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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Jan 31. 2023

<정이> SF의 탈을 쓴 아무 말 대잔치

로봇이 자신이 인간인지 아닌지를 혼동하며 정체성을 찾는 것은 SF장르소설이 탄생할 때부터 나오던 끊임없는 클리셰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휴머노이드(인간을 닮은 로봇)가 실제로 나오지 않은 상황이라 여전히 그런 상상력은 SF라고 우기면 할 말이 없지만, 너무 진부하고 진부하고 또 진부하다. 2000년도 초반까지는 그것이 주요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넘어설 때도 되지 않았나? 할리우드에선 이미 인터스텔라의 TARS, 어벤저스의 울트론, 애프터 양, 심지어 승리호의 업동이도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신파는 상관없다. 문제는 감독 자신이 이 영화의 문제가 뭔지 모른다는 데 있다. 연상호감독은 인터뷰에서, '고전 멜로와 SF의 조합이 신선할 것 같았다'라고 하지만, 고전 멜로, 가족드라마와 SF의 조합은 할리우드에서 이미 70~90년대 수없이 만들어진 이야기들이다. 이야기 구성부터 화면, 심지어 세트 디자인이나 음향까지도 너무 오래된 SF의 클리셰 덩어리다. 사실상 이 영화에서 신선할만한 것은 그 드라마를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꽤나 멋진 CG를 한국 기술로 만들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정말 큰 문제는 과학에 대해 무지한 SF설정과 시나리오다. 사실 SF장르는 하드 SF장르가 아니고서야, 과학적인 고증을 그렇게 따지지 않아도 된다.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처럼 중요한 문제들을 대충 때우고 넘어가는 경우는 많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의 주요 소재가 '인간의 두뇌를 복제한 A.I.'라는 설정이고 그것 때문에 파생된 이야기가 전부라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휴머노이드에 대한 고찰 부족

전투하는 모습을 보면, 이 시대에 이미 전투로봇들은 인간은 상대도 안될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회사 크로노이드는 왜 40년 전의 전쟁영웅 '윤정이'의 뇌를 가지고 전투로봇을 만들려고 했을까. 이 설정부터가 현대에 발전된 로봇공학이나 A.I. 기술과 맞지 않다. 사실 이 설정은 SF 명작영화 <로보캅 1987>의 설정과 매우 흡사한데, 인간의 뇌를 기계가 보조로 조작하므로 인간과 로봇을 다 뛰어넘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히어로 경찰이 탄생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요새는 알파고와 같은 A.I. 의 머신러닝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뇌는 특성화된 A.I. 를 이미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는 인간 기보로 학습했지만, 그 알파고를 이긴 알파고 제로는 처음부터 혼자 바둑을 두며 스스로 학습했다. 인간 고정관념을 저 멀리 벗어난 수를 두기 때문에 더 이상 알파고는 바둑 두는 것을 멈추었다. 마치 그것을 예언이라도 하듯, 원작 <로보캅>을 리부트 한 <로보캅 2014>에선 로보캅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기 위해 만든다. 이미 훌륭한 로봇 전투경찰들이 있지만 사람들에게 로봇경찰과 그걸 개발한 회사인 옴니코프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희석시키려고 한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감정이나 사고를 가진 채로 테스트를 하자 A.I. 에 비해 현저히 능력치가 떨어진다. 그래서 전투 때는 A.I. 가 몸을 먼저 움직이게 하고 뇌는 그저 하는 척만 하는 걸로 바꾼다. 정말 소름 돋는 A.I. 와 인간의 의식에 관한 고찰이었다. 그런데 <정이>에서는 80년대에 나온 <로보캅>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온다. 이는 '전투 로봇이 왜 인간을 닮아야 하는가'에 대한 큰 고찰이 없이 만들어졌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인간의 뇌 데이터를 복제한 것은 A.I. 가 아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알파고 이후에 A.I.라는 용어가 유행하면서, 상업적인 곳 여기저기에 너도나도 A.I. 를 가져다 붙인다. 알고 보면 그저 빅데이터 학습 알고리즘에 불과한 것들을 전부 A.I.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SF에 나오는 A.I. 관련 용어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빅데이터: 데이터를 대량으로 수집해 가치를 추출하고 분석하는 것

인공지능 A.I. : 인간의 두뇌가 학습하고 정보처리하는 방식을 인공적으로 흉내 낸 알고리즘 (알파고)

머신러닝 : 알고리즘이 빅데이터에서 패턴을 찾아내 스스로 학습하는 A.I. 의 학습 방법 중 한 분야.

인공의식 : 인공적으로 만든 알고리즘이 학습하고 계산해서 정보처리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감정과 자의식을 가짐. 혹은 인간의 자의식과 구별 못할 정도로 흉내를 냄. (공각기동대의 프로젝트 2501, 아톰, 울트론, Her)

인공두뇌 : A.I. 나 인간 두뇌의 정보와 의식을, 생물학적 두뇌를 흉내 낸 인공적으로 만든 장치에 넣은 것 (총몽, 엑스마키나)

사이보그 : 인간의 생물학적인 뇌가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채로 몸을 기계로 바꾼  인간. (공각기동대의 구사나기 소좌, 로보캅, 600만 불의 사나이, 은하철도 999 등)

안드로이드 : 인공두뇌로 움직이는 완전한 물리적인 로봇 (터미네이터, 아이로봇)

로봇 슈트, 웨어러블 로봇 : 인공두뇌나 A.I. 없이, 혹은 A.I. 가 보조적인 수단으로 인간 조종사가 탑승해 팔다리를 물리적으로 직접 움직이는 장치 (아이언맨, 아바타와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로봇 슈트, 건담(?))

원격제어로봇 : 사람이 탑승하지 않고 A.I. 도 없이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로봇 (보스턴다이나믹스, 철인 28호)


위에서 보듯, A.I.라는 것은 인간의 정보처리 방식, 인간의 '지능'을 기계적으로 흉내 내서 구현한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인간의 뇌 데이터를 복제해서 옮기는 기술은 A.I. 가 아니다. 그건 말 그대로 인간뇌의 복제기술이다. 실제로 <정이>에서는 인간의 뇌를 그대로 만들어 옮긴듯한 인공두뇌가 등장한다. 그건 인공두뇌라는 하드웨어다. 게다가 '윤정이의 뇌를 복제해 데이터를 인공두뇌에 넣어 만든 로봇'자체를 전투 A.I.라고 부른다. 이것 역시 아주 잘못된 네이밍이다. 로봇의 몸을 제어하는 기술과 데이터를 처리하는 A.I. 기술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인간도 정보를 처리하고 다루는, 의식을 가지는 대뇌와, 몸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소뇌가 있다. 대뇌보다 소뇌가 훨씬 많은 시냅스를 가지고 에너지를 쓴다. 그만큼 몸을 제어하는 기술과 알고리즘은 아주 복잡하며, 그것이 '훌륭한 전투머신'이 될 정도가 되려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조합이 완벽해야 한다. 간단히 예를 들어, 맥 컴퓨터에만 깔려있는 맥 OS를 아무 조립식 컴퓨터에 깔면 실행이 될까? 하드웨어 드라이버가 없어서 버벅거리거나 기본 드라이버만으로 돌아갈 것이다. 윤정이라는 인간의 뇌는 그 인간의 하드웨어를 다루도록 완벽히 훈련되어 있다. 그런데 그 동작 알고리즘을 가지고 로봇 몸을 그토록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인간의 몸과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로봇 몸을 만들어서, 인간 외 뇌를 바로 연결해도 될 정도의 기술이라 치자. 그럼 그 몸이 수준 높은 A.I.로 움직이는 로봇을 이길 수 있을까?


<정이>는 로봇과 뇌복제기술과 A.I. 를 완전히 혼동해서 쓰고 있다. 이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혼동해서 쓰는 것만큼 무식한 일이다. 영화 안에 일반인이 등장한다면 마케팅 용어로 그럴 수는 있지만, 그 분야 전문가가 나와서 저런 말을 계속한다는 건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실제로 과학자들이 '이건 A.I. 가 아니다'라며 기사까지 나왔다. SF를 만든다면서 이런 기초적인 설정이 시대착오적인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건 정말 끔찍하게 부끄러운 일이다.



잘못된 '정이'의 학습 방법

윤정이의 뇌를 복제해서 만든 실험체 '정이'.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인지, 영화 내내 기계 몸을 가지고 실제 총을 맞아가며 연습을 하고, 실패하면 그 뇌를 폐기해 버리고 새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 방식이 관객에게는 그로데스크 한 느낌을 전해주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굉장히 잘못된 방식임을 알 수 있다. A.I. 든 사람이든, 어떤 테스트를 할 때는 잘못된 것으로부터 배운다. 시험을 친 다음에 틀린 문제가 있으면 오답노트를 보면서 공부하지 않은가? 과학 실험도 수많은 실패로부터 성공한다.


그런데 실패한 뇌를 폐기해 버리고 새로운 뇌로 다시 똑같은 테스트를 하면, 그 뇌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더 기가 찬 것은 그다음이다. 시뮬레이션을 항상 똑같이 진행하다가, 새롭게 패턴을 바꾸자 어느 상황에서 '알 수 없는 영역'이 증가하고 강해진다. 이것은 '정이'의 뇌를 실패로부터 배우고 학습시켜 전투머신으로써 더 강화시키려는 게 아니라, '인간의 뇌가 어떨 때 기계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하는지'테스트하고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이건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다.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실패한 뇌를 버리는데 그게 무슨 학습인가?


또한 뇌가 A.I.처럼 완벽히 데이터화 되었다면, 사실 이런 돈낭비에 불과한 아날로그적 시뮬레이션을 할 필요조차 없다. 마치 인간도 고수들은 마인드 컨트롤로 상상 속에서 싸우듯, A.I. 는 소프트웨어적으로 완벽히, 짧은 시간에 수많은 테스트를 하면서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의 뇌와 비교해 A.I. 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다. 알파고가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성장한 것을 보라. 그런데 이걸 A.I.로 어렵게 만들어놓고, 비싼 기계 몸과 인공두뇌를 써가면서 반 물리적으로 훈련을 하고 있다니. 정말 80년 대적인 상상력이다. 이건 학습이 아니라, 그저 감독이 상상한 그 테스트 화면을 구현하기 위해 끼워 맞춘 이야기였을 뿐이다. 영화에서는 뇌지도를 그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하는데, 이미 인공두뇌에 완벽하게 데이터를 옮겨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자의식까지 '윤정이'라고 가지고있다. 인공두뇌를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기술이 있는데 그보다 낮은 기술인 뇌지도이해가 왜 필요한가. 비행기를 만드는 시대에 어떻게 하늘을 나는지 몰라서 글라이더 실험을 하는 꼴이다.




완전히 뒤엉킨 기술발전의 시간

윤정이 영웅은 40년 전에 죽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전사였다 한들, 구시대의 전사인 셈이다. 현대의 군인들만 보더라도, 80년대 전쟁영웅이 2020년대에 똑같이 활약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지금도 40년이면 엄청난 기술의 발전이 일어나는데 하물며 인간의 뇌가 완벽히 복제되어 사는 시대라면. 차라리 <로보캅 2014>처럼 '정이'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그녀로 인해 전쟁이 종식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로봇으로 만든다면 이해가 된다. 40년이 지났으면 군대의 무기도 완전히 새 기술이 도입되고 도입되고 또 도입되어, 전투기술과 작전도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대체 40년 전 인간의 뇌에 담긴 기술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지.


게다가 윤정이의 뇌는 거의 죽자마자 데이터화 되었다. 군인이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러나 그동안 그녀의 뇌가 계속해서 40년 동안 발전된 전투로봇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설정이 아니라, 오로지 40년 전에 죽은 군인의 뇌로, 인간의 얼굴을 한 안드로이드를 생산해 전쟁에 투입한다는 설정은 너무 납득하기 어렵다.


그리고 영화에는 꽤 오래전부터 안드로이드가 만들어진 것으로 나오는데, 안드로이드의 기술발전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는 모든 것에서 40년 전과 40년 후의 모습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 너무 설득력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전쟁 중이면 인간의 자본력이 군사기술로 집중되어서, 엄청난 군사과학기술이 발전하게 된다. 세계 1,2차 대전 때 인류의 과학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만 봐도 알 수 있다. 1914년 1차 대전 시작점에 전투기는 프로펠러 엔진으로 움직이는 복엽기였지만, 2차 대전이 끝난 40년쯤 뒤인 1954년에는 제트엔진을 단 2세대 전투기, F-100 초음속 제트기가 등장한다. 물론 산업기술발달 초창기와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의 발전 속도는 다르겠지만, 어쨌든 시간에 따른 과학기술의 발전을 완전히 무시한 설정이다.





영화적으로 완성도 높은 CG와 화면, 배우들의 열연으로 인해 사실 보는 내내 시간은 꽤 지루하지 않게 나름 준수한 팝콘무비로 즐길 수는 있다. 캐릭터 간의 이야기가 신파적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사실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꽤나 나왔던 것들이라 그렇구나 하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위에 정리한 이야기들은 SF로써 굉장히 치명적이다. 감독이 대충 이러한 설정에 이러한 화면을 먼저 구상하고 시나리오를 쓴 느낌이다. 그런데 그 주변에서 아무도 과학적인 자문을 해줄 시나리오 작가가 없었던 모양이다.


연상호 감독의 SF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신파가 아니다. SF와 과학에 대한 지식, 영화적 감성이 30년 전에 멈춰 있으면서, 요새 화면을 덧씌우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보면 재미가 없지는 않다.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으니 그렇지.



*키노라이츠 리뷰에도 올렸습니다

https://m.kinolights.com/review/216135



*댓글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댓글을 보니, 글을 제대로 읽지않고 비난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글의 요점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셔서 일일이 대댓글을 달지는 않겠습니다. <아바타> 같은경우에도 '강간을 하고 공존이라고 하는 격이다' 라면서 신랄하게 비판을 했고 <와칸다 포에버>는 정말 제대로 각잡고 '미국식 흑인 민족주의 영화다' 라며 비판했는데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았는데 좀 당황스럽네요. 위에 언급한 A.I. 와 로봇의 관계는 '과학교과서'다워야 함을 말하는게 아니라, SF로 허용되는 영화적 상상력이 아닌 부분에서 너무나 기초적인 상식을 지키지 않은거라 쓴 이야기입니다. NASA의 연구원이 칠판에 구구단을 적으며 연구하는 모양이랑 비슷한겁니다. 세계 1위를 하니, 더더욱 부끄러운 부분이고요. 저도 재미있게 봤고,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는 '한국적 신파'는 오히려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만... 더 좋은 SF가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공감해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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