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지대넓얕> 팟캐스트를 오랜만에 들어가 보았다. <지대넓얕>이란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준말로, 채사장을 메인으로 하여 깡쌤, 이독실, 김도인 4명이 모여 다양한 인문학적 주제로 토론을 하는 팟캐스트였다. 2014년 시작할 때쯤부터 듣기 시작했었는데, 2017년에 방송이 마무리될 때까지 나의 지적인 욕구를 채워준 아주 재미있는 방송이었다. 사실 지식의 깊이가 깊다기보다, 완전히 성향이 다른 4명이 서로를 디스하면서 토론하는 방송내용 자체가 재미있었다.
그런데 <지대넓얕> 채널에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바로 1월 10일부로 채널을 종료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것이 무척 충격적이었다. 2017년에 방송이 마무리되고 나서 5년 동안 한 번도 방송이 업데이트된 적이 없음에도 <지대넓얕>은 꾸준히 팟캐스트 교양 부분 1~5위를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인기방송이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들어갔을 때 3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송이 끝나고, 그 4명은 다들 각자의 길로 들어섰다. 시작할 때는 다들 학원강사였던 걸로 보이는데, 채사장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깡쌤은 입시왕 팟캐스트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이독실은 여기저기 방송에 대중과학 운동가로써 나오고, 김도인은 명상센터를 차려 인기리에 영업 중이다. 이제 <지대넓얕>을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채사장은 <지대넓얕 0>를 내며 아직 지대넓얕의 그늘에 그려있었는데, 이제 채널을 완전 삭제함으로써 완벽히 졸업을 했다는 느낌이 든다.
졸업은 무언가를 마쳤다는 상징이다. 일정기간 학업을 온전하게 마치면 졸업장을 준다. 학교에 다니면, 내가 하나의 단계를 끝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증표가 생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를 먹는 것과 대부분 일치하기에,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하나를 마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에 익숙해진다.
하지만 삶은 어떠한가. 삶에서 무언가를 제대로 행복하게 마치는 일은 별로 없다. <지대넓얕> 정도는 굉장히 완벽하고 축복 넘치는 졸업에 속한다. 주로 시작은 엄청난 축복과 파티를 곁들여 시끌벅적하게 한다. 마치 마무리가 없이 영원할 것처럼. 그러나 우리가 인정하지 않아도 모든 것에는 느닷없이 마지막이 찾아온다. 잘 되던 사업을 온전하게 마무리하고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망해서 다른 일을 시작한다. 결혼도 이혼이나 사별로 끝나는 일이 대부분이다. 애정하는 아이돌도 인기가 시들해지거나 사건사고로 해체하고 은퇴한다. 하다못해, 내가 신이 나서 구입한 스마트폰조차도 결국엔 느려지고 배터리가 광탈되어 구시렁거리며 새것으로 갈아탄다. 여전히 시간이 흐르면 삶은 변하지만, 변하는 것의 끝에 축복을 하는 일은 드물다.
꿈이나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저 지금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된다. 경력이 20년이나 된, 말만 대충 들어도 척하고 결과물을 내놓을 정도로 익숙한 지금의 일. 남들이 일주일 걸릴 일을 하룻밤 밤새면 다 하는 일. 하지만 나는 그 일에서 졸업을 하려 한다. 하나를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던 나는 미대에 진학하고 디자이너가 되면서 그 가득했던 창작의 열정을 잊어버린 채 마감에 치여 살고 있다. 때론 남들이 놀랄 정도의 작업을 할 때면 뿌듯하기도 하고, 유명인들과 작업을 할 때면 괜히 우쭐해지기도 했지만 난 여전히 창작의 곁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면서 '작가'들이나 클라이언트에게, '창작가적인 면모'를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너무나 괴로웠다.
그림이야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으니 괜찮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무시받는 것은 참기가 힘들다. 게다가 별것도 아닌 내용 위에 내가 디자인을 입힐 때면 너무나 자괴감이 든다. 하지만 누가 알아주랴. 글 관련 전공을 한 것도 아니고, 글로 어디서 상을 타본 적도 없고, 글이 어디에 책으로 나와본 적도 없는데. 그래서 브런치를 시작했다. 브런치는 내가 지금의 일에서 졸업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림이나 만화가 아닌, 글만으로 나의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괜히 어려운 길로 가는 것일까? 그래도 난 하고 싶은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비록 시간이 걸렸을지언정 해내지 못한 일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망해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졸업이 아니라 잘 마무리하고 넘어가는 아름다운 졸업. 그것을 하기 위해 오늘도 브런치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