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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Jun 05. 2023

<슬픔의 삼각형> 찡그림은 권력이다

남자 모델 오디션장, 인터뷰어는 모델들에게 비싼 브랜드인 '발렌시아가'의 모델이 된 모습과 저렴한 브랜드인 'H&M'의 모델이 된 모습의 표정과 자세를 연달아 시킨다. '발렌시아가'라고 말하자 모델들은 다들 비장한 표정으로 찡그리며 힘을 과시한다. 'H&M'이라고 말하자 다들 해맑게 웃으며 편안한 모습을 연출한다. 그리고 이어진 1 대 1 면접에서, 오디션을 보러 간 칼(해리스 디킨슨)은 심사위원에게 "슬픔의 삼각형을 펴 달라"라는 요구를 듣는다. 심사위원은 양 미간 사이의 찡그림을 '슬픔의 삼각형'이라 말한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 2022)>은 권력자와 피권력자의 관계를 '슬픔의 삼각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보통 피권력자 들은 항상 힘들고 불만에 가득 차 있고, 권력자들은 편안하고 평화로울 것이라 상상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보이게 되는 관계의 표정은 정 반대다.




찡그리지 마라

칼과 아야(샬비 딘)는 모델 커플이다. 하지만 아야는 유명한 인기 모델이며, 칼은 방금 모델 오디션에서 떨어진 모델 지망생이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칼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자신의 불만을 표출하지만, 아야는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칼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다면 아야는 쉽게 그를 떠나버릴 것이고, 아야를 원하는 남자는 많다. 그녀는 돈도 많고 인기 있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결국 칼은 미간의 '슬픔의 삼각형'을 펴고, 화해를 시도한다. 이 관계에서 미간에 슬픔의 삼각형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야다. 아야가 이 관계의 권력자기 때문이다. 칼은 자신 안에 있는 불만은 감춘 채, 그녀에게 맞추려 노력한다. 


칼과 아야가 초대된 호화 요트의 손님들은 사회에서 돈 많은 권력층이다. 이곳에서 존재하는 피권력층은 요트를 운항하는 선원들이다. 선원들은 손님들에게 절대적으로 환한 웃음을 강요받는다. 권력자에게 감히 찡그린 얼굴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권력자를 불쾌하게 했다간, 바로 해고되어 요트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그 피권력자들의 생존을 위한 웃음을, 권력자들은 즐기고 있다.


이후 폭풍이 몰아쳐 요트가 마구 기울어지고 손님들이 멀미로 구토를 하는 도중에, 한 노인이 선장과 선원에게 '더러운 돛을 청소해 달라'라고 말한다. 선장과 선원들은 의아해한다. 이 요트에는 돛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은 분명히 봤다며 없는 돛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요트의 돛은 삼각돛이다. 있지도 않은 삼각형의 돛을 깨끗하게 해 달라는 것은, 내가 느끼는 당신의 슬픔의 삼각형을 깨끗하게 펴라는 말과 같다. 그건 찡그리지도 않았는데 찡그렸다며 화를 내는 권력자들의 모습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너희들 불쾌해하고 있지? 어딜 그런 눈으로 쳐다봐'라는 자격지심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구토하고 더러운 모습을 보이지만 그걸로 불편해하지 말라는 경고다. 선장은 없는 돛을 깨끗하게 하겠다고 대답한다.



감정을 거세당한 사람들

피권력자는 권력자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그것이 그들에게 생존의 방법이다. 자신의 감정은 최대한 억제하고, 권력자의 감정에 맞장구쳐야 한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처럼 연인의 관계나 손님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 이런 권력의 관계는 도처에 존재한다. 부모와 자식, 일진과 셔틀,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큰 사람과 작은 사람, 힘이 센 사람과 약한 사람 등. 심지어 사람 간의 관계뿐 아니라 단체나 국가 간에도 반드시 존재한다. 한국처럼 주변에 강대국들이 있는 나라는, 주변 국가에 슬픔의 삼각형을 감춰야 하는 운명이다. 무언가가 불만이라고 슬픔의 삼각형을 드러내는 국가는 세계의 권력 국가다.


피권력자는 단순히 돈이 없거나 힘이 없어서 삶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까지도 거세당한 삶을 살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요트가 전복되고 섬에 표류된 이들은 그들의 권력 역시 전복된다. 아야는 칼에게 불만이 있지만, 평소 도시에서라면 엄청나게 화를 냈을 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절대 권력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살 길이기 때문이다. 피권력자는 권력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웃어야 한다. 감정을 숨겨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들키면 곧 도태되거나 죽음이 드리워진다. 




누가 권력자인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아무리 힘이 약하더라도 자신의 불만과 의견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시위와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는 것은 국민이 감정을 거세당하지 않고, 슬픔의 삼각형을 소신껏 드러내는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곧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시끄럽다. 그러나 시위를 불법이라며 때려잡는 국가 권력이 있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국민의 감정을 거세하고 슬픔의 삼각형을 펴라고 강요하는 일이다. 지금도 이웃나라에서는 슬픔의 삼각형을 함부로 보였다간 어딘가로 끌려가지 않은가.


이 세상에 진정으로 평등한 관계란 많지 않다. 누군가는 찡그릴 수 있고 누군가는 웃어야만 하는 관계가 있다면 그건 찡그릴 수 있는 쪽이 권력자다. 슬픔의 삼각형은 마치 얼굴 한가운데 자리한 왕관과도 같다. 만약 슬픔의 삼각형을 쓰고 권력 놀이를 하다가 그것이 전복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땐 슬픔의 삼각형의 잔상을 얼른 버리고 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생존한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비굴하다. 그리고 그 섬에서 권력과 감정을 되찾은 사람은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을 상기해 보자. '발렌시아가'는 권력자들의 옷이다. 그 옷을 입은 모델들은 슬픔의 삼각형을 한껏 찡그리고 힘을 과시한다. 'H&M'은 피권력자의 옷이다. 그 옷을 입은 모델들은 슬픔의 삼각형을 펴고 해맑게 웃어야 한다. 권력자들 앞에서 행복하게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집에서 나서서 사회로 들어갈 때, 나는 내가 원할 때 슬픔의 삼각형을 미간에 만들고 다니는가? 아니면 만들고 싶어도 활짝 펴야 하는가?


감히 내 앞에서 불쾌해하지 마라. 찡그리지 마라. 미간에 슬픔의 삼각형을 만들지 마라.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권력이다.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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