방향의 반대편에서는 멕시코 갱단의 처참한 총격전이 한 판 벌어져 있었습니다.
모스는 현장에서 엄청난 양의 마약과 2백만 달러의 현금, 그리고 아직 목숨을 유지한 채 물을 달라 사정하는 생존자 하나를 발견하지만, 돈만 챙겨 현장을 빠져나갑니다.
밤이 되자 모스는 물을 챙겨 다시 현장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돈과 마약을 회수하러 온 카르텔 조직원들과 마주쳐 황급히 도망치다 총상을 입고 그곳을 겨우 빠져나옵니다.
정년퇴직을 앞둔 보안관 에드 톰 벨은 영화의 제목이 말하는 '노인'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노련하며 정의롭고 점잖지만, 늙고, 신중하며, 주변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는 살인사건의 현장과 시신들에서 하나같이 총격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시체에는 구멍만 뚫려있다는 것을 수상히 여깁니다.
언뜻 보기에 총상으로 보이는 상처를 입은 시신들의 피살 현장에 탄피도, 탄두도 없으니 범인의 정체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드는 겁니다.
한편 멕시코 카르텔로부터 겨우 몸을 사린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르웰린 모스는 아내를 본가에 보낸 후 자신 또한 돈가방을 챙겨, 살던 컨테이너 집을 빠져나옵니다.
카르텔의 간부들과 함께 모스가 떠난 범죄 현장을 찾은 안톤 쉬거는 돈가방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위치 추적기를 발견한 후 간부들을 가차 없이 살해하고 모스를 잡기 위해 신호를 쫓기 시작합니다.
안톤 쉬거는 모스가 살던 빈 트레일러에 들어가, 소파에 앉아 우유를 마십니다.
그리고 TV의 화면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모스와 안톤 쉬거가 모두 떠난 트레일러에 세 번째로 찾아온 사람은 늙은 보안관 에드입니다.
그는 안톤 쉬거가 남긴 우유를 마시며 같은 자리의 소파에 앉아, 같은 TV의 화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공권력의 상징, 에드 또한 모스, 안톤과 같은 불확실한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 장면이죠.
멕시코 범죄조직은 자신들의 돈을 되찾기 위해 살인 청부업자 카슨 웰스를 고용합니다.
이 부분에서 관객은 카슨 웰스가 살인마 안톤 쉬거와 맞설 수 있는 대항마적 캐릭터라고 생각하게 되죠.
이렇게 이야기는 자신들의 돈을 되찾으려는 멕시코 마약 카르텔과, 마찬가지로 그 돈을 노리는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범 안톤 쉬거, 돈을 챙겨 도망치는 르웰린 모스의 삼파전으로 흐르게 됩니다.
신호를 쫓던 안톤 쉬거는 위치추적기가 가리키는 한 모텔을 발견하게 되고, 차를 세워 모텔에 잠입하지만 동시에 모스를 찾아온 멕시코 갱단과 마주쳐 그들을 다 죽이고, 그 틈에 모스는 도망치는 것에 성공합니다.
가까스로 도망쳐 다른 모텔에 온 모스는 돈가방에 위치 추적기가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지만 이미 안톤 쉬거가 근처에 찾아온 이후였죠.
여기서 숨 막히는 긴장감의 추격전이 펼쳐지는데 결국 모스와 안톤 쉬거는 서로 부상을 입고, 모스는 다시 도주합니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으로 간 모스를 찾아온 것은 카르텔이 고용한 살인 청부업자 카슨 웰스입니다.
카슨은 모스에게 협박 끝에 조건을 제시하고 모텔로 돌아가지만, 모텔방에서 안톤 쉬거를 만나 허무하게 살해당합니다.
앞에서 경찰서를 빠져나올 때도 손에 묻은 피를 씻어냈고 멕시코 갱단을 죽일 때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카슨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타고 안톤 쉬거의 발 쪽으로 흐르는데, 그는 피에 닿지 않기 위해 발을 들어 테이블에 올립니다.
안톤 쉬거는 때마침 카슨에게 전화를 건 모스의 전화를 받아 돈 가방을 돌려준다면 넌 죽이겠지만 아내만은 살려주겠다 합니다.
모스가 이걸 받아들일 리 없죠.
병원을 벗어나 다시 도주하는 모스.
그는 대낮에 같이 맥주를 한잔 하자고 제안하는 낯선 여성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장모는 멕시코 갱단에게 속아 그의 위치를 발설합니다.
그렇게 근처의 모텔에서, 모스는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안톤 쉬거에 맞설 만큼 강했고, 현명했던 르웰린 모스조차, 변화하는 혼돈과 재앙의 운명에서는
끝내 벗어나지 못한 것이죠.
몇 번의 위기를 넘긴 그는 어느샌가 자신이 조금은 안전하다 섣불리 판단했고, 그 대가는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이었습니다.
안톤 쉬거는 끝내 모스를 죽이거나 돈가방을 빼앗지도 못했고, 에드 톰 벨은 끝내 안톤 쉬거를 잡지 못했으며, 르웰린 모스는 끝내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보안관 에드 톰 벨은 사건 현장을 찾아가 케틀링 건에 맞아 날아간 문고리와 죽어있는 르웰린 모스, 그리고 멕시코 갱들을 발견합니다.
에드와 안톤 쉬거가 사건 현장에 있던 시간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에드는 안톤 쉬거와 마주치지 못합니다.
안톤 쉬거는 재앙 그 자체이고, 르웰린 모스는 모든 선택의 상황에서 안정보다는 변화를 택했으며, 에드 톰 벨은 신중하고 지혜롭게 판단합니다.
그렇기에 에드는 재앙과 마주치지 않게 되는 것이고 사건의 뒤를 쫓기만 합니다.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서 순간을 즐기는 젊은것들의 세상을 떠나, 시간을 초월한 지성과 영원의 세계인 비잔티움으로 향하듯이 말이죠.
한편 모스를 죽이지 못한 안톤 쉬거는 모스의 아내, 칼라를 찾아갑니다.
죽이기 위해서 간 것이지만 그는 칼라에게 코인토스의 기회를 줍니다.
칼라는 코인토스를 거부하며 안톤 쉬거에게 '결국 결정하는 것은 동전의 우연이 아닌 당신 자신'이라고 합니다.
이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재앙 자체로서의 안톤 쉬거를 한 방에 무너뜨릴 수 있는 통렬한 논리입니다.
칼라의 말에 안톤 쉬거는, 무색하게도 '나 또한, 그 동전의 우연, 운명과 함께 여기까지 온 것이다.'라고 단번에 반박합니다.
이후, 안톤 쉬거는 신발을 확인하며 집을 나섭니다.
신발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 하는 그의 행동에 비추어 봤을 때, 이는 곧 칼라의 죽음을 의미하죠.
차를 몰고 떠나는 안톤 쉬거는 신호를 지켜 교차로를 가로지르다 갑자기 신호 위반으로 돌진해오는 차와 강하게 충돌합니다.
누군가의 살인청부나 의도된 사고가 아닌, 단지 '우연에 의한 불확정적 사고'를 당하는 것이죠.
사고로 인해 개방성 골절상을 입은 안톤 쉬거는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을 깨닫고, 영화에서 처음 보이는 당혹스럽고 다급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돈을 건네며 옷을 벗어달라 합니다.
그리고 상처를 동여 맨 후 황급히 자리를 떠납니다.
아이들에게는 누군가 묻는다면 자신을 보지 못한 것이라 이야기하라고 신신당부하고 말이죠.
이 사건으로 안톤 쉬거 또한 다른 인물들과 다르지 않게, 시간과 무작위의 사고, 운명이라는 큰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극 중 살아남은 살인마 안톤 쉬거의 끝도, 탐욕을 쫓다 죽음을 맞이한 모스와 카슨 웰스, 멕시코 갱단의 단원들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영화는 통렬하게 꼬집어 보여주는 것이죠.
르웰린 모스가 낯선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자신의 이상향으로 온전히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 유혹을 넘겨 달아났다 하더라도 결국 그는, 그 탐욕에서 비롯된 재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르웰린 모스는 어떻게든 파멸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건은 미결로 일단락됩니다.
에드는 은퇴 후 부인과의 식사 중에 그녀에게 자신이 꾸었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부분 또한 해석의 여지가 다분하다 하겠습니다.
저는 그 꿈이 과거와 미래, 르웰린 모스와 안톤 쉬거, 그리고 꿈을 꾸는 주체인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각자 영화를 보는 분들의 자의적인 해석에 맡기도록 하죠.
영화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언급한 부분들 외에도 여러 상징과 크고 작은 복선들이 치밀하게 구성되어있는 영화입니다.
'흠잡을 것이 없다'라는 게, 바로 이런 작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제목의 해석에 대한 부분과 다소 잔인한 묘사가 단점이라 생각하지만 이 영화의 경우에는, 완성도와는 별개로 저 개인의 작은 소견일 뿐, 감점요소로 적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애초에 제목은 국내의 번역에 대한 불만이기 때문에 작품 자체의 평에는 적용할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영화에 대한 저의 평점은 6점 만점에 6점입니다.
OST나 BGM 없이 시작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작품인지에 대해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으로는 극 중 르웰린 모스가 윈체스터 샷건의 총신을 직접 톱질로 잘라내 사용하는 소드오프 샷건이나 12 게이지 벅샷 탄환, 다른 영화들에서는 상당히 보기 드문, 안톤 쉬거의 레밍턴 샷건에 장착된 소음기도 눈길을 끌더군요.
소드오프는 주로 총 자체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이용되는 방법입니다.
놓치기 쉬운 부분이지만, 총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소소한 볼거리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리뷰,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평안한 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