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급속도로 고령화 사회가 되고 있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젊은 인구의 수도권 쏠림도 심해져, 시골에는 이제 거의 노인들과 외국인들 뿐이다. 20여 년 전만 해도 귀농, 귀촌이라 해서 다시 시골로 돌아가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시골의 텃세가 심하다거나 인프라의 절대적인 미비를 견디지 못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많은 시골에선 60대가 젊은이로 통할 지경이다.
박이웅 감독의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죽어가는 오늘날의 작은 어촌이 배경이다. 류승완의 영화 <밀수>에서 보인, 70년대 활기 넘치던 시골 어촌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배를 팔려고 해도, 빈 배가 넘쳐나서 사려는 사람도 없다. 젊은 사람들은 이곳을 탈출하고 싶어 하고, 노인들은 그래도 앉아서 꾸역꾸역 하던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해병대 출신의 선장 할아버지인 영국(윤주상)은 동네 사람인 판례(양희경)의 아들인 용수(박종환)와 함께 배를 몰고 나가 일을 한다. 그러나, 용수는 시종일관 멍한 상태로 죽어있는 사람처럼 있다.
젊은이들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이곳. 왜 이 어촌은 이렇게도 죽어있는 것일까. 그저 다 아는 사람끼리 알음알음 법을 잘 지키지 않아서? 남 흉을 보고 발전시킬 생각도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서? 어업 자체가 망해가고 있어서? 사실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서울로 떠났다가 '그래도 죽을 수는 없어서' 꾸역꾸역 돌아와서 일하는 형락(박원상)도, 마을 사람들이 흉보고 있지만 마냥 나쁜 인물은 아니다. 이곳 어촌 사람들이 무조건 나쁘게 그려지거나, 무조건 정이 많은 사람들로 그려지는 건 아니다. 다들 각자의 이유가 있고, 각자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할 뿐이다. 그냥, 이 어촌의 모습은 바로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의 모습 그 자체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 영화가 마냥 우울하게 그려지지 않는 건, 선장님 영국의 정감 가는 캐릭터 덕분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있지 않아, 영국은 같이 일하던 용수를 밤중에 몰래 도망시킨다. 용수는 절을 하고, 영국은 부탁받은 대로 용수가 바다에 빠졌다며 실종신고를 한다. 하지만 영국은 계획대로 하지 않고 내내 작은 실수들을 한다. 나중에 보면 알게 되지만, 처음 신고할 때 하마터면 엄청난 실수를 할 뻔했다. 그렇게 허술한 계획들 진행시키는 동안, 용수의 어머니인 판례는 자식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매일마다 항구에 나와 아들을 기다린다. 판례가 자식을 잃은 모습으로 슬퍼하고 화를 내고 절망하며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은, 최근 한국에도 일어났던 여러 안타까운 사건들을 상기시킨다. 이 두 인물의 옥신각신이 영화 내내 상당히 흥미롭게 그려진다.
또한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은, 베트남에서 시집온 용수의 부인 영란(카작)이다. 영란은 조금 평면적일 수도 있는 영화의 이야기에 입체감을 준다. 영란은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했고, 가난하지만 한국의 생활을 좋아했다. 시어머니인 판례와의 관계도 좋았다. 그러나 용수가 죽었다는 소식에, 영란은 미래가 캄캄해진다. 영란의 미래는 용수였다. 용수가 없는 영란은, 한낱 외국인 노동자일 뿐이다. 그것도 시골엔 없는 젊고 예쁜 여자. 모두가 친절하게 대하는 것 같지만, 그 친절함에서 오는 불편함을 관객도 느낄 수 있다. 시어머니 판례와 갈등이 절정에 달하는 지점에서, 친절함은 이제까지 느끼지 못하던 폭력이 되어 섬뜩함으로 관객의 가슴에 꽂힌다.
이 모든 갈등의 시작은 엉성한 영국과 용수의 계획이다. 이 문제를 풀 사람은 영국과 용수밖에 없다. 거짓말로 인해 생긴 오해와 갈등은 진실로만 풀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 영화는 '범죄 사기극'이 이렇게 슬플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너무나 한국의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으니까. 가는 자는 가고, 오려는 자는 와야 한다.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하지만 역시나,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영화의 마지막, 영국과 판례가 서로 소리 지르며 나누는 딱 세 마디의 대사. 그것은 슬픔 속에서 미소 짓게 만드는, 올해 한국영화의 최고 명대사임에 틀림없다. 슬프지만 그 안에서 가만히 피어오르는 미소. 그것이 우리가 사는 삶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