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보이지 않던 1900년대 초 세계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산업화가 충돌하던 시대였다. 모든 세상에 전쟁의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을사년, 한반도에도 어둠이 드리워졌다. 조선인은 나라를 잃었다. 그리고 그 짙은 어둠의 시대, 간도의 조선인 마을에서 두 명의 별이 태어난다. 윤동주와 송몽규. 영화 <동주>는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회색빛으로 물든 흑백 화면으로 들려준다.
윤동주의 고종 사촌인 송몽규는, 어릴 적부터 글 쓰는 재능과 의로운 기질이 충만해 동주의 앞에서 한발 더 나가는 인물이었다. 조금은 내성적이고 조금은 주변을 생각하는 윤동주는 그런 그를 좋아하지만, 때론 조금은 시기한다. 윤동주는 섬세하다. 문학을 하고 시를 쓰고 싶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도 많지 않고 적극적으로 문학을 하기엔 조선인이라는 게 걸림돌이다. 윤동주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 지 시로 읊는다. 별을 보며 까닭 없는 자조의 한숨을 글로 쓴다.
간도에서 경성으로, 도쿄로 유학을 가면서 윤동주는 조금씩 변화한다. 사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윤동주가 간도 사투리를 쓰는 부분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랬다면 윤동주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고 어색했을 것 같다. 간도에서는 사투리를 쓰다가, 경성으로 유학 온 뒤로 윤동주는 점점 서울말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경으로 유학 가고 나서는 당연하겠지만 일본어를 유창하게 한다. 그에 비해, 송몽규는 계속해서 자신의 고향 사투리를 고치지 않는다. 일본어를 하는 장면에서도 그의 단호한 애국심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시 조선인들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야 했다.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유학을 갔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속에 조국을 향한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송몽규의 재능에 가려져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하던 윤동주는, 동경에 가서야 일본인 교수에게 인정을 받고 영어로 번역해 시집을 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받는다. 윤동주는 갈등한다. 그간 시를 써왔지만 등단한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당시에 문학인이 되려면 여느 변절한 문학인들처럼 일본어로, 제국을 비판하지 않는 시집을 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동주는 그 내성적이고 부드러워 보이는 성격 안에도 단단함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조용한 신념은 자신을 계속해서 부끄럽게 만들었다.
바로 옆에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이나 입신양명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송몽규를 보는 윤동주는, 자신이 더욱 초라해 보였을 테다. 한 번이라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 한 번이라도 어둠 속에 빛나는 별이 되고 싶은 마음. 이리저리 흔들리는 부드러움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윤동주는 갈대와도 같다. 갈대는 바람에 맞서다 부러진 고목을 보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일관된 부끄러움의 정서는 영화 내내 그의 표정과 시로 나타난다.
그런 그의 행적으로, 송몽규와 달리 그를 변절자, 친일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시절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압박 속에서 모두가 독립운동가처럼 살지 않았다고 하여 그 모두를 친일파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동주처럼 가슴에 부끄러움을 안은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조그마한 독립에 도움이 되는 일을 넌지시 모른척하거나 도움을 주었을 수 있다. 극렬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모두가 친일파라는 생각은 오히려 실제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희석시키는 주장이며, 현대까지 이어지는 ‘선택적 반일’이라는 조롱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정치이념을 생각할 때, 그 주장을 하는 집단의 극단적인 쪽을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각자가 할 수 있는 정도의 것들이 있다. 모두가 다 목을 내놓고 순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다 적극적으로 돈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것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 중간 어디쯤, 회색지대에 살고 있다. 영화 <동주>는 흑백영화로 만들어졌지만, 영화의 색은 흑백영화라고 하기엔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가 아주 적다. 영화의 전체 톤 자체가 바랜 회색사진 같은 느낌이다. 이준익 감독의 의도하고 그런 색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화 내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윤동주의 한없는 부끄러움은 그렇게 그의 영화에 덧칠되어 있다.
윤동주는 잠시나마 별이 되는 꿈을 꾸었지만, 송몽규가 잡혀가고 자신도 잡혀가고 나서야 그것이 모두 헛된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사실 윤동주가 어떤 마음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유학을 갔는지 알 수는 없으나, 2010년에서야 밝혀진 윤동주의 재판 관련 문서에 따르면 윤동주는 여느 독립운동가 못지않게 당당했으며,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논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 <동주>는 그 사실을 윤동주의 생애와 그의 시를 교차해 보여준다. 그는 송몽규처럼 앞에 나서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의문의 주사를 잔뜩 맞아 이미 간단한 산수도 못 풀 정도로 피폐해진 두 사람은 불법을 저질렀다는 진술서에 서명을 강요받는다. 이 장면에서, 이준익 감독은 송몽규와 윤동주가 같은 사람인 것처럼 의도적으로 편집해 놓았다. 둘은 완전히 다른 표현으로 저항한다. 송몽규는 일본어로 하나하나 읽어가며 절규하며 서명한다. 윤동주는 조선어로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해 토로하며 서명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나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지만, 모두가 일제에 저항하는 청년들이었다는 사실을 감독은 말하고 있다.
윤동주는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못할, 변변치 않은 시를 쓰고 시집을 내려했던 것에 죄책감을 갖는다. 시가, 문학이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한없이 부끄럽게 씌여진 윤동주의 시는 지금까지도 남아, 별을 노래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시대의 청년들을 기억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 밤길을 걸어오는 내내, 어느새 윤동주의 시가 가슴에 하나둘씩 스치운다.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