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 캐롤라이나의 바클리 코브. 그곳은 습지와 늪이 많은 외딴 시골이다. 클라크 가족은 거기에서도 더 습지 안쪽에 집을 짓고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습지에서 살아왔던 아이들은 그곳이 고향처럼 편안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인간이다. 폭력적인 아버지는 엄마를 시작으로 가족들을 모두 도망치게 만든다. 제일 막내인 카야 클라크(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가 보라"고 말하며 떠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습지를 지킨다. 이 영화는 습지에서 삶의 모든 것을 배워야 했던 카야의 이야기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70 평생을 동물 생태연구에 바친 생태학자 델리아 오언스가 내놓은 첫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책은 뉴욕타임스에서 180주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아마존에서 40주간 베스트셀러 1위를 한 작품이다.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들을 쏟아내 만든 이야기의 힘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델리아 오언스는 습지를, 자연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영화 속에서도 자연의 습지에서 혼자 사는 카야의 모습은, 지저분하거나 슬프거나 두려워하기보단 아름답고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자연 속에서 혼자 사는 여자라고 해서, 지저분한 늑대소녀 같은 이미지가 아니다. 성인이 된 그녀는 평범한 마을의 여느 여성과 다를 바가 없다. 그저 사람들이 받아주지 않았을 뿐이다. 카야에게 습지는 스승이다. 비록 인간세상의 남녀관계를 다루는 법에 대해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쉽게 타인을 재단하고 차별한다. 차별하는 이유에,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남과 다른 외모, 말투, 행동, 사는 곳 등이 그것을 결정한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놀림감,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남과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은 죄다. 어느 날 시체가 습지에서 발견된다. 평생 혼자 습지에서 산 습지 소녀라는 이유로 그녀는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마을과 습지, 사랑과 증오, 선과 악, 그 사이 어딘가
사람은 살면서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법을 배운다. 자연스레 나와 같은 부류의 것이 아닌, 외부의 것들에 대해 경계하고 혐오하게 된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할 수도 있고, 타인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높이기 위해 그럴 수도 있다. 대부분 돈과 권력을 가진 쪽이 그렇지 못한 쪽을 혐오하고 경계한다. 기독교의 이분법적인 선과 악의 개념이 들어가면서 우리 편이 아닌 모든 것들은 악이 된다. 놀리고 비하하고 때려도 되는 정당성을 갖는다.
이 영화에서는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이나,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은 없다. 카야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트린 그녀의 아버지도 그렇다. 전쟁에 참전 후 돌아와 계속해서 남을 경계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 굉장히 싫지만, 가족들이 모두 도망가고 카야만 남자 쓸쓸해하는 모습에서 어딘지 모를 측은함이 느껴진다. 점핑(스털링 메이서 주니어)은 바클리 코브 마을의 잡화점 주인이다. 점핑과 그의 부인 메이블(마이클 하이얏)은 카야의 사정을 알고 측은해하고 도와주려 한다. 하지만 50~60년대 미국은 흑인 인종차별이 아주 심하던 때였다. 점핑은 백인인 그녀에게 깊게 관여하지 말자고 한다. 그들은 카야가 살아갈 수 있게 홍합을 사 주고 간단한 산수를 가르쳐주지만 글 읽는 법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카야에겐 두 남자가 있다. 테이트(테일러 존 스미스)와 체이스(해리스 디킨스). 겉으로 보기에는 한쪽은 선하고 다른 한쪽은 악한 것 같지만, 마냥 그렇진 않다. 둘은 물과 불처럼 서로에게 없는 것이 있고, 둘 다 카야에게 상처를 준다. 분명 체이스가 더 폭력적이고 나쁜 성격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테이트가 카야에게 좋은 남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카야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선과 악이 없다. 출판사와 관계자와 모인 자리에서 반딧불이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를 할 때, 다들 그 이야기를 꺼림칙한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카야는 진정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 자신이 살기 위해 하는 행동이며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른 것은 악이 아니다. 서로 다르게 산다고 해서 어째서 그것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가? 나에게 피해를 줬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음에도 우리는 나와 다른 것들을 쉽게 선악으로 재단한다.
폭력과 싸우는 용기
카야의 인생은 그 자체가 습지였지만,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야생 속에서 생존투쟁을 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카야를 보고 습지에서 산다며 혐오하거나 측은해했지만, 사실 카야에게 습지는 평화를 주는 곳 그 자체였다. 카야에게 전쟁터는 폭력적인 아버지와의 삶이었고, 그 이후에는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들 틈에 내던져지는 상황이 두려웠다. 그래서 사회복지사들을 피하고, 건설업자들에게 땅을 빼앗길까 두려워했다.
학교에선 힘의 경쟁에서 뒤처진 작고 힘없는 어린아이가 종종 폭력의 희생양이 된다. 누군가에게 학교는 10대의 즐거운 추억이겠지만, 누군가에게 학교는 매일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할 폭력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은 야생이다. 죽지 않으려면 카야처럼 죽을 각오로 싸워야 한다.
직장에서도 여러 종류의 폭력이 인생을 야생으로 만든다. 여성은 거기에 남자들과도 싸워야 한다. 장애인은 비장애인들과도 싸워야 한다. 문명 아래 우리 인생이 평화롭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미 어느 정도 어떤 의미로 누군가보다 돈과 권력, 지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삶은 끊임없는 전쟁터다. 당신이 보지 못하는 건물 뒤, 집 안, 계단, 학교, 카페, 모텔, 골목 안에서 전쟁은 벌어지고 있다.
카야는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싸운다. 이 재판은 마치 미국의 흑인 재판으로 유명한 'OJ 심슨 사건'과 닮은 점들이 있다. 카야의 유죄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편견과 혐오가 가득한 무리한 증거를 들이댄다. 또, 카야의 무죄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그 혐오와 싸우며 편견을 이겨내자고 강조한다. 카야의 모든 가족들은 자신만의 낙원을 찾아 습지에서 도망을 쳤지만, 카야는 그 모든 폭력과 편견과 혐오를 짊어지고 싸운다. 영화는 카야의 이야기와 법정 장면을 교차하며 실제 그녀의 삶이 어땠는지, 두 남자가 그녀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습지는 그녀에게 무엇인지 보여준다.
이 영화는 습지에 사는 한 외톨이 여자가 편견과 싸우는 법정 드라마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자신이 싸워왔던 저마다의 전쟁터를 떠올린다. 카야처럼 용기를 낼 수 있었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혹은 오히려 비난받으며 끝나지 않았을까? 또, 카야에게 습지가 있다면, 나에게 습지는 무엇일까. 전쟁터에서의 삶에 지쳐서, 내 곁에 습지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잔잔하고 아름답게, 그러나 어둡고 섬뜩하게, 기나긴 여운을 전해 준다.
카야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그녀는 절대로 감옥에 갈 수 없다며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 못 할 폭력과도 평생 싸워왔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행복을 찾는 법은 야생에서 배웠다. 카야는 그녀를 아끼고 도와주는 사람들 속에서 용기를 얻어 전진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영화의 분위기를 정말 잘 살린, <가재가 노래하는 곳> 주제가 테일러 스위프트의 'Carolina'를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