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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Aug 16. 2021

처음 해보는 일도 해내야 한다

자신의 한계치를 가늠하는 능력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좋아한다고? 그럼 합격!"

면접하러 간 회사는 벤처기업 육성센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회의실은 따로 없었고, 엘리베이터 타는 복도 중간 조금 넓은 곳에 테이블이 있는데 거기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면접을 시작했다. 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대학교 시험 때 썼던 자기소개서를 생각하며, 자신에 찬 논조로 나를 소개했었다. 특히 내가 '천재'스타일을 좋아했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언급하며 그런 다재다능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무엇이든 시켜만 주면 잘할 수 있다는 태도와 나름의 경력(?)에 사장은 마음에 들어 했고, 팀장은 약간 거들먹거렸지만 재미있어하는 표정으로 자기소개서를 보다가, 저렇게 말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때문에 합격이라니.


이제 내일부터 출근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집에 오니,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열어보니 무려 제일 잘 나가는 게임회사에서 면접 봤던 결과가 와 있었다. 1차 면접은 통과했으니, 2차 면접을 보러 오라는 메일이었다. 내가 정말 가고 싶었던 회사였는데! 그런데 여길 가려면 지금 면접보고 온 중소기업에는 출근하지 않거나, 양해를 구해야 했다. 게다가 내가 2차 면접을 본다고 해서 합격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산업기능요원 자리는 일반 취업보다 훨씬 치열하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죄송하다는 답메일을 보냈다.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일을 이 회사 다니는 동안 두고두고 후회했다.


내가 다음 주까지는 산업기능요원이 되어야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다는 사정을 말하자, 그럼 인턴기간을 1주일로 하고 바로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첫 출근을 하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팀장한테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데... 어라, 웬걸. 같은 회사의 툴이지만 이 회사에서 쓰는 툴은 생전 처음 보는 툴이었다. 나는 Macromedia Flash를 배우고 썼었는데, 이 회사에서는 Macromedia Director를 쓴다고 했다. 물론, 그 안에 들어가는 코딩도 Action Script를 쓰는 Flash와는 전혀 다른 Lingo라는 스크립트였다.


플래시는 벡터 이미지 기반의 모션그래픽 툴이고, 디렉터는 비트맵 이미지 기반의 모션그래픽 툴이다.


이 두 프로그램은 사실 90년대에 퓨쳐웨이브라는 미국 회사가 만든 프로그램인데, 어도비에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팔려고 했으 거절당했고, 당시엔 퓨쳐웨이브와 매크로미디어는 경쟁사였다. 그들이 만든 퓨쳐스플래시라는 벡터 기반 애니메이션 툴은 심슨을 만드는데도 사용되었다. 하지 퓨쳐웨이브는 결국 매크로미디어에 인수되었고, 매크로미디어는 프로그램 이름을 플래시와 디렉터로 바꾸어 출시했다. 스크립트 기능을 점점 추가하고 웹 환경에 최적화된 용량을 무기로 플래시는 점점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디렉터는 애초에 웹용 프로그램이 아니라 CD 제작 툴이었기 때문에, 용량이 무식하게 컸다. 그래서 플래시가 커가는 동안 점점 죽어가게 된다. 결국, 매크로미디어가 어도비에 넘어가면서 어도비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거절했던 그 프로그램을 주력으로 하는 프로그램 라인을 만들게 되지만.


UI도 다르고 툴 내에서의 메뉴 이름도 조금씩 달라서 이게 뭘까 싶었지만, 타임라인이 있고 애니메이션 하는 방식은 비슷했다. 그래서 난 옆에서 하는 걸 보고, 첫날은 버벅거리며 툴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놀랍게도 난 실무에 투입되었다. 책을 보며 공부한 것도 아니고 팀장이 대충 알려준 것뿐인데 말이다. 내가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할 틈도 없었다. 팀장님은 날 보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할 수 있을 거야! 널... 믿는다."



난 그제야 회사가 왜 날 급하게 뽑았는지 알았다. 지금 회사는 몇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마감하는 엄청 바쁜 시기였고, 고양이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난 둘째 날부터 야근을 했다. 회사 책상마다 옆에 있던 이상한 물체의 정체를 그때 알았다. 야전침대였다. 새벽 3시가 되자 하나 둘 의자를 빼고 자기 자리에 야전침대를 펴서 잠을 청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관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는 사람들 같았다.


엄청 깔끔하게 표현하자면 이런 느낌이다


나는 버벅거리며, 나에게 주어진 업무량을 겨우 다 채워서 팀장님에게 넘겨주었다. 내 결과물을 본 팀장은 굉장히 만족해했다. 이건 그야말로 생존수영 같은 거였다. 수영을 가르치기 위해 그냥 물에 집어던지는 것. 그런데 나에게 가장 큰 단점이 있었다. 대학 다닐 때, 밤샘 작업하다가 저런 야전침대에서 자면 잘 자는 편이었다는 것이다. 작업용 MDF 합판이나 책상 위에서, 혹은 바닥에서 침낭만 깔고 자는 일이 수두룩 했었으니까. 나는 저걸 꽤 복지가 좋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1편에서 말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감사하다고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아무튼 들어간 날부터 밤새며 일하면서 전방에서 전쟁을 하듯 일을 해서 그런지, 디렉터 툴을 다루는 내 솜씨는 갈수록 좋아졌다. 게다가 나는 회사에서 유일하게 플래시를 다룰 줄 알아서, 플래시만이 할 수 있는 벡터 애니메이션을 추가할 수 있었다. 들어간 지 사장님은 나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고 팀장님과는 일 이외에도 서로 좋아하는 거나 성격도 잘 맞는 편이어서 야근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 이전 회사와는 다르게, 이곳에서 나는 완전히 호감형 인재였다. 회사 자체는 연봉도 전혀 높지 않고, 야근 수당도 내가 너무 많이 가져가자 아예 없애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어쨋든 나는 정말 내 전공이 아닌 일들까지 해가며 능력을 발휘한 덕에 산업기능요원이 되었다. (만세! ㅠㅠ)




이전 인턴쉽에서 잘린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내 호감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고 결국 그것은 먹혀들어갔다. 회사의 분위기, 팀장과의 케미,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 등을 빠르게 캐치해서 적응했고, 또 마침 그게 내 성격과도 맞는 회사이기도 했다. 만약 작은 회사에 들어가게 된다면,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 아닌 전혀 다른 업무를 주문할 수도 있다. 프리랜서나 사업자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클라이언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회의하다 보면 처음 의뢰할 때 알고 있던 것과 다른 방식의 결과물을 원할 때가 많다. 그럴 땐 당황하지 말고,


처음 해보는 일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지 파악해서 해낼 줄 아는 센스가 필요하다.


물론, 무턱대고 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건 아니다. 실제로 나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던 형이 있었는데, 능글거리며 뭐든 잘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다가 결과물이 너무 안 좋아서 내가 처음부터 다 다시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그분은 인턴기간 안에 잘리고 말았다. 사장은 그놈을 고소하겠다며 노발대발했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 보는 것도 내가 작업 기간 내에 익혀서 수준급의 작업물을 낼 수 있느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능력이다. 단순하게 내 능력을 가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능력의 잠재력을 가늠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걸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면, 기회가 왔을 때 그냥 버리게 될거나 무턱대고 하다가 완전히 망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굉장히 냉정해져야 한다. 시킨다고 다하라는 것도 아니다. 할 수 없는 것은, 못한다고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서로에게 피해가 없다. 성격상 질질 끌려서, 하라고 하니까, 혹은 해야 할 거 같아서, 능력에 맞지 않게 하는 건 일을 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프로가 아닌 것이다.




결국 나는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산업기능요원을 까서 회사에 다니게 되었고, 엄청난 업무 덕에 능력은 나날이 향상되어갔다. 그리고 결국 반년만에 팀장 자리에 오르는데, 내 사수는 나에게 중요한 조언을 해 주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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