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서로 다른 시선
어릴 적에는 휴일만 되면 가족들이 TV 앞에 모여 특선영화를 보는 것이 하나의 잔재미였다. 성룡,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같은 액션 히어로들로 시작해서 케빈처럼 매년 만날 수 있는 반가운 얼굴들까지. 지어낸 이야기에 대본을 외우고 세트장에서 가짜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고 있는 것일 뿐인데, 왜 그렇게나 울고 웃으며 푹 빠져서 보았던 것인지. 대중적이고 가족적인 영화들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생활 속에 녹아들어, 우리의 곁에서 친구가 된다. 나는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대중적인 영화를 소비하는 소비자였다.
그런데 예술대학에 들어와서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있자니, 소위 비디오 가게에 가면 믿고 거르던 재미없어 보이는 '예술영화'들을 서로 언급하며, 인생영화라느니- 최고의 영화는 무엇이라느니- 하며 토론을 하기에 이르렀다. 알파빌, 베를린 천사의 시, 라쇼몽... 난 그들이 언급하는 영화들은 제목 하나도 알지 못했다. 저렇게 지루해 보이고 재미없어 보이는 영화가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걸까. 예술에 대해 알게 되면 나도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고 더 영화를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건 그냥 '있어 보이려는' 예술가의 허세 같은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영화가 왜 좋은지 물어보았지만, 하나같이 나를 바보 같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설명하기 힘들어했다.
"일단 좋은 영화들을 많이 봐봐."
난 우선 그들이 추천해 준 영화를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 도서관은 작았지만 예술영화가 많았기에, 그들이 추천해주는 영화는 거의 볼 수 있었다. B급 액션물을 좋아하던 나에게 예술영화의 문법은 굉장히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래도 많을 때는 하루에 3편씩 보기도 하고, 지루하고 졸더라도 미련할 정도로 끝까지 않아서 보려고 했다. 결국 게임할 때만 쓰던 내 방에 있는 TV를 보자기에 싸 들고 학교 과실로 가지고 와서, 책상 밑에 자리를 깔았다. 한 친구는, 자기는 겨울방학 동안 쓰지 않는다며 두꺼운 이불이 깔린 자기 자리를 내주었다. 난 왜 그렇게 그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영화를 봤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저, 내 친구들이 보고 있는 풍경을 나도 보고 싶었다.
그렇게 본 영화 중에는 정말 생각할 것도 없이 재미있는 영화도 있었고, 지루했지만 유명해서 지루하다고 말 못 하는 영화도 있었다. 그렇게 유명한 영화인데 내가 지루했다고 말하면 왠지 우습게 보일 것 같아서 차마 말은 하지 못했다. 보고, 또 보고 하다 보니 어느새 20년 넘게 영화를 본 편수가 꽤 되었다. 소위 '예술영화가 가진 그 무엇'은 지금도 뭐라고 표현하긴 힘들지만, 이렇게 영화를 보다 보니 하나 말할 수 있는 건 있다. 내가 지루한 건 그냥 지루한 것이다.
하나의 영화를 두고 어떤 평론가는 좋게 말하고, 어떤 평론가는 나쁘게 말하기도 한다. 또 평론가와 대중의 별점이 다르기도 하고, 흥행과 평점은 별개가 되기도 한다. 최고의 영화감독이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는 대중적인 영화를 찍는 감독도 있지만 예술영화만 고집하는 감독도 있다.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 어려운 말로 뒤섞인 평론가의 영화평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박스오피스 1위가 진리일까? 아니면 아카데미 상을 받은 것이 좋은 영화일까?
영화를 단순히 소비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런 건 없다. 영화는 종합예술이자 대중예술이다. 대중에게 선보이기 시작하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대중에게 달린 것이다. 누구는 매트릭스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아 감탄할 수도 있지만 누구는 단순히 액션이 멋있어서 감탄하기도 하고, 누구는 키아누 리브스가 잘생겨서 감탄하기도 하고, 누구는 CG나 촬영기술에 감탄하기도 하고, 누구는 시나리오에 감탄하기도 한다. 사람마다 살아온 인생이 다르기 때문에, 영화 안에 들어있는 세상을 볼 때 어느 것에 중점을 두고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지 다른 것은 당연하다. 저 사람이 본 것을 내가 못 보았다고 해서 저 사람이 나보다 영화를 잘 해석하고 우월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감독에 대해서 알거나 영화의 뒷얘기를 알거나 비슷한 다른 영화와의 관계를 안다고 해서 그걸 모르고 보는 사람보다 영화를 더 잘 보는 건 아니다. 예술은 작품으로만 말해야 한다. 영화의 본질은 즐기는 것이며, 그건 그냥 취향이다.
"난 이 영화를 이렇게 봤어요"라고 말하는 평을 듣고 있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건 내 인생을 관조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지만, 그건 그냥 내 인생이다. 거짓말로 꾸며진 이야기에 세트장 안에서 거짓 연기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서로 자신의 인생을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영화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인생과 겹치게 되는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이야기 나누는 것만 같다.
사람들이 나와 다른 평가를 한다고 해서 주눅 들거나 우습게 보지 말자. 각자의 인생이 다른 것처럼 그냥 다른 것이다. 우리는 '파검흰금 드레스'처럼 서로 다르게 세계를 보고 있다. 다만, 영화를 다양하게 볼 필요는 있다. 때로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영화에서 또 다른 내 삶의 이야기를 볼 수 있고, 지루하게만 생각했던 영화들에게서 또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이제는 내 친구들과 같은 풍경을 보려고 했던 내가 아니다. 나는 나만 볼 수 있는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네가 보는 영화도, 내가 보는 영화도 다 맞는 이야기다.
우린 서로 다른 기준으로 영화를 보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