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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Aug 07. 2022

<헌트> 비극적 역사의 영화적 승화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남긴 역사적인 소재들은 언젠가는 영화에 쓰인다. 그러나 그 상처가 아직 깊고 해결되지 않았을 때는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마련이다. 특히 한국은 아직도 근대사에서 서로 날을 세워 싸우는 부분들이 있고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영화의 소재로 이용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영화들은 그 역사가 진짜였는지, 혹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어떤 게 진짜인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거나, 그 사건의 피해자에게 감정을 맞춰 만들곤 한다. 상처가 깊은 역사는 '고증 오류'에 매우 민감하다.


이정재 감독의 데뷔작 <헌트 HUNT>는 1983년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다. 박정희 암살 이후 혼란했던 정부를 12.12 군사 쿠데타로 장악한 전두환 시대의 이야기다. 보통 전두환 정권인 제5 공화국 시대를 다룬 영화들은 1980년 광주나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다룬다. 아마 사람들은 1983년이 어땠는지 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꽤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던 때였고, 북한과도 굉장히 날을 세운 시점이었다. 실제로 전쟁 바로 직전까지 갔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헌트>는 이런 역사적 맥락을 조금은 아는 한국인이 아니라면, 약간 불친절한 영화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대통령은 어떤 사람인지, 1980년 광주가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당시 남산의 고문기술자들이 얼마나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 체포하고 고문했는지 모르면 그 감정에 이입하기 힘들 테니 말이다. 칸느에서 그다지 좋은 평을 못 들었던 것은 그래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킹덤>이나 <오징어 게임>이 외국인에게도 호평을 들은 건, 한국인이 보기에 불필요한 설명들이 친절하게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한국인들은 <오징어 게임>이 좀 루즈하고 신파적이라 느꼈던 것이고, 외국인들은 신선하게 다가온 것이다. <헌트>는 불필요한 설명은 많이 배제하고, 빠른 연출로 역사 속에서 살고 있는 김정도(정우성)박평호(이정재)에게 집중한다.




영화적으로 승화시킨 역사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에 나오는 역사를 공부하고 가야 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내 생각에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나머지는 크게 몰라도 된다. <헌트>는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거나 역사를 알리려는 영화가 아니다. 그 당시 비슷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지만 이름이나 스토리도 장소도 조금씩 다르다. 그저 모티브로 이용해서 엮었을 뿐이다. 그리고 스토리상, 역사적 사건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 지점에서 이정재 감독의 시나리오는 굉장히 영리한 판단을 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은 그동안 상처가 많은 역사였기에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롭게 모티브로 이용하고 해석하는 것에도 조심스러웠다. 인도의 대체역사물인 S.S. 라자몰리의 영화 <RRR>에서, 역사를 저렇게 재미있게 이용하고 표현한 그런 지점이 굉장히 부러웠었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헌트>는 역사를 딱히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상상을 더해 두 사람의 이야기 안에 잘 녹여냈다. 그리고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들이 있지만, 어느 정도 한국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부분도 등장한다.


근대사에서 가장 암흑기였던 제5 공화국을 다루면서 이렇게 스타일리시한 첩보물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정재 감독의 역량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연출

사실 한국은 총기 소지가 굉장히 엄격하게 제한되어있어서 한국을 배경으로 박력 있는 총격신을 찍는 것이 어색하다. <헌트>에서는 그것을 '해외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채웠다. 시작하자마자 벌어지는 워싱턴 총격씬은 영화 <테넷>의 오페라하우스 신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긴장감의 연속이다. 김정도와 박평도가 서로 벌이는 스파이 색출 작전과 기싸움은 과연 누가 스파이인 '동림'일지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든다. 이 영화는 느슨해지는 구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몰아친다. 도쿄와 태국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상상 이상이다.



너무 긴박한 연출이 지속되고 빠른 편집들이 있다 보니, 사람에 따라서는 둘의 상황이나 스파이에 관한 증거를 쫒는 부분을 놓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놓치더라도, 표정이나 상황으로 그것을 잘 알아볼 수 있게 연출해 놓았다. 그리고 정말 재미있게도, 사실 이 영화는 '누가 진짜 스파이인가'와 같은 반전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스파이를 쫒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역사적인 아픔, 그리고 두 사람이 가지는 감정의 변화 등이 훨씬 중요한 주제다.


이 부분에서도 이정재 감독에게 박수를 치고 싶다. <헌트>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며 '우리는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어. 어서 아파해!'라고 관객에게 주입하는 영화가 아니다. <헌트>의 두 사람은 그저 조직의 일원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스파이를 찾는데 최선을 다한다. 관객이 그 두 사람에게 이입되어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배경에 깔린 아픈 역사와 자연스레 마주하게 되고 거기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호쾌하고 박진감 있는 액션씬과 두 남자의 긴장되는 대립이 만드는 영화적인 재미가 그 역사들을 알게 모르게 관객의 마음에 각인시킨다.





영화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것과, 아름답고 멋진 영상을 보여주는 것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동시에 해내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이정재 감독은 굉장히 훌륭한 교차점으로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단순히 '유명 배우가 감독을 했으니 돈도 사람도 많이 모여서 그랬겠지'라고 폄하할 영화가 아니다. 세세한 부분의 연출과 만듦새가 세련되었다. 복고를 재현하면서도 세련됨을 보여주는 건 쉽지 않다. 감독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수준의 영화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헌트>가 사람들에게 어필되어서 흥행에 성공할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이 영화는 한국의 스파이 영화에 한 획을 그었음에 틀림없다.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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