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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Sep 18. 2022

<9명의 번역가> 창작자의 주변에 맴도는 고통

하나의 창작물이 나오기까지, 창작자 하나만 열심히 작품을 만들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수많은 스텝이 함께하기도 하고, 그 작품을 팔기 위한 작업에도 역시 사람의 손이 많이 간다. 그 사람들은 왜 그 일을 하게 되었을까?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 주변에서 있는 사람들, 작가가 아니지만 작품에 관여하는 사람들.


2019년 프랑스에서 개봉한 레지스 로앵사르의 영화 <9명의 번역가 Les Traducteurs >는, 댄 브라운의 소설 <인페르노>를 전 세계에 동시 출간할 때 보안을 위한다며 11명의 번역가를 벙커에 가두고 혹사시킨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창작을 위한다며 창작가들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혹사시켜도 되는가? 이 영화는 창작자 주변인들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내용상으로도 번역의 뉘앙스나 각 나라의 말이 중요해서, 자막을 9개의 색으로 표현했고 각 나라의 번역가들은 실제 자신이 맡은 배역의 국가별 배우들이 참여했다. 영화의 원제는 <Les Traducteurs>로, '번역가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9명의 번역가들>이라는 제목을 붙여, 마치 한 명씩 죽어나갈 것 같은 '밀실 살인 추리물'로 마케팅을 한 점이 아쉬웠다.


번역가는 사실상 제2의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다. 한국에서 유난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 인기가 많은 것도, 번역가 이세욱의 역할이 크지 않았는가. 영화에서도 번역자막이 누구냐에 따라 엄청나게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또 최근 한국영화나 소설이 외국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번역의 도움이 컸다는 얘기도 많다. 언어가 주는 뉘앙스를 기계적으로 번역하면 절대 주지 못하는 것들을, 때로는 초월 번역을 통해 전달할 수 있어야 하니까.




피해자는 누구인가

<9명의 번역가> 영화 안에는 <디덜러스>라는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있다. 영화 초반부에는 이 책의 3권째가 출판되는 과정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9개국에 동시 출판하기 위해 9명의 번역가를 섭외해서 프랑스의 저택 지하의 벙커에 감금한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아직 번역이 끝나지 않은 <디덜러스 3권>이 누출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것은 당연히 작가와 출판사다. <디덜러스>의 출판을 맡은 에릭(램버트 윌슨)은 작품의 누출을 막기 위해 벙커를 이용하고 러시아 가드까지 고용하며 신경을 썼는데, 작품이 누출되어 돈까지 요구하니 그 범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는 교도소가 나오며, 누군가 감옥에 이미 갇혀있는 것으로 교차 편집한다.


보통 여러 명을 폐쇄된 공간에 밀어 넣고 한 명씩 죽어나가며 범인을 찾는 추리물에서는 '범인이 누구일까', '어떤 트릭을 썼을까'가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에선 '누가 작품을 누출했을까' 보다는 '왜 누출했을까'가 더 중요하다. 또 범인이 누구인지보다는, '진짜 피해자는 누구인가'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생각보다 초반에 누가 이 사건을 저지른 건지 밝혀지고 트릭까지 드러난다. 그게 이 영화가 '밀실 살인사건'처럼 생각하고 접근하면 안 되는 이유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관객들도 추리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는 복선의 장치가 많지 않다. 그저 그 이유를 나중에 끌어내기 위해, 이야기의 긴장감을 편집을 통한 연출로 만들어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고 그 이유가 바로 감독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에, 추리물이라기 보단 반전을 통한 사회 고발물에 더 가깝다.


에릭은 겉으로는 피해자이지만, 출판사 대표로서 자신의 비서와 번역가들을 아주 냉정하게 대한다. 출판사에서 일하거나 번역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문학을 사랑하지만 작가는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영화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교묘하게 겹치며, 서로의 입장이 계속해서 반전된다. 우리의 실제 삶이 그렇듯이. 진정한 선이나 악은 여기엔 없다.




꿈과 현실

이 영화가 특히 주목하는 건 덴마크의 번역가 헬렌(시드세 바벳 크누드센)과, 에릭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로즈마리(사라 지로도)다. 둘 다 사실은 창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사실은 그렇게 되지 못하고 창작가의 주변에서 일하고 있는 캐릭터다. 자신의 이야기를 펴내지 못하고 떠밀리듯 살아가는 인생은 사실 대부분의 우리들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사이, 내 재능과 내 직업의 사이에 있는 괴리는 살면서 모두가 한 번씩은 느낀다. 어릴 적에야 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성적이나 재능을 이유로 어릴 적 꿈은 서서히 멀어져 간다. 그러는 중에도 좋아하는 일을 계속해서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덕질을 하는 마음으로 어릴 적 꿈의 주변에 맴도는 사람들이 많다. 어릴 때 버스를 무척 좋아하던 아이는 커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고, 버스 운전사가 될 수도 있고, 이것도 저것도 재능이 없다면 버스 회사 경리로 일할 수도 있다.


헬렌은 자신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읽어본 에릭은, 그녀에게 재능이 없다며 보는 앞에서 원고를 태워버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소설 쓰기를 미루고 있던 그녀가 작가로서 용기를 낸 것에, 에릭은 철퇴를 가한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되려고 용기를 내는 지망생에겐 절망과도 같은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모든 책망을 자신에게 돌린다. 에릭은 번역가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은 것뿐 아니라, 나이 든 작가 지망생 마저 칼로 찌른 것이나 다름없다.


로즈마리는 계속해서 일을 제대로 못한다며 에릭에게 호통을 받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고, 에릭은 그런 그녀를 이리저리 구슬리며 이용만 하고 있다. 로즈마리는 에릭의 명령만을 따르다가, 나중에 자신과 에릭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된다. 로즈마리는 그제야 모든 것이 잘못되어있다는 걸 느낀다.


모두가 노력하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쳐야 하고, 거기에 작가 자기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또, 꼭 최고의 작가가 되지 못할 지라도 작가가 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사람도 있다. 그런 작가 지망생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듯, 혹은 자신도 역시 그런 창작가 주변인에 불과하다는 걸 잊으려는 듯, 에릭은 그들의 마음을 너무나 후벼 팠다. 말로 상처 주는 것은 실제 칼로 난도질하는 것보다 때론 더 아프고 무서운 법이다.





<9명의 번역가들>은 트릭이나 추리가 엄청나게 새롭거나 반전을 위한 반전을 주는 영화는 아니다. 애초에 영화의 모티브가 그랬듯이, 작품에 기여하는 주변인들의 목소리가 담긴 영화다. 꿈을 가슴에 담고도 미처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맴도는 그 자리에, 그걸 이용해서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다. 아무도 그들을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나는 그만큼의 재능과 열정을 가지고 있을까? 그게 아니면 나 역시 주변을 맴돌고 있을 뿐일까.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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