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시모프 Feb 07. 2023

<3000년의 기다림> 여성이 정말로 갈망하는 것

인간이 자신을 작고 외로운 동물로 생각하지 않고, 큰 존재로 여기는 이유는 이야기가 있어서다. 이야기는 과거의 인간과 미래의 인간을 현재에 공존하도록 해 주고, 멀리 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사람, 존재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는 것들을 하나로 엮어준다. 그저 몇 가지 감정과 자기표현을 하는 언어가 아니라, 이야기를 짓고,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아름답고 성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은 이야기, 즉 스토리텔링에 대한 영화이며, 그 안에서 3000년 동안 여성이 가장 갈망하던 것은 무엇인지 따라가는 이야기다. 일단 제목 번역을 잘못했다. 원제는 <3000 years of longing>으로, longing을 '기다림'으로 번역해 버려서 마치 지니가 3000년 동안 병 속에서 기다린 사랑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오해하기 쉽다. 하지만 longing은 '갈망'이라는 뜻이며 지니가 병 속에 갇히게 된 이유, 소원, 여성들과의 만남 모두가 갈망과 관련이 있다. 지니가 주체가 아니라, 여성들이 주체인 이야기다. 같은 여성 서사의 이야기지만 같은 감독의 전작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와는 정 반대의 영화다. <매드맥스>와 같은 '신나고 통쾌함'을 기대한다면 많이 실망할 수도 있다. 감독인 조지 밀러 조차도 이 영화를 '안티 매드맥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이야기

문자가 없던 시절부터 인간들은 선대의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고 외워서, 후대에 전하고 전하고 전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많아지고 날이 갈수록 늘어, 그것을 한 번에 외울 수가 없었기에 이야기를 외우기 쉽도록 음률을 붙여 노래 형태로 만들어 외우고 불렀다. 초기 석가모니의 이야기도 그렇게 노래로 전해졌기에 반복되는 구절이 많다. 세네갈에는 '그리오'라고 부르는 역사가이자 음유시인 계급이 존재한다. 역사를 노래로 외워 부르는 사람들이다.  또, 이야기라는 것은 단순하고 건조하게 행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양한 감정과 긴장을 넣어 서사를 만든다. 재미가 있어야 듣는 사람도 지루하지 않고 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감정 없는 교과서는 몇 줄 외우기 쉽지 않지만, 우리가 재미있게 본 영화의 대사는 줄줄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이야기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천일야화다. 셰에라자드가 죽지 않기 위해 1001일 동안 매일 밤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서 왕에게 들려주었다는 이야기.


<3000년의 기다림>은 누군가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진실이라고 말하면서. 영화의 주인공인 알리테아(틸다 스윈튼)의 목소리 같다. 그녀는 서사학 교수다. 옛날이야기부터 최근 코믹스나 영화의 히어로물까지, 다양한 서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연구 발표를 위해 '셰에라자드' 항공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로 향한다. 또한 그녀가 머물게 되는 페라 팰리스 호텔방은 유명한 추리 소설가인 '애거사 크리스티'가 머물며 그 유명한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집필한 곳이라고 한다. 실제 애거사 크리스티의 방은 411호지만 거기는 기념관으로 쓰고 있어서 방 번호를 333호로 하고 비공식적으로 직원이 귀띔해주는 형식으로 언급한다. 셰에라자드와 애거사 크리스티 둘 다 여성 이야기꾼으로써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 이야기꾼들의 기운을 받아 세 번의 세 가지 소원을 암시하는 333호로 들어가는 서사학자 알리테아.


이스탄불의 한 골동품 점에서 가져온 싸구려 병을 전동칫솔로 닦자 그것이 열리며 요정 지니(이드리스 엘바)가 등장한다.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세 가지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지니의 전설 그대로인데, 우리가 흔히 아는 한 가지가 다르다. '사랑은 하게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사실 그 조건은 디즈니가 알라딘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교훈'을 주려고 바꾼 설정이다. 원작에도 램프의 요정에게 그런 조건은 없다. 그리고 애초에 원작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그냥 왕에게 선물을 주고 결혼하는 내용이긴 하다. 결혼을 사랑으로 한다는 것부터가 현대에 생긴 개념이니깐. 어쨌든 이 영화의 지니는 무엇이든 들어줄 수가 있다. 다만, 디즈니나 일반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무엇이든 이야기하면 소원이 되어버리는' 악마의 소원이 아니다. 정말로 갈망해야만 소원이 된다. 단, 이 소원에는 세 가지 제약이 있다.


1. 영원히 계속되는 소원을 빌 수 없다.

2. 인간을 불멸로 만들 수 없다.

3. 죄나 고통을 없앨 수 없다.


'영원히 계속되는 소원'에 사랑이 없다는 것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쯤 되면 지니는 정말 사기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좋은 조건이 아닌가. 서사학자로서 '세 가지 소원'에 대한 교훈과 배드엔딩을 모두 알고 있는 알리테아는 그 모든 걸 의심한다. 지니는 자신의 선함을 믿어달라며 자신이 만나 소원을 들어주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조지 밀러가 만든 영화라는 이야기 안에서, 알리테아는 주인공으로써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고 그 안에서 지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전해지고 전해진 우리가 알던 이야기들은 진실이 아니라고 하면서.




지니에게 내려진 저주

지니는 '시바의 여왕'을 사랑했다. 실제로 솔로몬과 시바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데, 둘 사이에서 난 자식이 에티오피아의 왕조를 만들었다고 하는 설이 있어 예전에 <막달라 마리아-역사 속의 여성이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한 '흑인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뿌리로 삼고 있는 이야기다. 성경에는 시바의 여왕이 조공을 바치러 솔로몬을 찾는 이야기지만, 지니는 그것은 남성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며 솔로몬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 말은 '성경' 그리고 모든 역사서가 남성들이 썼기 때문에 남성 위주 서사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저격한 셈이다. 솔로몬이라고 하면 성경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유명한데, 왜 이상한 마법을 쓰고 정령들을 다루는지 의아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성경이 아닌 다른 문헌에 의하면, 솔로몬은 하느님께 세상 모든 동물과 정령들까지 다스리는 힘을 얻었다고 한다. 지니의 이야기는 그 모습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지니는 시바의 여왕을 사랑했고, 온몸으로 그녀를 기쁘게 했다. 하지만 시바의 여왕이 그 지혜롭다는 솔로몬에게 한 질문은 이것이다. "여자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솔로몬은 온갖 정령들을 이용한 노래로 화답한다. 이후의 이야기에도 나오지만, 지니의 사랑과 섹스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시바에게 느끼게 해 주었다. 시바는 단번에 지니를 잊어버렸다. 하지만 솔로몬은 지니를 알고 있었다. 솔로몬은 정령들을 부릴 줄 안다. 지니 역시 그의 아래에 있던 것이다. 지니를 병 속에 가두고 바닷속에 빠트린다. 이제 지니는 병을 연 사람의 세 가지 소원을 다 들어주어야 마법에서 풀려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섹스만 잘하고 시중만 잘 들어주면 여성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지니에게 '여성의 진정한 갈망'에 대해 깨달음을 주기 위한 솔로몬의 저주다. 병을 열어 지니를 꺼낸 사람들이 다 여성이라는 것, 진정한 갈망이 소원이 된다는 점이 그렇다. 이제 지니는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의 갈망을 들어주며, 여성들이 갈망이 달라져가는 역사를 보게 된다. 그야말로 3000년 동안의 갈망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통해, 알리테아는 자신이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대별로 달라지는 여성의 갈망

첫 번째 여성 굴텐(에제 윅셀)이 갈망하는 것은 권력자 아들의 아이를 임신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플라토닉한 사랑이나 섹스보다 중요한 것은 임신이었다. 천한 지위에서 권력상승을 할 수 있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옛날 여성들이 정말 바라는 것은 그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여성 슈가 럼프(애나 애덤스)는 왕자의 비만 페티시를 채워줄 무리들 중 한 명으로 이용되는 여자였다. 그녀는 지니를 발견하자 화가 나서 원하는 게 없으니 병으로 들어가라라고 말하지만, 사실 거기에는 자신이 모든 것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남자들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는 갈망이 숨겨져 있다. 왕자의 바로 옆에 있으니 당시 여성으로서는 꽤 지위가 높았겠지만, 그저 권력다툼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아름답지도 않은 자신이 그렇게 사는 것은 사람으로 사는 게 아니라 성적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니까.


세 번째 여성 제피르(부르주 괼게다르)는 늙은 터키 상인의 아내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급의 아주 명석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의 갈망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아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여성은 글을 읽거나 공부하는 것이 금기시 되어있었다. 여성은 머리가 좋지 않아서, 글을 읽거나 공부하면 미쳐버린다고 생각했다. 한 순간으로 이루어지는 소원이 아니었기에 지니와 계속해서 지내는 동안, 지니와 제피르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지니는 시바의 여왕을 만족시켰었던 그 기술들로, 제피르와 사랑하고 섹스했으나 항상 같이 있는 둘은 결국 서로 싸우게 되고, 자신들만의 시간을 위해 지니가 병 속에 들어가게 되지만 그 순간 제피르는 지니를 잊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시대마다 여성들이 갈망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진정한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보통 미디어에서는 여성이 '진정한 사랑'따위를 원한다고 떠든다. 하지만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여성'안에 억압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함을 절실히 알고 있었다. 그게 된다면 나머지는 스스로 하면 된다. 그러기에 아무도 세 가지를 다 온전히 말할 수 없었고, 지니는 매번 다시 갇혀야 했다.




알리테아의 갈망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지니가 알리테아에게 호텔 침대에 앉아서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화면을 상상하는 주체는 알리테아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다가, 점점 가면서 이야기에 몰입하고 자신을 이야기 속 여성에 대입시킨다. 마지막에 등장한 제피르의 사소한 습관들이 알리테아랑 닮은 것은 그런 이유다.


알리테아는 결혼도 했었고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들을 다 보내고 난 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이야기를 연구하는 것에 빠져 지낸 듯하다. 그 나이의 여성이 교수로서 그만큼 성공하려면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알리테아는 결혼, 사랑, 자식, 그런 것들의 허망함도 알고, 자신의 분야에서 이룰 건 다 이루었으며 삶을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옛날 여성들과 달리 그다지 갈망하는 것도 없다.


하지만 지니는 탁월한 스토리텔러였다. 정령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서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건너온 이 정령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좋아해서 자신이 쓴 이야기만으로도 환상의 친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알리테아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원래부터 지니가 자신을 PR 하려고 한 이야기들이다. 자신이 얼마나 슬픈 운명인지, 자신이 얼마나 여성들을 도와주려 했었는지, 또 자신이 얼마나 멋진 사랑과 엄청난 섹스를 할 줄 아는지! 그제야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깨달은 알리테아는 그 목마름에 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혹 알리테아가 지니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너무 갑작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건 알리테아가 자신을 숨기는 내향적인 사람이라서다. 알리테아가 지니의 이야기와 지니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너무 이야기 안에 숨겨놓은 연출을 한 감독 탓도 조금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알리테아와 비슷한 성향 - 데미섹슈얼, INTP, INTJ 계열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 흐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엄청나게 멋진 이야기를 해주는,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다 충족시킬 사람이 인간을 넘어선 엄청난 섹스를 할 줄 안다니.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 섹스하고 싶어지지 않으면 이상한 것 아닌가.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하다. 여타 다른 로맨스물에서 나오듯이, 사랑과 섹스를 분리하지 않는다. 사랑이 곧 섹스고, 섹스가 곧 사랑이다. 그래서 지니는 다시 한번 묻는다. 그 사랑에 육체적인 것이 포함되는 것이냐고. 알리테아는 격하게 끄덕인다. 그래, 그거라니깐.




여성이 정말 원하는 것

알리테아는 만족할만한 사랑과 섹스를 얻어서 이전 여성들처럼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자기파로 이루어진 지니는 런던의 수많은 전자기파들에 노출되어 점점 죽어간다. 죽어가는 사랑 앞에서, 알리테아는 자신의 소원 두 가지를 모두 지니를 위해서 쓴다. 이제 그녀가 바라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고 온전히 그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시바의 여왕이 말한 '여성이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옛날의 지니는 종처럼 여성이 원하는 모든 육체적 물질적인 것은 다 해주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지니는 그저 노리개일 뿐이었다. 다양한 여성들을 만나며 갈망을 들어왔다. 신분 상승, 처벌, 지적인 욕구 충족, 마지막으로 몸과 마음을 다한 사랑. 하지만 그 모든 것들 역시 다 자신의 일시적인 욕구 충족이었다. 마지막으로 알리테아는 그 갈망을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위하는 데에 썼다.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 남자와 여자, 주인과 하인, 소원을 말하는 자와 들어주는 자가 아니라 서로가 대등한 관계에서 온전히 자신으로 인정과 이해를 주고받는 관계. 그건 사랑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었고 알리테아가 원하는 것이었으며, 지니 역시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소원을 들어준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유를 얻었다.


지니는 3000년이 지나서야, 시바의 여왕이 왜 자신을 잊어버렸는지 알게 되었다. 지니는 시바의 여왕을 대등한 관계로 여겨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섬기기만 했다. 소원은 모두 끝나고 자유가 되었지만, 자신에게 그런 깨달음을 준 알리테아를 소원을 넘어서 어찌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의 것을 지켜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잡으며, 알리테아는 인간의 삶을, 지니는 정령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통해 듣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해 주는 이야기꾼인 조지 밀러를, 또한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https://m.kinolights.com/review/219941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팝페라 음악 보컬이 <Time to say goodbye>를 부른 안드레아 보첼리와 음색이 비슷해서, 처음에는 안드레아 보첼리가 참여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의 아들인 마테오 보첼리가 참여했다. 심지어 마테오 보첼리는 배우로도 참여했는데, 첫 번째 소원에 등장하는 무스타파가 바로 그다.


*이 영화의 원작은 소설 <나이팅게일 눈 속의 지니>인데, 원래 같이 시나리오 만들려던 작가가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조지 밀러는 자신의 딸과 같이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2


이전 09화 <바빌론> 그곳에는 별이 가득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