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지치고 힘든 삶이 계속되면 마음속으로 되뇌어본다. 나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모든 선택의 갈래에서 나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지금의 내가 최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대니얼스 감독 듀오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누구나 겪는 삶의 선택과 번뇌를, 형언할 수 없는 미친 영화로 만들어냈다. 대니얼스 감독 듀오는 대니얼 콴과 대니얼 샤이너트 두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니얼스는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필모그래피를 쌓다가, 블랙 코미디 영화 <스위스 아미 맨>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데뷔했다. <스위스 아미 맨>은 해리포터의 다니엘 레드크리프가 좀비로 연기 변신을 해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대니얼스 중 대니얼 콴은 중국계 감독인데, 이번 영화에서는 대니얼 콴이 가진 정체성과 능력이 정말 십분 발휘된 듯하다. 이 영화는 '유쾌하다''감동적이다'와 같은 말로 수식하기엔 모자라다. 정말 미친 듯이 멀티버스를 질주한다. 그리고 중국과 불교, 동양문화를 마블의 <닥터 스트레인지>, <샹치: 텐 링즈의 전설>처럼 대충 외형만 갖다 쓴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고 만들었다. 이 영화는 황금기의 홍콩 영화와, 불교의 공(空) 사상과 자비, 내 삶의 모든 실패들에게 보내는 헌사와도 같다.
황금기의 홍콩 영화
주인공 에블린(양자경)은 미국으로 이민 간 중국인으로, 남편 웨이먼드(케후이 콴)와 같이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세금 때문에 영수증을 잔뜩 펼쳐놓고 계산하고 있고, 내일 있을 중국식 새해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딸은 자신의 레즈비언 연인을 데려와 인사시킨다. 아버지는 치매 오고 거동이 불편해서 계속해서 자기를 부르고 돌봐줘야 한다. 세탁소엔 미국인 손님들을 잘 모르는 영어로 상대해야 한다. 에블린은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복잡하고 머리 아프다.
그때 웨이먼드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 가방을 풀어 소림사의 유성추와 쌍절곤처럼 다루며 위기를 극복한다. 목소리도 행동도 표정도 찌질해 보였던 남편이 갑자기 멋있어진다. 입안에 무언가(!)를 잘근잘근 씹으며 무술을 하는 모습은 성룡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웨이먼드 역인 케 후이 콴은 중국계 베트남인으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간 무술 배우로, 한국계 무술인인 탄 타오량 밑에서 태권도와 무술을 배웠고, <방세옥><트랜스포터><적벽대전>등의 무술감독을 맡은 원규의 조수로 일했던 경력이 있다.
이 영화는 마치 전성기 시절 홍콩 무술 영화를 보는 듯 영화적으로 보이는 무술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높다. 화끈하고, 아름답고, 발경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한번 타격을 한 후 손바닥이나 손 등으로 자세를 살짝 틀어 한번 더 타격을 하는 것 등은 무술영화 마니아라면 정말 반가워할 동작들이 많다. 게다가 영화 초반, 아버지가 에블린을 중국어로 부르는데 "샤오린!"이라고 부른다. 샤오린은 중국어로 소림(少林)이라는 뜻이다. 그녀가 가지지 못한 현실에 어딘가 무술을 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가 있다.
그녀가 미국에 가지 않고 홍콩에서 성공한 배우로 나오는 우주가 있는데 그 장면은 연출이나 편집이 왕가위 감독의 그것을 많이 따라갔다. 화양연화가 생각나는 연출들이 많이 보이며 그 우주에서 나누는 대화나 감정 또한 그러하다.
그밖에도 무수한 멀티버스의 에블린이 나오는데, 그 무수한 멀티버스의 깨알 같은 재미들이 가득하다.
불교의 공(空) 사상과 자비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꿈을 다 이루고 사는 사람은 얼마 없다. 자아실현에 도전할 생각을 할 여지가 있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현실과 타협하고, 세상에 묻혀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 거기엔 미국에서 소수자인 아시아계 이민자 가족, 또 가족 안에서 여성, 또 여성 중에서 성소수자.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눠진다. 딸인 조이(스테파니 수)는 레즈비언이다.
에블린은 딸을 사랑하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아버지와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더 잘하는 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너무 힘들다. 에블린은 아버지와도, 딸과도 사이가 소원해진다. 조이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고 타박만 하는 엄마가 못마땅하다. 그 밖에도 이 영화에는 너무나 많은 소외된 일반인들이 나오는데, 그래서 삶은 더 슬프고 더 무의미해진다. 소외되고 소외되다, 결국엔 이 모든 것들의 정점에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수많은 슬픔, 수많은 행복, 수많은 번뇌를 지나가면 그 뒤에 놓인 것은 결국 비어있음 (空)이다.
이 세상은 양자의 세계에서는 어느 날 한시적으로 만나 상을 이루는 것이므로, 양자역학적으로 세상은 공(空)과 같다. 그것을 알게 되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석가모니는 모든 것을 공(空)임을 깨달았다. 영화 안에서 무와 관련된 상징으로 숫자 0을 대표하는 어떤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그런 모양인 것은 모든 것을 0으로 되돌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세상에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가지는 자비심이다. 깨달음은 공(空)으로 되돌릴 수 있기도 하지만 가득 채울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선 이런 심오한 불교적 깨달음과 석가모니의 자비심이 어떤 마음인지 명확히, 엉덩이가 저릴 정도로 보여준다. 이 정도로 불교나 동양 철학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룬 헐리우드 영화는 거의 보지 못했다.
내 삶의 모든 실패들
나는 어째서 모든 선택들에서 실패했을까. 더 나은 선택을 놓친 것은 아닐까. 돌아가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것들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과 후회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함이다. 에블린은 모든 것이 실패한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실패함으로써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비어있기 때문이다. 에블린 자체가 바로 공(空)이다. 그 무엇도 아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절망하는 에블린에게, 다른 세계에서 온 웨이먼드는 그 실패들과 지금의 삶을 싫어하지 말라며 눈을 똑바로 보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곧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하는 말이다. 내가 겪은 수많은 선택들, 내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나를 이 영화관에 앉아 이 영화를 바로 지금 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도록 만들었다. 그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내 삶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에블린을 통해서 내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다른 멀티버스의 나와 연결되기 위해 '점프대'를 행동으로 해야 하는데, 그것이 정말 상황과 맥락에 맞지 않는 의미 없는 동작을 할 때 나타난다. 의미 없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 물론, 이렇게 진지하고 감동적인 교훈을 엉덩이가 저릴 정도로 시원하게 박아주는 게 이 영화의 묘미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 내 모든 실패를 사랑하는 법을 마지막에서야 All at Once, 한꺼번에 느꼈다. 그 많은 이야기와 유머와 사랑과 슬픔과 허무와 우주의 시작과 끝에 연결된 모든 있음과 없음, 모든 인과 연, 그 안에 비어있고 채워진 것들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인정할 때, 세상이나 나를 미워하고 두려워하지 말자.
모든 것은 바로 지금 당신의 입안에 들어간 소세지만큼이나 가득 찬 것이니까.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