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세한 경력을 모르는 사람들은, 디자이너인 내가 꽤나 전문적인 영화 리뷰나, 또는 SF소설을 쓴다고 하면 의아해하기도 한다. 브런치북 <불멸의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사는 법>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나는 내 분야에서 굉장히 경력이 오래되었고 업계에선 이름 대면 알만한 작업들도 했었다. 계속해서 욕심내서 일한다면 더 돈을 많이 벌었을 테고 아마 회사도 차리고 했겠지. 하지만 사람은 결국 하고 싶은 것을 찾게 되어있다.
브런치 경력에도 썼지만, 나는 원래 만화가가 되기 위해 꾸준히 스스로를 단련하고 공부했다. 만화 연출, 시나리오, 캐릭터 등을 연구했고 국내에서 알아주는 미대에 들어간 후에는 더 만화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군대 대신 병역특례로 산업기능요원복무를 하면서 인생의 방향이 틀어졌다. 3년 내내 컴퓨터로 웹사이트 디자인, 모션그래픽과 씨름한 다음에는 자연스레 돈을 벌기 위해 그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내 원래 전문분야는 애니메이션, 모션그래픽과 영상편집이다. 이 세 가지는 하나로 일맥상통하는데, '영상언어'에 특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2000년대 중반에는 영화 마케팅회사에서 영상 촬영과 편집을 프리랜서로 받아 일하기도 했다. 지금도 누구나 알만한 영화들의 홍보영상으로 내가 편집한 영상이 인터넷에 남아있다. 지금은 감독이 되신, 유명배우이신 분이 나와 일 같이 하자고 했었는데 그걸 거절한 대단한...나.... (아님) 내가 영상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그 일을 맡아서 할 수 있었던 건, 애초에 애니메이션과 모션그래픽이 '영상언어'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디자이너라고 썼다고 해서, 포스터, 제품 디자인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화를 하면 좋지 않겠느냐 하지만, 짐 웹툰 흘러가는 걸 보면 솔직히 대충 그려도 연재를 할 수 있을 거 같긴 한데(아님) 그보다는 기왕 한다면 어린 시절부터 받았던 무시를 풀고 싶은 게 있다. 지금은 그런 게 덜하지만, 20년 전에는 더 심했다. "만화를 그리는 애가 무슨 글을 쓸 줄 안다고?"라는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더 화가 나는 건, 그런 말을 한 사람 중에 내 글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쌓은 내 경력을 거의 쓰지 않고 글을 쓰는 건, 그 경력이 사실 글 쓰는 거와 크게 관계없다고 생각해서기도 하고, 글은 글로만 평가받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무엇을 전공했든, 혹은 어떤 삶을 살았든, 직업이 무엇이든 그냥 글이 재미있다, 좋은 내용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이래저래 핑계로 실제 소설을 쓰는 건 좀 미뤄지고 있지만, 올 가을에는 연재와 장편소설 마무리를 할 생각이다. 첫 술에 배부를 일은 없어도 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