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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Feb 15. 2023

<바빌론> 그곳에는 별이 가득하다

니체는 그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대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지만, 아직 그대들 내면에는 많은 것들이 여전히 벌레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고, 지금도 인간은 어떤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다"라고 말한다. 니체는 인간을 세 단계로 나눈다. 낙타, 사자, 어린이. 낙타는 따라가기만 하는 존재, 사자는 반항하는 존재, 어린이는 극복하고 긍정하며 놀 줄 아는 인간이다. 이 인간이 모든 것을 극복한 인간, 초인이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모노리스라고 하는 신비한 직육면체로 인해, 인간이 진화의 단계를 거듭해 결국 어린이와 같은 초인, '스타차일드'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영화사에 빛나는 그 오프닝 음악으로 니체의 책을 제목으로 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OST로 넣은 것이다.


데미언 샤젤 감독의 <바빌론>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변하는 헐리우드의 역동기를 담고 있다. 내용도 그렇지만, 영화 자체가 <사랑은 비를 타고(1952)>에 대한 오마주를 가득 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영화의 진화'를 담고 있고 거기에 영화의 미래까지 보여주는, 영화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다시 말해 <1952: 시네마 오디세이>라고 생각한다.




1막, 광란의 원시적 인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은 드넓은 광야에서 유인원들이 자연 상태로 사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문명도 도구도 없다. 짐승처럼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거기에 검은 직육면체, 모노리스가 나타난다. 그 근처에 있던 유인원 중 누군가, 뼈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도구의 발견이다.


<바빌론>도 광야에서 시작한다. 거기에서 파티를 위해 코끼리를 끌고 가는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 무성영화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로 손꼽히는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는 광란의 파티를 자주 연다. 이 시대는 미디어가 많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라, 배우들의 사생활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마약과 난교가 난무하는 광란의 파티를 열거나 참석해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여기에 보이는 인간은 원시상태의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여기에서 배우가 되고 싶은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와, 영화판에서 일하고 싶은 멕시코 출신의 매니 토레스가 만나게 된다. 넬리 라로이는 이 파티에서 특유의 매력으로 시선강탈을 하며, 영화 제작자의 눈에 발견된다. 매니도 우연하게 잭 콘래드의 눈에 들어 운전수를 맡는다. 광란의 원시상태에서 앞으로 크게 성장할 빛나는 사람들이 발견된 것이다.




2막, 발전단계의 완벽한 재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뼈도구를 발견한 유인원은 하늘로 집어던지며 도구가 갑자기 우주선으로 전환된다. 인류는 달에 기지를 세울 정도로 진화해 있다. 달에서 모노리스가 발견되고, 그것을 보러 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스탠리 큐브릭은,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우주선 내부를 재현했다. 영화 촬영 당시 아직 인류가 달에 가기도 전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 재현정도는 놀라울 정도다. 당시엔 어색한 CG처리를 하지 않고, 카메라를 이용한 특수촬영으로 해결했다. 인류가 첫 번째 진화에서 이룩한 단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바빌론>에서 넬리와 매니가 도착한 영화 촬영현장, 그곳은 혼돈의 카오스다. 당시의 영화 촬영은 필름으로 찍었고, 소리가 없었으므로 촬영 현장은 감독과 배우들의 말로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전기 조명이 발달되지 않아서 순전히 태양에 의지해서 여러 편을 찍었기 때문에 날씨와 시간이 중요했다. 사람도 많이 다치거나 죽고, 시간에 쫓겨 완성했다. 그 혼돈의 촬영현장을 <바빌론>은 완벽하게 재현해 낸다. 넬리와 매니라는 반짝이는 영화의 두 도구는 여기에서 피어나기 시작한다.


이것들은 고증에 의한 완벽한 재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며, 감독이 그 시대에 대한 로망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한 로망, <바빌론>은 과거 무성영화시대에 대한 로망이다. 그 완벽한 시대상의 재현은 유인원과 초인의 중간단계를 살고 있는 우리 현재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지나고 보면 -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막, 진화를 가로막는 인간 안의 원숭이

초인이 되기 위한 과정에 크나큰 역경이 존재한다. 바로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동물적인 본성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는 그 본성 중 폭력을 보여주고, <바빌론>에서는 쾌락을 보여준다. 유인원 때부터 남아있는 그 본성은 인간이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에 발목을 잡는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는 달에서 모노리스가 발견된 불과 2년 뒤, 목성까지 가는 기술의 진보가 이뤄진다. 모노리스로 인해 또 한 단계 진화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안에 있는 폭력성은 모노리스의 존재 자체를 숨기고, 국가 간의 세력다툼을 견제하기 위해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임무를 숨기게 된다. 목성 근처에 새로운 모노리스가 발견되어서 그것을 찾아가는 임무지만, 승무원에겐 그 사실을 숨긴 채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완벽한 인공지능 HAL9000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순된 임무를 갈등하다 결국 승무원은 전부 죽이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HAL9000이 인간을 목성에 가지 못하게 막게 된 것은 인간들이 아직 가지고 있는 폭력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바빌론>에서 무성영화는 유성영화로 탈바꿈한다. 단지 소리가 들어간 것뿐인데, 촬영 기술이나 영화 연출등이 완전히 새롭게 바뀐다. 영화뿐 아니라 미디어들도 발전하면서, 배우나 영화 제작사들의 사생활이 까발려지기 시작했다. 영화의 연출, 배우의 연기, 목소리, 이전과는 달라진 것들 때문에 이전 시대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스타들은 사라져 간다. 적응해서 살 수 있었지만, 넬리는 자기 안에 있는 전시대의 욕망 - 쾌락을 잊지 못하고 드러내며 스스로를 망가트려간다. 그리고 그것은 기어코 매니까지 망가트리게 된다.


그 쾌락의 끝을 보여주는 것은 LA에서 악명 높은 갱 제임스 맥케이(토비 맥과이어)를 만나면서 절정을 달한다. 인간이 쾌락을 위해서 미디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그 끝이 어디로 갈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가 양지의 미디어라면 맥케이의 동굴은 음지의 미디어다. 그 모습은 현재에도 드러나고 있다. 1인 미디어 시대, 슈퍼챗을 받기 위해서 어떤 행동이든 하고 토할 때까지 먹고 무슨 나쁜 짓이든 하려는 사람들. 방송영상매체의 발전은 그런 관객의 쾌락을 더욱 분명하게 반영한다. 영화 그 자체를 가로막는 것들은 배우나 제작자, 관객들 모두의 속 깊이 감춰져 있는 동물적 쾌락의 속성이다.




4막, 영화와 모노리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매니는 결국 발전된 미래의 영화관에 도착한다. 1952년 개봉한 <사랑은 비를 타고>는 그 당시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의 끝이었다. 광란과 혼돈의 영화산업에서 떨어져 나온 매니는 <사랑은 비를 타고> 상영관에 들어가 영화를 본다.


그 영화에는 자신들이 직접 겪었던 일들이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영화의 소재로 쓰인 부분이 있다. 영화의 다른 부분 또한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겪었던 일들이겠지. 사람들의 실제 인생이 얼마나 추하고 더럽고 슬프고 무서워도, 그것이 영화 속으로 들어오면서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 매니는 영화를 보며 자신의 추억이 뒤섞이며 행복과 사랑과 슬픔이 밀려온다. 그리고, <바빌론>은 매니가 보고 있는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 그 자체에 몰입되고 빨려 들어가, 그것이 앞으로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준다. 필름 현상액, 빛, 기름, 깜빡임,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삼원색의 픽셀로 이어진다. 쥬라기 공원과 아바타로 이어지는 거대한 환상의 발전이 펼쳐진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HAL9000과의 싸움에서 이긴 데이브 보우먼(케어 둘리)은 목성에 도착해서 모노리스를 발견한다. 모노리스는 겉으로는 직육면체의 거대한 물체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웜홀과 같은 스타게이트였다. 그리고 영화사상 가장 실험적인 사이키델릭 한 영상연출이 시작된다. 보우먼은 모노리스로 빨려 들어가면서 외친다. (소설에는 나오지만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모노리스는 속이 텅 비어있고, 끝이 없다. 그리고 세상에, 이곳은 별이 가득하다!"


<바빌론>에서 보여주는 영화도 그런 것이다. 영화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네모난 스크린 안에,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 관객들은 그것을 보며 각자 자기만의 세계를 그린다. 영화의 미래를 스쳐 지나가며 본 매니도, 아마도 그렇게 외쳤을 것이다.


"영화는 속이 텅 비어있고, 끝이 없다. 그리고 세상에, 이곳은 별(Star)이 가득하다!"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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