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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Aug 25. 2021

네 능력이 회사에 알려지면 안 돼

선을 넘나드는 것이 능력일까, 선을 지키는 게 능력일까

"100% 힘을 쏟지 마"


집에서 자는 시간보다 회사에서 자는 시간이 길어지고, 건물에 있는 샤워실에서 새벽에 씻는 일이 잦아지면서 업무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디렉터의 링고 스크립트는 필요한 만큼 익혀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어진 디자인에 맞춰서 글씨나 이미지가 생성되어 안착하는 모션을 주는 것은 이미 회사 안에서 사수보다 속도가 빨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수는 사수였다. 있어 보이거나 창의적인 모션은 더 잘했으니까. 나는 양 많은 뒤치다꺼리를 하는 느낌이었다. 두 달이 가기 전에 한 파트를 전담하기 시작했다.


반년이 지나 회사가 더욱 성장해서, 더 큰 사무실로 옮겼다. 아마 나를 포함한 직원들이 목숨을 갈아 야근을 많이 해서 벌어다 준 덕분이었겠지. 앞서 말했듯이, 야근수당을 꼬박꼬박 꽉 채워가는 내 월급은 평소 월급보다 50-60만 원 이상 더 나왔다. 사장은 결국 지문 출퇴근과 야근수당을 폐기했다. 난 하라는 대로 야근을 성실하게(?) 했을 뿐인데. 결국 나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반년만에 팀장으로 승격했다. 프로젝트를 전담해서 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팀장으로 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년도 회사 실적이 안 좋아서 연봉은 동결이란다. 더 큰 사무실로 옮기고 사람도 더 뽑았는데 왜 그랬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청년 감성의 삼성 서비스였던 ID10100 플래시 홈페이지의 음악. 플래시로 보여줄 수 있는 사진과 스크립트를 이용한 브라우저 연동으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2000년도 초반, 플래시가 액션스크립트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게 되자 인터렉티브를 최대한 활용한 홍보용 마이크로사이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마이크로사이트란,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화면에 고정된 크기의 팝업창이 뜨면서 그 안에서 플래시로 디자인, 이미지, 사운드, 메뉴 등을 보여주는 웹페이지다. 일반인은 영화 홍보사이트, 연예인 홈페이지로 많이 접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조카툰, 마시마로나 오인용과 같은 웹 애니메이션으로, 한쪽에서는 힐만 커티스, 설은아와 같은 플래시를 웹 아트로써 활용하는 작가들도 생겨났다. 그야말로 Macromedia Flash의 전성시대였다. 그중에서도 삼성의 ID10100 홈페이지는, 플래시의 모션그래픽과 액션스크립트를 최대한 활용해 감성까지 끌어낸 스토리를 만든 사례로 업계에선 꽤 이슈가 되었었다. 그리고 나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저런 스타일로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획부터 내가 PD로써 참여하는 홍보작업을 맡게 되었다. 기존의 딱딱한 PPT 스타일의 홍보물이 아니라 좀 더 새로운 느낌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래서 난 ID10100 스타일을 생각해냈고, 기획부터 시나리오 스토리보드 등 초반 작업을 도맡아 했다. 나름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보려는 생각이었다. 한창 계속 작업이 잘되었었기에 자신 있게 기획했고, 배우와 촬영기사, 촬영장소도 섭외해 촬영도 했다. 이 많은 일들과 모션그래픽 자체를 내가 만들어야 했기에 디자인은 다른 팀원에게 맡겼는데, 생각만큼 디자인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열심히 밤을 새 가며 만들었다.


하지만 막상 결과물을 보니 좋지 않았다. 산만하고, 주제가 잘 전달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와 실제 편집 영상의 갭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산만한가 싶었다. 사장은 큰일 났다며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갔고, 내 사수는 가만히 보며 어떻게 해결할지 같이 밤을 새우며 회의했다. 그러다가 사수는 나에게 한마디 했다.


"네 능력이 회사에 다 알려지면 안 돼~ 적당히 해 이놈아~"

"네? ㅋㅋ 무슨 말씀이세요? 열심히 하는 게 좋은 것 아닌가요?"

"너 그래 가지고 어떻게 사냐?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 할 줄 안다고 알려지면 회사는 새로운 사람을 뽑는 것보다 너를 그냥 굴려서 쓰려고 할 거야. 큰 회사면 일 잘해서 직급도 올라가면서 일도 줄어들고 관리만 하면 되겠지만, 이런 곳에서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아? 나도 그렇게 해서 사장의 신뢰를 얻은 거지만, 결과적으론 몸도 망가졌어. 지금 날 봐. 적당히 적당히 하잖아."

"그래도 재미있는 작업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인마, 내가 한마디 해 줄까? 회사에서 오래 일해서 노하우가 쌓이고 능력 인정받으면 일이 줄어들 거 같지? 아니, 회사는 그만큼 너에게 일을 더 준다. 그게 팩트야. 어차피 병역특례 끝나면 학교로 복학할 거 아니야? 적당히 해."

"..."

"그리고 이건 네 몸 얘기만은 아니야. 작업에서 혼자 욕심을 부리게 되면, 작업도 탈이 나게 되어있어. 네 머릿속에서만 완성되어있던 어떤 것이 있었지만, 네 욕심만 앞섰고 주변 사람들은 따라오기 벅찼던 거야. 너 스스로도 그렇고. 지금 만든 거도 그래. 이거 저거 메시지나 화면이 너무 많아. 욕심을 좀 덜어내 봐."


그러고 사수는 수고하라고 말하며 집에 갔다. 난 새벽에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고민을 하다가 디자인을 바꾸고, 연출을 조정하고 덜어내서 주요 메시지가 보이도록 바꾸었다. 조금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직설적인 메시지를 넣었다. ID10100은 정확한 메시지를 준다기보다 감성을 전해주는 스토리와 연출이었다. 이것은 홍보물이다. 그래, 좀 더 정확하게 메시지가 전달되게 했어야 했다. 다음날, 사장에게 다시 보여주자 괜찮아졌다며 수고했다고 어깨를 토닥였다. 비록 생각만큼 성공적이진 못했지만, 프로젝트를 엎어야 할 위기에서 살아나긴 한 것이다.




지금 이 부분은 사실 회사를 다니면서도, 프리랜서로써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사람은 마음에 드는 일을 하게 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쏟아부어서 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는 열화(Generation Loss)가 반드시 일어난다. 종종 그런 열정은 내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고,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으로 작업이 이뤄진다는 것을 잊게 만든다. 내가 100%를 원한다고 해서 그 100%가 모두 작업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한 작업량과 타이트한 일정의 압박으로 원래 할 수 있는 능력의 반도 못 내고 끝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감안하고서도 내 능력의 70% 정도를 최대로 잡고 작업량과 일정을 잡는다.


여기서 70%라는 것도, 수치로 딱히 정해진 건 아니다. 그저 내가 기를 쓰고 해내야 할 정도가 아닌 선에서 최대치를 잡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사실상의 한계다. 어쩌다 기를 쓰고 해내서 잘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내 최대치라고 생각해버리면, 일정이나 작업이 망가지기 쉽다. 대부분 마감에 치여 일하는 사람들도, '이 정도는 내가 며칠 안에 끝낼 수 있어. 그랬던 적이 있거든'이라고 생각하며 느슨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되는 것이다. 내가 가장 빠르게, 가장 최고로 일했던, 항상 밤새며 끝냈던 모습을 생각하면 안 된다. 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100%를 다 내가 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아무리 프리랜서라 해도, 적당한 분업과 협업이 필요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70%만 맡는 게 좋다. 빨리 자신의 몸을 태워버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야근에 야근을 더하며 힘겹게 생활하고 있던 나는, 주변 동료로부터 굉장히 정상적인 병역특례 회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도 꽤나 큰 기업. 동료의 학교 선배들이 만든 곳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이직을 결심한다. 병역특례가 이직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 줄은 미처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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