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있어 영화 <안나>는 기대치가 너무 낮은 작품이었고, 그만큼 걱정이 됐던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일전의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바로 전 작품이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라는 졸작이었고, 2014년에개봉한 <루시> 이전에는 <제5 원소> 정도가 마지막 괜찮은 영화였으니까요.
맙소사, <제5 원소>가 무려 1997년 작품입니다.
세기가 바뀐17년 동안 양산형 영화의 각본을 쓰고 제작에 손을 대면서 하나같이 안 좋은 작품들을 연출했던 감독이었단 거죠.
그래서인지 정말 기대가 적었던 영화입니다.
아니, 사실 아예 기대치가 없어서 그냥 사전 정보가 없었다면 '또 얼마나 못만들었을까'하는 마음으로 봤을 영화죠.
그런데 우연히 영화를 즐겨보는, 가까운 분들이 개봉 직후 이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며추천을 하더군요.
그래서 최소한 '재미의 요소 정도는 확실히 있으려나?'정도의 기대만갖고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의 '재미있다'는 평가를 듣고 영화에 더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장르에 있어서도 첩보 영화는 제겐 취향 저격과도 같습니다.
특히 존 르카레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나, 작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공작> 같은 작품들은 개인적으로 6점 만점에 4점을 훌쩍 넘는 평점을 매길만큼, 담고있는 스토리의 무게감이나 영화적 완성도의 측면에서 뛰어났다 하겠습니다.
액션이 더해진 첩보물 중에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의 트릴로지로 대변되는 본 시리즈 역시 제 인생의 역작이라 할 정도로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고, 취향을 떠나 영화의 만듦새 또한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후 개봉한 제레미 레너 주연의 <본 레거시>도 저는 재미있게 봤고(bourne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와서 그렇지, 첩보 영화로서 완성도는 나쁘지 않았어요), 본 시리즈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는 혹평까지 받는 <제이슨 본> 조차도 저는 개봉 첫 날,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남다른 감동을 느끼며 관람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비평이라는 도마 위에서는 단점이 많은 작품들이긴 하지만요.
소감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감독으로서 재기와 소생에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아요.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작품입니다.
그래요.
저는 이 사람이 그저 이 정도의 영화라도 만들어주길 바랐던 것인지도모릅니다.
뤽 베송 감독,
사샤 루스, 킬리언 머피, 루크 에반스, 헬렌 미렌 주연의 영화 <안나> 리뷰입니다.
스포일러의 여부를 떠나 필요한 모든 내용을 이야기하고,주관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비평하는 글이니 원치 않는다면 지금 이 페이지를 벗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1985년, 모스크바.
영화는 첩보활동 중인 미 중앙정보국 요원들이 소련의 KGB에 의해 정체가 노출돼 사살당하고,
KGB의 주석으로 보이는 바실리예프가 요원의 머리를 잘라 CIA에 보내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받아본 사람은 CIA 요원, 레너드였죠.
구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 KGB라는 기관은 1991년, 정확히는 1991년 8월에 공산당 보수세력이 체제 복권을 목표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감금했던 '8월 쿠데타'가 성공했다 쳐도 이미 소련은 걷잡을 수 없는 붕괴의 수순을 밟는 중이었기에주도세력들만 충공깽.실패로 끝나면서 함께 해체됐기 때문에 1985년이면 이미 그 행보의 막바지즈음이었다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모스크바의 한 시장에서 마트료시카 인형을 팔고 있던 주인공 안나는 한 캐스팅 매니저를 통해 모델로 픽업 캐스팅됩니다.
그리고 영화는 안나의 모델 활동을 보여줍니다.
모델 생활에 잘 적응해 동성의 애인까지 사귀며 승승장구하던 그녀에게 어느 날,모스크바 출신의 남자 올렉이 호감을 갖고 접근합니다.
파리에서 그녀는 두 달(!) 동안 섹스를 무기로 그를 안달하게 만들다가결국 그가 무역업을 하고 있으며 사실시리아, 리비아, 소말리아 등의 내전 국가에 무기도 밀매하고 있음을 실토하게 합니다.
안나는 샤워를 하겠다고 욕실로 가더니 세면대 아래에서 총을 꺼내 올렉을 사살합니다. 시체에서 사리가 나왔단 얘기가 있어요
시간은 다시 3년 전으로 거슬러 갑니다.
장교의 딸로 평범하면서도 나름 안정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 안나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어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진,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약에 찌든 남자 친구와 함께 살며 온갖 폭언과 욕설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염증과 분노였습니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환경 속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만은 잊지 않았죠.
그녀는 자신에게 유일한 탈출구이자 구원이 될 방법은 아버지의 길을 걷는 것, 즉 군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해군에 입영 지원서를 씁니다.
어느 날, 남자 친구는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일행과 안나를 꾀어 버젓이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과 쫓고 쫓기는 추격 끝에 둘은 겨우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집에서는KGB의 훈련 요원 알렉스가 미리 들어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안나의 남자 친구를 서슴없이 총으로 쏴 죽이고 안나에게 KGB의 요원으로 들어오라 제안합니다.
안나는 알렉스에게요원 활동 이후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을묻습니다.
이에 알렉스는 5년이라 답했고, 안나는 냉소를 품으며 옆에 놓인 부엌칼로 즉시 자신의 손목을 긋습니다.
안나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그 5년도 감언이설 이상은 아닐 것이고, 보는 앞에서 사람을 망설임 없이 쏴 죽이는 걸로보아, 이건 제안이나 부탁 수준의 단순한 스카웃이 아니거든요.
그냥 아무렇지 않게, 그 가느다란 팔로 힘도 들이지 않고 칼을 집어 들어 쓱 하고 긋는 모습에는 자유를 향한 안나의 간절함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냉소가묻어납니다.
다소 과격한 씬이었지만, 입체적인 안나의 캐릭터를 잘 표현해낸 장면이었어요.
여기까지.
저는 딱 여기까지만 크게 안 좋은 점 없이 재미있게 감상했던 것 같습니다.
알렉스는 안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내심 놀란 듯했지만 짐짓 무덤덤하게 입을 뗍니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하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여러분, KGB입니다.
그 철옹성 같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내각 휘하 정치 경찰로 첩보와 방첩은 기본이고 사법부나 법무부의 권위에도 완벽하게 벗어나 독립적인 포지션의 수사권과 구속권을 행하던 무소불위의 기관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요원의 인사 영입에 대해 일정 이상의 필요성이 있었다면 굳이 5년은 결국 구라이란 이야길 하지 않더라도, 다른 감언이설로 협상을 유도하고도 남았을 집단입니다.
그리고 상대가 5년이란 이야기에 손목을 긋고 목숨이 다해가는 독종이라면, 거기에 왜 믿음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는 건가요?
내용도 특별한 게 없습니다.
그냥 '넌 그렇게 바닥에서 속고만 살았으니까, 이번엔 그렇게 속이는 사람만 있진 않다는 걸 겪어보라'는 정도의 원론적인 임기응변입니다.
그 상황에 믿음이란 감성으로 설득을 한다니요.
개연성이 너무 부족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안나는 알렉스를 믿어 보기고 하고 그를 따라 KGB에 들어갑니다.
다시 3년 후 파리.
안나는 올렉의 사망 사건으로 도입부에 등장했던 CIA의 레너드에게 조사를 받지만, 결국 증거가 불충분해 어렵지 않게 풀려납니다.
그리고다시 6개월 전을 보여줍니다.
훈련을 마친 안나가 정식 요원에 발탁되기 전,
알렉스는 KGB의 여성 간부 올가에게 안나를 정식 현장 요원으로 추천하지만 올가는 안나를 탐탁지 않아 합니다.
올가는 알렉스의 설득에 못 이긴 척 안나에게무리한 임무를주게 되고, 안나는 임무에 실패합니다.
미션을 수행하려 행했던 액션 씬은 신이 납니다.
저는 이 호쾌하고 멋진 액션씬을 제대로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고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물론 마른 몸의 젊은 아가씨 혼자, 사방이 다 트인 레스토랑에서 총을 든 십수 명의 남자들을 모두 다 상대하며 모조리 해치운다는, 현실적인 설득력은 없는 장면이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배우가 고생을 많이 한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액션의 합이 좋았고, <존 윅>만큼은 아니지만,파라벨룸 대머리 액션씬보단 나은나름텍티컬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 내에 첫 임무를 완수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결국 얻고자 했던 목표물을 회수하는 것에는 성공합니다.
이로 인해 안나는 올가의 신임을 얻게 되고,요원으로서의 준비를 마친 후 모스크바의 시장에 마트료시카 인형을 파는 상인으로 위장해 투입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의도대로 모델로 발탁돼 올렉의 접근을 유도하여 그를 살해했고, 레너드에게 의심을 사 조사를 받게 된 거죠.
반말번역 좋아요.
이에 올가는 레너드의 의심을 경계하며, 조사를 따돌리고 나온 안나에게 당분간 조용히 파리에서 머물다모스크바로 돌아오라 합니다.
이시기에 안나는 이전부터 자신에게 마음을 보였던 알렉스와 사랑을 나누게 되죠.
그렇게 모스크바의 본부로 호출된 안나는 바실리예프와 대면합니다.
그녀는 바실리예프에게 지금껏 2년 간 실수 없이 임무를 처리했는데, 3년을 더 수행해 5년을 채우면 자유를 얻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바실리예프는 권총을 꺼내 그녀를 겨누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여기에서 나가는 방법은 죽음뿐이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그는 체스로는 언제든 승부해줄 테니 덤비라고 하고, 안나는 다음에 두자며 본부를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파리로 돌아옵니다.
알렉스는 안나와 그녀의 여자 친구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파리에 집을 마련해줬고, 그녀와의 통화에서 바실리예프에게 너무 휘둘리지 말라 충고합니다.
그리고 안나는 알렉스에게 자신에게 자유를 얻을 기회가 오면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느냐 묻지만 알렉스는 노력해보겠다고 대답합니다.
영화는 다시 그녀의 모델 활동을 보여주고, 다시 첩보원으로서의 임무도수행합니다.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몇 가지 실수를 하게 되고, 올가는 그런 그녀에게 자못 선심쓰듯 조금 쉬라며 휴가를 줍니다.
올가는 휴가 이후 다시 임무로 복귀한 안나를 모스크바의 본부로 소환하는데, 안나는 본부에서 바실리예프와 체스를 두다가 느닷없이 총을 꺼내 그의 머리를 쏴 살해합니다.
6개월 전.
실수가 있었던 일전의 그 임무를 수행하던 안나는 CIA 요원 레너드가 미리 깔아놓은 함정에 걸리게 되고, 미국을 위해 일할 것을 약속한 후에 겨우 풀려납니다.
그렇게 휴가를 떠나고 휴가지 하와이에 예고 없이 찾아온 레너드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여기서 레너드가 안나에게 바실리예프의 암살을 의뢰하죠.
KGB의 실권이 바실리예프에게 넘어가며 소련은 다시 미국에 적대적 노선을 취하게 되었고, 급기야 활동 중이던 요원들까지 제거당하자 CIA는 바실리예프의 실각을 위해 중장기적 작전을 실행하게 된 것입니다.
임무 수행 조건으로는신변보호와 수행 후의 자유로운 삶을약속받죠.
다시 6개월 후.
바실리예프를 죽이고 옆에서 크게 놀라아연실색한 알렉스에게 진정제를 주사해 기절시킵니다.
본부를 빠져나오는 부분의 액션도 괜찮았습니다.
초반의 레스토랑 액션씬이 트인 공간에서 안나 혼자 수많은 적을 상대해내는 것으로 다소 복잡하게 짜인 듯한 느낌을 줬다면, 비상사태가 선포된 본부 건물에서 적들을 해치며 빠져나오는 장면의 액션에서는 보다 빠르고 긴박한 연출이 돋보였다 하겠습니다.
물론 '저러다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떡하나'정도의 생각을 하게 하는, 긴장감 넘치는 섬세함은
없었지만요.
얼마 후, 소식이 끊긴 안나를 내심 걱정하는 알렉스와 레너드에게 문득, 안나로부터 각각 한 통의 연락이 옵니다.
안나는 둘에게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공원으로 나와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삼자대면을 예상치 못했던 알렉스와 레너드는 적잖이 당황하지만 안나는 그런 그들에게 각각 KGB와 CIA의기밀이 담긴 하드디스크를 건네주며 동시에 이별을 고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이상 자신을 쫒거나 찾지 말아 달라는, 무거운 협박이 담긴 부탁을 하고 자리를 떠납니다.
저는 예상했습니다.
영화가 그녀를 이대로는 무사히 떠나보내 줄 생각이 없다는 것과, 또다른 반전으로 결국에는 그녀에게 자유의 삶을 줄 거라는 것을요.
홀로 유유히 공원을 빠져나오는 안나를 기다리던 것은 KGB의 간부, 올가였습니다.
그녀는 가차 없이 안나에게 권총세 발을 쐈고 안나는 총에 맞아 쓰러집니다.
3개월 전.
안나는 올가와 은밀히 접촉해 CIA 요원 레너드와의 접촉 사실과 거래 내용을 전부 이야기합니다.
올가는 여기서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며 안나의 바실리예프 암살을 승인합니다.
바실리예프가 없어지면, KGB의 다음 주석 자리는 올가의 몫이거든요.
시점은 다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총에 맞아 쓰러진 안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확인한 후, 빠르게 몸을 굴려 미리 마련해 둔 탈출구로 빠져나가 옷가지와 방탄복을 모두 벗고 준비된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유유히 자유의 몸이 되어 현장을 떠납니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KGB 본부.
올가는 KGB의 주석이 되어 바실리예프가 군림하던, 그 자리에 앉아 옅은 흐뭇함이 깔린 미소를 띠며 안나의 요원 데이터를 삭제하고,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단점부터 이야기 해보죠.
우선은 스토리가 지루합니다.
각본에 구멍이 송송 뚫려서 잠시 몰입이되려다가 '이게 도대체 플롯과 무슨 관계가 있는장면인가'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하는 상황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다각적인 허술함이 주는 지루함'이라는, 각본의 단점을 메우기 위해 무리수를 두고 말았습니다.
플래시백과 플래시 포워드.
플래시백이 인물의 회상이나 현재의 상황 설명을 위한 과거로의 시간적 전환을 의미한다면 플래시 포워드는이와 반대되는 개념, 즉 미래에 일어날 일을 관객에게 미리 보여주거나 플래시백에 의한 과거를 일정 부분 회귀하는 서술을 말합니다.
이러한 기법의 활용은 관객에게, 경우에 따라 지루해질 수 있는 이야기에 활기를 더해주기도 하고, 복선의 회수나 사건의 인과를 납득시키기도 하며, 무엇보다 등장인물의 사연과 행위의 동기를 제시함으로써 캐릭터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순기능으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감독은 이 영화에서 무분별하기 그지없는 시간선 교차를 사용하며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2차 세계대전의 다이나모 작전을 다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를 보면 표기법이나 독음으로 보면 덩컬크나 됭케르크가 맞는데 콩글리시 재생산에도 한몫 하심플래시백을 영리하게 활용해 해당 요소에 대한 극찬을 받았었는데, 서로 다른 세 개의 시점에 각기 다른 관점까지 더해 하나의 결말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탄탄하게 기승전결을 전달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술적인 감각을 활용한 임기응변 정도였다 생각하지만, 완성도의 측면에 있어 큰 도움을 줬던건 사실이죠.
<안나>에서는 영화의 초중반 이후로 계속해서 이전과 이후의 상황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며 '이게 사실은 이랬던 것이다'를그야말로 '점철'하고 있는데, 이게 바로 이 영화를 무너뜨린 가장 치명적인 단점입니다.
시간선 교차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탄탄하게 잘 짜인 스토리의 일부에 자리 잡은, 다소 정체된 흐름과 여기서 발생하는 지루함을과거 회상이나 후술, 재현 등의 방식으로 상쇄하는 데에 사용해야 합니다.
막 갖다 붙인다고 허술한각본이 가진 지루함이 해결되는 건 아니란 뜻입니다.
플래시백은 그렇게 쓰는 게 아니에요.
시대적 배경의 연출에도 실패했습니다.
영화에서 1980년대라는 시대가 느껴지는 부분은 KGB라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밖에 없습니다.
영상의 톤이나 캐릭터들의 스타일이나 배경들이 그냥 거의 다 현대적입니다.
미장센에 신경을 너무 안 썼어요.
이건 아마 다른 20세기 후반 배경의 영화들이 흔히 사용하는 '레트로 감성'의 클리셰를 깨려는 의도 같은데, 그럴 거였으면 80년대의 대중문화나 뉴스 화면같은 기믹이라도 좀 더 넣었어야죠.
작년에 개봉한 비슷한 배경의 영화,
<아토믹 블론드>는 어땠는지 아십니까?
주인공 샤를리즈 테론이 첫 등장부터 깃을 세운 롱코트에 보잉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하는데 OST는 Queen의 killer queen이 깔려요.
적어도 이 정도의 인상은 줘야 '80년대 후반의, 그 체제 붕괴 직전의 시대로구나'하는 겁니다.
극중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필름 카메라로 잡지 화보를 촬영하며 필름 케이스들을 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현대라고 해서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니, 이 또한 주마간산 격의 무성의한 연출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KGB의 현존을 가정하고 만든 현대 배경의 작품이었다 해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80년대에 CCTV 데이터를 빼돌리는데 테잎이 아닌 하드 디스크를 들고 나오는 등의 잘못된 고증도 문제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칭찬하고 싶습니다.
주인공 안나를 연기한 사샤 루스는, 저의 직업 특성상 이미 예전부터 수많은 브랜드 광고와 잡지 화보 등을 보며 낯이 익은 모델이었습니다.
아, 런던이었는지 밀라노였는지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 컬렉션 현장에서 직접 봤던 기억도 있고요.
그래서인지 우선은 반가움이 컸습니다.
저는 자신의 색깔을 확실히 갖춘모델들이 배우 생활을 해 나가는 것에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브랜드, 특히 패션이나 뷰티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브랜드는 자신들 고유의 색깔이나 표현코자 하는 컨셉을 비주얼로 뚜렷하게 나타내 주길 원합니다.
그 표현의 주체가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모델의 표정과 몸짓, 말투, 눈빛 등을 통해 브랜드가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죠.
이는 배우라는 직업을 놓고 볼 때에는, '연출가가 의도한 캐릭터표현'이라는 것과 직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프로 무대에서 활동해왔던 전문 모델은 '대게', 배우로서의 역량도 상대적으로 원활하게 갖춰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카라 델러빈은 망했어요합니다.
사샤 루스는 아직 영화배우로서의 경험이 턱없이 모자란 사람이고, 이러한 부분은 영화 내의 몇몇 어색한 연기들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캐릭터에 대한 이해는 좋았어요.
어차피 이런 류의 영화는 스토리 전개가주인공 1인을 위주로 흐를 수밖에 없는데,연출자가 의도한 캐릭터를 어느 정도로 표현해줄지는 배우의 연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킬리언 머피와 루크 에반스는 과하지 않은 연기로 각자의 매력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사샤 루스를 잘 받쳐줬고,헬렌 미렌은 실제로 KGB에 잔뼈가 굵은 여자 간부가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초반 이후 무너진 개연성과 혼란스러운 시점 교체로 인해 지루함의 산재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게 된 영화.
졸작을 향해 추락하던 각본을 배우들의 연기와 화끈한 액션 연출로 멱살 잡고 끌어올린 영화, <안나>에 대한 제 평점은 6점 만점에 2점입니다.
감독의 차기작에 기대를 갖게 할 만한 작품이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첩보 영화로서의 완성도나 작품성을 기준으로 보신다면 추천하기 힘든 영화입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보시면 재미있을수는 있는 작품이에요.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는데, 배우의 모델 커리어를 이용해 모델로 위장 취업시키는 부분은 납득이 갔지만 모델 활동을 너무 많이 보여주다 보니 중반 이후론 사족처럼 느껴졌습니다.
약에 취한 남자친구와의 잔인한 섹스 장면이나 알렉스, 레너드와의 베드씬도 스토리 전개에 끼치는 영향력에 비해 너무 과하고 지루한 느낌을 줍니다.
개인적으로는모델들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는 부분들이나 다소 격하게 연출된 베드씬은 없애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