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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seinate Sep 18. 2016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터프가이' 정조

비밀편지 속에 숨겨진 정치의 내막 <정조의 비밀편지>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는 대중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인간 이산의 개인적인 삶도 드라마틱한 데다가, 군주인 정조의 개혁 정책도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역사의 비극을 눈 앞에서 체험했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죽인 할아버지 영조가 마음에 들어할 만큼 똑똑한 세손이었고, 유학에도 깊은 조예를 보였다. 수원 화성의 신축, 규장각의 신설을 통한 학문 중흥, 차별받았던 서얼의 등용, 상업에 많은 영향을 끼친 신해통공 등 개혁적인 정책을 시행한 군주로도 이름 높다. 

그의 사후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 체제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점에서 더 오래 살지 못해 아쉽다는 의견도 나올 정도다. <이산>, <한성별곡>을 비롯한 드라마와 <사도>와 같은 영화가 개봉하면서 정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정조가 불같은 성격을 지녔고, 신하들에게 욕을 하거나 급한 성격에 스스로 화를 불태우는 모습을 지녔다는 점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학문을 좋아하고 개혁을 시도한 군주로서의 이미지도 있지만 사실 정조는 한 번 화를 내면 무섭게 내는 터프한 군주였다. 정조가 신하들에게 보낸 편지는 정조가 학문도 좋아했지만 스스로 '태양증'이라고 일컫을 만큼 다혈질에 조급한 성격이었음을 보여준다. 

            

▲  정조의 비밀편지, 안대회, 2010.01.08

ⓒ 문학동네


이 책 <정조의 비밀편지>는 정조가 신하 심환지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가 연구하여 그 결과물을 출판한 것이다. 즉 실제 사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조는 비밀편지를 활용하여 정치적인 사안을 조정하였고 신하들의 대소사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자료와 상세한 설명이 담겨있는 책이다.

정조의 편지처럼 왕이 보낸 편지를 어찰이라고 한다. 이 어찰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정치적인 비밀 교서를 몰래 내리는 데 사용되거나, 개인적인 친목 편지로 쓰는 등 신하들과의 관계를 조정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에는 어찰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왕이 직접 내린 정치적인 편지이기에 비밀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많은 어찰들이 훼손되거나 고의적으로 파기되어 이를 연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행히 정조의 어찰은 많은 부분이 꼼꼼히 남겨져 있어 당대의 정치적 상황의 내막을 알려준다. 또한 공식적인 사관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남겨져 있지 않은 정조와 신하간의 관계를 짐작하게 해준다.

원래 왕의 편지인 어찰은 다 보고나면 세초(씻어서 없앰)하는 등의 방법으로 없애야 한다. 그러나 심환지는 자신이 받은 편지를 없애지 않았다. 덕분에 역사 사료로 남게 되었다. 이 정조의 어찰은 사적인 편지와 정적인 편지가 모두 섞여 있어 그 시대의 일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다. 

정치적인 사건의 경우,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남은 기록은 공식적인 것으로 명분을 강조하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 이 비밀편지를 살펴보면 그 내막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다. 

정치적 '수'가 높았던 정조의 모습과 다혈질 성격이 그대로 담긴 편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군주와 신하가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부분이 나온다. 신하들이 공식적으로 정치적 사안에 대해 명분에 입각하여 논하고, 신하의 찬성과 반대 의견이 기록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의견은 안건을 논의하기 전에 정조가 편지를 통해 미리 지시한 바에 따른 것이다. 

정조는 학문에만 밝은 군주가 아니라 정치적 교섭술에도 뛰어난 군주였던 것이다. 신하를 어르고 달래고 화내고 모욕하고 조종하는, 요즘 시대의 말로 표현하자면 '수'가 높은 정치인이었다. 이런 식으로 공식적인 기록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내막이 어찰을 통해 드러난다.

비밀 편지인만큼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도 많다. 특히 시선이 가는 부분은 정조의 성격이 얼마나 급하고 괄괄했는지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인자하고 평온한 학자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조의 비밀편지에는 과격한 표현이 종종 눈에 띈다. 신하에게 점점 나이를 먹고 현명해지긴커녕 늙어서 사람 화나게 한다고 욕을 하거나, 젖비린내 난다고 비아냥거리는 등 다혈질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랫동안 근엄한 개혁적 제왕의 이미지로 굳어진 정조는 어찰첩이 출현한 이후 현실 정치가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재등장했다. 한편으로는 정조를 독살했다고 알려진 심환지에게 보낸 일련의 편지이기에 정조 독살설을 둘러싼 찬반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 본문에서

이 어찰과 편지는 정조의 성격과 정치적 교섭술을 드러내는 것 이외에도 또 다른 가치가 있다. 바로 노론에 의한 정조 암살설을 부인하는 근거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인 안대회 교수는 이 책과 관련한 어찰 자료와 조선시대 사료를 근거로 들어 일각에서 제기되는 정조 암살설을 부인하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검토해 보아도 벽파가 정조를 암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커튼 뒤에 숨겨진 정치적 내막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교양 서적으로 읽기 쉬우면서 연구 성과에 대한 언급도 있어 매우 좋은 책이다. 책의 길이도 비교적 짧은 편이다. 다만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편지는 추가적인 지식을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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