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시모프 Jul 04. 2023

<애스터로이드 시티>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살다 보면 우리는 많은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때로는 내가 벌인 사건도 아닌데,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삶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그 사건들은 왜 나에게 일어났을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창조주가 있다면 창조주에게 따지고 싶다. 내 삶에 이 사건은 무슨 의미냐고. TV 속 연극, 그림 같은 영화. 독창적인 미장센을 가진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한 TV 진행자(브라이언 크랜스턴)를 등장시켜,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소개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흑백 화면은 그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은 50년대 TV 다큐멘터리다. 콘래드 이어프(에드워드 노튼)는 그 연극의 극작가다. 콘래드는 자신이 그 연극을 통해 보여주려는 큰 그림이 있고, 그에 걸맞게 배경과 등장인물을 세팅한다. TV에서는 연극에 대한 콘래드의 설명이 시작되고, 시나리오와 실제 시연이 겹치며 컬러 영화 역시 시작한다. 콘래드의 설명대로 차갑지도 따듯하지도 않은, 날카로운 파스텔 톤 조명이 가득한 사막에서.


사막 한가운데 있는 연극의 무대인 '애스터로이드 시티(소행성 도시)'는 그 거창한 이름에 맞지 않는 아주 작은 휴게소 마을이다. 미국 로키산맥이 보이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주유소, 자동차 수리점, 음식점이 전부이고 나머진 대부분 여행자를 위한 숙소들. 근처에 5000년 전 떨어진 소행성을 기리며 만들어졌다는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전국의 어린 천재들을 위해 상을 만들고 행사를 연다. 그 행사를 위해 전국에서 어린 천재들과 그들의 부모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사진작가인 오기(제이슨 슈워츠만)는 천재인 아들 우드로(제이크 라이언)와 세 딸을 데리고 와서, 천재인 딸 디나(그레이스 에드워즈)를 데리고 온 밋지 캠벨(스칼렛 요한슨)을 만난다. 그러던 중 그들은 현실 같지 않은 사건을 공유하게 된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에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

연극의 내용은 50년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된 국제 정세, 핵에너지가 방사능 위험성보다는 엄청나게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던 시절, 또 나중에 팀버튼의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60년대 인기 카드 시리즈인 <화성 침공>이 녹아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현대의 이야기를 그대로 풍자한 부분 역시 보인다.


'애스터로이드시티'에 모인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천체관측을 하다, 외계인이 내려와 그 마을의 상징인 소행성 잔해를 들고 가는 일이 발생한다. 미군은 외계인을 만난 상황에 대처할 매뉴얼을 긴급히 찾아보고, 목격자들을 격리한다. 그 매뉴얼의 1번이 '적국에서 보낸 것은 아닌지 확인하라'는 부분에서 외계인이 중국이나 러시아가 보낸 것은 아닌가 되묻는 장면이 있는데, 그 상황이 현재 중국발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격리되는 것과 맞물려서 웃프게 만든다.


현대의 각 나라 역시 코로나19를 국가에 따라, 격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어떤 국가는 과하게 완전봉쇄를 했고, 어떤 국가는 자연치유를 한다며 격리 자체를 하지 않았다. 모든 곳이 과학적으로 국민의 안전을 위해 격리조치를 했다기보다는, 대부분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선택적인 격리방법을 택했다. 이 영화에서도 미군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특히 외계인 정보가 전국에 알려져 관광지가 된 다음에도 의미 없는 격리를 계속한다.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이 사는 마을 옆에서 핵폭탄 실험을 하고 있는 것만 봐도 국민의 건강이나 안전을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아 보인다. 그에 비해 환경오염이나 방사능에 대해 무덤덤한 것도 현재 세계정세와 비슷하긴 하다.


생각해 보면 외계인이 내려와서 소행성 잔해를 가져가는 것과,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가 나타나 걸리는 것은 크게 다를 게 없다. 내가 살아가는 인생과 바이러스의 인생 동선이 어쩌다 겹친 것이다. 그러나 그 일들로 인해 내 인생은 격리당하고, 통제를 받게 된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원한 것도 아닌데.


인생은 그러한 일들 투성이다. 내가 아무리 교통법규를 잘 지킨다 한들, 어느 날 술 취한 운전자가 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할 수도 있다. 그저 물건을 사러 백화점에 갔을 뿐인데 백화점이 무너질 수도 있다. 난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태어나보니 주변에 독재자밖에 없는 조그만 나라였다. 이쯤 되면 정말 삶은 고(苦)라는 부처의 말이 진리 같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에게 어떤 시련, 깨달음이나 계시를 주려는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의미가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주변 사람들 뿐 아니라 나에게도 폭력이다.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은 후에 좋은 일이 생겼다면 '그 일은 지금의 일이 있기 위한 시련이었어'라며 의미부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좋은 일 때문에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 믿을 것인가?



종교인들은 삶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두 가지의 방향으로 생각한다. 기독교처럼 모든 것에 신의 의미부여를 하던지, 불교처럼 삶 자체를 고통으로 보고 해탈을 하려 하던지. 무엇으로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내가 신이 아니고 신과 직접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이상, 나는 내 인생에 일어난 일들을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왜 일어났지? 이런 일이 생긴 의미는 뭐지?'라고 찾으려고 해 봐야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영화도 계속해서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작은 대화들의 연속이며, 여러 각자의 상황들이 한 화면에 펼쳐진다. 때론 그 각자의 상황이 맞물리기도 하지만 전혀 연결되지 않고 지나가기도 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격리가 풀릴 때쯤, 외계인은 한번 더 나타나 어떤 표시를 한 소행성 잔해를 돌려주고 간다. 원래대로면 외계인의 존재, 외계인이 전해준 문자 등에 더 사람들이 관심을 나타내야 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그게 아니었다. 다시 격리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의 분노가 폭발한다. 천재들이 만든 온갖 기계들로 대항하고 발표장은 난장판이 된다. 이 연극에서 주인공 오기의 배역을 맡고 있는 배우도 폭발한다. 이 장면이 갖는 의미에 대해 창조자에게 묻고 싶다. 그는 연극 중간에 무대 뒤에 있는 감독(애드리언 브로디)에게 따지러 간다. 감독은 그에게, '의미를 몰라도 되니 지금 잘하고 있다. 그대로 해도 된다'라며 다독인다. 오기역을 맡은 배우는 담배를 피우러 아예 극장 밖의 발코니로 나간다. 거기에서 오기 역할의 죽은 부인역이었던 배우(마고 로비)를 반대 건물에서 마주한다.




중요한 장면의 삭제

분명 콘래드는 이 시나리오를 쓸 때, 어떤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기에 오기와 그 부인은 사실 대사가 있었다. 그 대사는 충분히 좋은 감정을 전달해 줄 만했고, 둘이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 나누는 동안에도 의문을 가진다. 이 좋은 장면을 왜 없앴지?라고. 연극의 모든 부분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엄마는 등장조차 하지 않도록 잘렸고, 대사도 없어졌고, 그 상황으로 연극은 만들어졌다.


그리고 콘래드가 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클라이맥스 장면이 있다. 이 모든 특별한 상황을 경험한 모두가 다 같이 잠드는 장면이다. 그것을 통해 그도 무언가를 전달하려 했지만, 배우들이 그 장면의 의미를 물어보자 딱히 한마디로 대답하지 못한다. 그 와중에 배우들은 깨달은 듯이 한 마디씩 소리친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세상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그전에 다 같이 잠들어야만 한다. 다 같이 잠든다는 것은 깨어나기 위한 전단계이다. 다시 태어나려면 죽음이 필요하다. 일어나려면 먼저 쓰러져야 한다. 자유로워지려면 그전에 격리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연극으로 만들어질 때, 감독에 의해 바뀌어 컬러로 된 연극장면에서는 볼 수가 없다. 단순히 오기역을 맡은 배우가 담배 피우러 간 사이에 일어난 일은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두 번째 외계인이 왔을 때 재격리발표를 하고 모두가 난리 치며 폭동을 일으키는 장면 대신, 모두 잠들어야 했다. 그 장면은 앞서 잘려나간 오기 부인의 장면처럼, 아예 바뀐 것이다. 그러니 처음 대본(잠드는 것)을 이해했던 배우가 그 장면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따지러 갔던 것.


글로 대본을 쓰는 것과 실제 연극을 만드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무대 위에서 어떻게 보일 지도 생각해야 하고, 관객을 지루해하지 않을 장치도 클라이맥스에 마련해야 한다. 모두가 잠들고 깨어나는 것은 어떤 의미는 될 수 있었겠지만, 사실 연극적으로 큰 재미가 있진 않다. 감독이 무슨 생각을 했는진 모르지만 감독은 감독 자신의 생각대로 연극을 바꾸었다.




결국 작가가 원하던 방향에서 감독을 거치며, 배우를 거치며 연극은 달라졌다. 그 와중에 원래 만들려던 연극의 의미와 의도는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애스터로이드 시티> 연극은 400회를 넘는 회차를 맞으며 성공한 연극이 되었다. 의미를 알지 못해도, 많은 사람들을 거치며 의도가 달라졌어도 연극은 연극을 보는 것 자체로 재미있을 수 있다. 그곳에서 저마다의 의미를 찾을 테니까.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중간중간 경찰과 범죄자의 추격전이 마을 한가운데에서 지나간다. 그것은 그들의 삶과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교차점이다. 그것은 비록 외계인처럼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언젠가 어느 땐가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들은 그렇게 수없이 교차되며 지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삶과 삶이 만난 그 교차점들이 정말 아무 의미가 없는 사건일까? 애초에 소행성이 지구와 만난 그 엄청나게 작은 확률,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을 사람들이 그 작은 마을에 모인 일들, 외계인과 인류가 하필 그 시점에서 만나게 된 일, 모든 것은 의미가 있어서 사건이 생긴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의미를 만들어낸다. 오기와 밋지 캠벨이 만난 것은 우연이지만, 그 우연이 의미가 되는 것은 서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사건은 의미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의미를 만든다.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