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수, 조회수, 좋아요 수. 인기의 척도이기도 하지만, 이제 그것은 높은 수준의 가치를 뜻하기도 한다. 내가 만들어 낸 게시물이 조회수가 낮고 좋아요도 많지 않으면 나는 가치가 없는 것을 만든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즐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인터넷 커뮤니티, 블로그, SNS에서마저 우리는 숫자로 경쟁한다. 팔로워의 숫자가 그 사람의 가치를 나타낸다. 가치는 곧 돈이 된다. 그래서 소통의 창구에서 피가 튀기게 경쟁하고 있다.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는 작은 가족, 동네에서는 사람의 가치를 더 잘 안다. 누구네 강아지가 몇 마리를 낳고 몇 마리는 죽었는지, 누구네 아이가 집에 아직 안 들어온 것을 바로 안다든지. 그런 곳에서 사람은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이 모여들어 도시가 되고, 산업화 사회가 되면서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어딘가의 도표에 붙은 '1'이 바로 나다. 지하철에 탑승한 1, 등교하지 않은 1, 글에 좋아요를 누른 1, 적립금을 받아가는 1, 실적이 떨어진 도표의 1, 취업을 못한 1, 카톡에서 읽히지 않은 1. 우리는 그 많은 숫자들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정주리 감독의 <다음 소희>는 그런 섬뜩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다음 소희>는 2017년, LG유플러스 전주 고객센터 하청인 외주업체 LB휴넷으로 현장실습 나갔던 고등학생 홍수현 양이 저수지에 몸을 던져 자살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영화 촬영도 전주에서 이루어졌다. 영화 전체에 짙게 깔린 채 조여 오는 압박감은 비단 그것이 우울하고 안타까운 사건을 다루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그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겪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콜센터는 고객을 실적 숫자로 바라보고, 전화를 하는 고객에게 상담사는 114 숫자일뿐이다. 그곳은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숫자로 보고 싸우는 감정노동의 최전선이다. 소희(김시은)는 대기업으로 현장실습 나가게 된다며 좋아하지만, 이내 일을 겪어보면서 점점 힘들어진다. 밝고 평범한 아이가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하기까지의 감정이 쌓이는 과정이 영화 내내 관객에게도 똑같이 쌓인다. 과장된 에피소드도 없고, 슬픈 음악을 깔지도 않고, 격정적인 연기 하나 없이 그저 평범한 일상들의 연속인데. 그런데, 너무나 아프다. 형사 유진(배두나)은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그런 일을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되어 있음을 느낀다. 유진은 소희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을 숫자로 가리면 편해진다.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효율적이지만, 악의 평범성이 드러나기 쉽다. 실적 그래프 앞에서, 취업률 앞에서, 성적 앞에서, 월급 앞에서, 숫자 1을 더하기 위해 숫자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잠시 잊어버린다. 어느 날 소희는 알았던 것이다. 그 숫자 뒤에 흐느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현대 사회에서 숫자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대통령도 숫자로 뽑고, 업적도 숫자로 정리하는 시대니까. 우리가 현대문명을 누리고 편하게 따뜻한 곳에서 배 긁으며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은 서비스라는 이름의 노비들이 숫자 뒤에서 피를 갈아가며 일을 하기 때문이다. 또 그 일을 하는 사람도 누군가의 피를 숫자라는 편리함으로 가린 채 마신다.
숫자는 우리의 가치가 아니다.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는 소희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나를 드러낼 무언가를 갖고 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그런 가치는 숫자로 이야기할 수 없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나를 숫자로 보고 있어도, 내 안에서 빛나는 것 하나를 갖고 있다면 나를 숫자로 보는 이에게 웃으며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