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를 만드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두 가지 갈래에 서게 된다. 대중, 관객을 위한 것을 만들 것이냐, 나 자신을 위한 것을 만들 것이냐. 작품성이 떨어져도 돈이 되는 것을 만들 것이냐, 돈보다는 작품성을 살릴 것이냐.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다면 좋겠지만, 사실 그런 작품을 만드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 <더 메뉴>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의 고뇌와 그것을 소비하는 다양한 계층 간의 갈등을 풍자를 담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영화가 '가식적인 미식문화'를 꼬집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미술, 소설, 영상, 음식, 심지어 성매매까지 모든 서비스 콘텐츠를 포함하는 굉장히 넓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을 볼 때 관객들이 기대하는 바가 있다. <더 메뉴>의 포스터나 홍보 문구를 보면 이 영화가 '폐쇄된 공간에서 한 명씩 죽어나가는' '모인 사람 가운데에 범인이 있는' '살인 방법의 트릭을 파헤치는' 전통적인 밀실 추리 스릴러라고 생각하기 쉽다. <9명의 번역가>역시 그런 영화인 줄 알고 봤다가 실망했다는 사람이 많듯이, 이 영화 역시 그런 영화가 아니다. 사실은 이 영화가 그런 영화처럼 보이는 시점부터,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포스터에서도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잘 드러내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영화의 내용을 알고 나서 다시 보면 소름 돋는 부분이 있다.
<더 메뉴>는 외딴 무인도에 차려진 최고급 호화 레스토랑인 호손을 배경으로 한다. 그 레스토랑에 가려면 준비된 크루즈를 타고 이동해야만 하며, 식재료는 모두 섬에서 나는 것을 쓴다. 그런 호손의 메인 셰프인 줄리언 슬로윅(레이프 파인스)은 이벤트를 준비했다. 고마운 고객들을 선정해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한다. 여기엔 아마추어 미식가인 타일러 레드포드(니콜라스 홀트)와 그의 친구인 마고(안야 테일러조이), 음식 평론가 릴리안 블룸(자넷 맥티어), 편집장인 테드(폴 아델스틴), 부자 단골인 리처드(리드 버니)와 부인 앤(주디스 라이트), 영화배우 조지 디아즈(존 레귀자모), 그의 비서 펠리시티(에이미 카레로), 이 레스토랑 투자자들인 젊은 재벌들 소렌(아르투로 카스트로), 데이브(마크 세인트 사이어), 브라이스(롭 양), 셰프 슬로윅의 어머니 린다(레베카 쿤)가 모인다. 그리고 호손에서는 기이한 일들이 펼쳐진다.
셰프 슬로윅이 준비한 음식들은 첫 메뉴부터 맛과 데코가 예술의 경지다. 섬에 있는 식재료만 써서 섬을 통째로 맛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모두들 음식을 맛있게 먹고 특히 마고를 데리고 온 타일러는 정신없이 음식을 음미한다. 그러나 180만 원에 달하는 이 코스요리가 부담스러운 마고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어딘지 군대같이 잔뜩 기합이 들어간 메인 셰프와 보조 주방장들은 신경 쓰이고, 한쪽 구석에서 술만 마시고 있는 이상한 노인도 신경 쓰인다.
수상한 메뉴들
사실은 제일 멀쩡한 것 같은 첫 메뉴부터가 뒤에 나올 이야기의 강력한 복선이다. 첫 메뉴는 '섬에서 나는 모든 식재료'로 만들었다고 한다. 과연 이 섬에 있는 '요리할 수 있는 재료'가 그것들 뿐일까? "입에 넣을 수 있지만 씹지 말라"라고 말하는 슬로윅의 농담은 그 음식과 맛보는 당신의 관계가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아니라는 암시를 던져준다.
두 번째 메뉴는 빵이다. 그러나 슬로윅은 빵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특별한 손님에게 평범한 빵은 줄 수 없다"라며 빵이 없이 소스만 내놓는다. 게다가 소스만 맛을 보라고 한다. 마치 현대미술 같은 이런 아이러니한 장면에서부터 손님들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빵을 가져오라고 하지만 절대 가져오지 않고, 그들을 제압한다. 사실 사람들은 빵을 소스에 찍어먹을 때, 그 소스를 만들 때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빵이 맛있다고만 생각한다. 슬로윅의 말에 따르면, 빵은 평범한 것이지만 소스는 평범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것들을 위해 특별한 것들이 이름도 없이 받쳐주고 있는 셈이다. 슬로윅은 그 특별한 것들을 이번에는 제대로 들여다보라고 하고 있다.
세 번째 메뉴는 추억이다. 슬로윅은 어머니의 목을 조르던 아버지를 가위로 찔렀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위가 꽂힌 스테이크가 나온다. 원래 관객들은 어떤 완성된 작품을 볼 때, 그 작품이 실제로 작가의 어떤 경험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알지 못한다. 설령 끔찍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보기 좋고 먹기 좋게 다듬어져 작품으로 완성된다. 창작의 많은 재료가 되는 작가의 추억들은 아름다운 것과 끔찍한 것들이 뒤섞여있다. 그것이 끔찍한 것인지 아닌지는 작가만 안다. 작가는 자신의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없이 날것이 보였을 때, 관객들은 과연 그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작품 이면에 감춰진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고 해 봤는지, 그저 완성된 것만 보고 즐기면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슬로윅은 요리를 통해 날카롭게 질문한다.
이렇듯 이날 호손에서 내놓는 메뉴들은 하나같이 어떤 의미가 담겨있고, 그것들은 일맥 상통한다. 이 영화는 '어떻게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미스터리 호러 스릴러가 아니라, '이 무서운 일은 왜 일어났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스릴러 드라마다. 이다음에 나올 메뉴들은 점점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마고는 여전히 다른 손님들하고 다르게 겉돌면서, 음식을 전혀 입에도 대지 않는다.
모든 서비스업의 고통
"서비스하는 사람은 서비스하는 사람을 알아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는 이것이다. 그것은 내가 여기서 피해자들의 공포에 몰입되지 않고, 슬로윅에 이입되었던 가장 큰 이유다. 슬로윅이 요리를 내놓으며 하나씩 이야기하는 콘텐츠 서비스가 가진 고뇌는 콘텐츠를 창작하고 서비스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자신의 마음에 든다고 해서 한 창작가의 인생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비평가, 콘텐츠의 내용은 모른 채 허례허식을 위해 소비하는 부자, 돈을 위해서라면 작품성이나 진정성은 제쳐두고 팔릴만한 걸 만들도록 종용하는 투자가, 돈 때문에 아무 의미도 없는 콘텐츠에 출연하며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영화배우, 그중에서 단연 불쾌감을 주는 것은 아마추어 비평가들이다. 슬로윅은 아마추어 비평가에게 최고로 잔인함을 보여준다. 나뿐이었을까? 그 상황에서 쾌감과 자책감을 동시에 느낀 사람은.
나 역시도 20년 동안 수많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면서, 이 일과 가장 가까운 평가를 내리는 직장 상사부터 클라이언트, 그리고 아무 상관없는 대중의 평가까지 모두 들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프레임 하나, 픽셀 하나까지 고민하며 만들어낸 그것에는 사람들은 관심도 없고, 그저 슥 지나가기 바쁘거나 그 안에서 별 의미 없는 내용을 찾아 욕하기도 했다. 내가 이 업을 그만두고 떠나려는 이유도, 슬로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의 반짝거림은 이젠 다 바래서 없어지고, 질적으로 높은 혹은 유명한 일을 종종 맡아서 하지만 누구도 알아주는 이도 없고 몸은 병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본 혹자는 이야기한다. 어떻게 저렇게 종교처럼, 조리사들이 모두 슬로윅에게 동화되어 있냐고. 그 영화의 흐름들이 개연성이 있냐고.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슬로윅이 진정성을 가진 훌륭한 요리사였을 수록, 자신이 되고 싶어 하고 존경하던 사람이 무너져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꿈꾸던 미래와 앞날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절벽이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은 외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하나의 작품, 코스요리를 완성해 나간다.
"예, 셰프!"
모든 비평가들, 아마추어 평론가들, 영화를 즐기는 일반 관객부터 프리미엄 좌석에서 데이트를 하는 관객들, 영화 투자자들, 영화 제작사들. 이 영화를 보았다면 이 영화에 대해 함부로 평가할 수가 있을까? 조금도 가슴속에 뜨끔함이 없을까? 이 영화는 영화 자체로써도 블랙코미디지만, 이 영화가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은 영화 외적으로 풍자와 조소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고 GV를 하는 이동진 평론가나, 토마토 지수가 만들어진 로튼토마토나, 영화 잡지들, 보고 나서 좋았다 아니다를 논하며 별점과 덧글을 다는 관객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럴 수가 있을까? 영화를 다 보았으면 포스터를 다시 보자. 'THE MENU'라는 제목 밑에 나열된 주연배우들이 무엇처럼 보이는가? 왜 예매가 아니라 예약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