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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Sep 16. 2021

혼자서도 잘해요

본격적인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시작

"카시모프 씨, 알바하지 않을래요?"


새로 옮긴 회사에서 잘 적응해 나가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팀장은 나에게, 업무 끝나고 알바 좀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다른 회사 외주를 자신이 따로 줄 테니 해볼 생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행히 옮긴 직장은 꽤 잔업 없이 퇴근시간을 잘 지켜주는 편이었으므로 저녁에 시간이 남았었다. 산업기능요원도 퇴근 후에 본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업체의 허락이 있을 시엔 다른 일을 하는 게 가능했다. 난 그렇게 일을 하나둘씩 가끔 받아서 해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는 것도, 몸과 마음에 여유가 있는 회사생활이었기에 가능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회사와, 업계를 이끌어가는 회사는 확실히 여러모로 달랐다. 따로 인센티브 등을 챙겨주는 근무환경이나 직급이 아닌 닉네임을 부르는 회사 문화도 많이 달랐지만, 결과물은 비슷해도 그 회사가 어떤 것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가 아주 크게 다른 점이었다. 이전 회사는 어떤 '툴'에 의지하는 바가 컸고, 미디어의 기반을 철저하게 한두 사람의 개인적인 능력에 기대는 바가 컸다. 즉 시스템이 만들어져있지 않았으며 회사의 스타일이라는 것도 당연히 없었다. 그건 직원을 혹사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그러기에 나 같은 사람이 하나 퇴사하면 회사 작업이 급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큰 회사에서는 디자인이나 프로그래밍이나 시스템화 되어있다. 회사의 스타일도 일관성이 있어서, 디자이너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퀄리티의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 그러기에 일을 분담해서 하기 수월했고, 일정을 제대로 잡아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저녁에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가능할 수밖에. 그런 구조적인 문제는 회사를 직접 차려보지 않은 나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뭐 그게 중요하겠어. 나는 어찌 되었건 조금 더 편한 환경에서, 다른 일을 받아서 작업하며 인맥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전 회사에서 나보다 먼저 산업기능요원을 마치고 소집 해제된 형이나, 퇴사한 분들에게서도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일을 같이 하고 싶다는 거였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정기적으로 일이 들어오다 보니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거... 회사 다니지 않아도 먹고 살만 하겠는데?'


결국 나는 산업기능요원 3년을 채우고 소집해제(제대)를 했고, 회사를 더 다닐지 아닐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퇴사하기로 했다. 여러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돌아가려던 학교에 가지 못했고, 난 그렇게 뜻하지 않게 어느새 나도 모르게 혼자 외주를 받으며 일하는 프리랜서가 되어있었다.


지금이야 프리랜서들을 위한 플랫폼들이 많지만 당시엔 그런 게 전무했다. 내가 작업을 하면, 아는 사람들의 아는 사람들이 연락하고 소개해줘서 일을 하게 되거나, 당시에 플래시 작업자들에게 유명했던 플생사모(지금은 플래시가 없어졌으므로 거의 사장된 카페)에서 가끔 올라오는 일을 따는 정도였다. 그렇게 얼떨결에 프리랜서를 하다 보니, 내 모습이 마치 어릴 적 봤던 시티헌터의 모습이 아닌가? 시티헌터는 지금 보면 그냥 여자 의뢰인만 보면 발정 나서 헐떡거리는 성추행남에 불과한 만화지만...(사실 대부분의 일본만화가 요새 성인지 감수성엔 맞지 않다) 당시엔 꽤나 인기있는 만화였고, 무엇보다 그 의뢰를 받는 모습이 신주쿠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용하는 전언판에 XYZ라고 쓰면 시티헌터가 보고 일을 받는 식이었다. 만화 연재 당시엔 핸드폰도 sns도 이메일도 없었으니, 사람들이 만나려면 그런 식으로 게시판이나 식당 벽 등에 쪽지나 글을 남기는 문화가 있었다. 일이 없을 때는 백수처럼 쫄쫄 굶고 있는 것도 비슷하고.


프리랜서 해결사인 시티헌터에게 일을 의뢰하려면 신주쿠에 위치한 전언판에 XYZ를 달아 연락처를 남겼다. 실제 신주쿠의 전언판은 1985년 철거되었다.
2020년 부활한 JR 히가시가나가와역의 전언판. 6시간마다 지운다고 한다.


딱히 큰 고민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되다 보니, 초반에는 회사다닐 때처럼 집에서 일을 받아서 주곤 했었다. 하지만 이 프리랜서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정한 직업인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일단, 나에게 고정적으로 일을 준다던 사람들이 고정적으로 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어떤 달은 일이 한꺼번에 들어와 밤을 새 가며 여러 일을 동시에 처리하기도 했고, 어떤 달은 놀며 돈을 까먹기만 했다. 결국 여자 친구가 하는 일을 도와주며 근근이 살기도 하고, 여기저기 외주 사이트를 뒤지며 일거리를 찾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다시 회사를 들어가기는 좀 힘들었던 것이, 유학을 준비하느라 내 위치 자체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휘몰아치듯 되는대로 일을 하다 보니, 몸도 많이 힘들어지고 돈은 모이긴커녕 점점 떨어져 갔다. 이것 역시 회사생활을 처음 할 때와 마찬가지로, 프리랜서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지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 않은 채 그냥 던져버린 나 자신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을 하기 전에 가장 고려했어야 하는 건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28년 동안 외주를 받으며 잔뼈가 굵은 내 입장에서 볼 때 이 다섯 가지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할 때 매우 중요한 사안들이다. 이것들은 간략하게 설명하고, 나중에 더 하나씩 자세하게 다뤄보겠다.


1 매력적인 포트폴리오가 준비되어 있는가?

2 고정적으로 일을 주는 클라이언트가 있는가?

3 인맥과 상관없이 일을 수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4 내가 전체 작업에서 어디부터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5 내 작업은 업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고, 일정과 페이 측정을 할 수 있는가?


매력적인 포트폴리오

프리랜서라는 것은 '나'라는 사람 자체를 가게로 생각하고 창업하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카페를 다니니까, 카페에 비유하면 아마도 쉽게 이해될 것이라 생각한다. 매력적인 포트폴리오라는 것은 인테리어나 카페 로고, 콘셉트 등 브랜딩이 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메뉴판이다. '나'는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이런 것을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메뉴판이 준비되어야 한다. 카페의 메뉴를 뭘로 정할 것인지, 그 메뉴는 어떤 모양으로 나올지, 맛과 퀄리티는 어떨지. 포트폴리오는 그런 역할을 한다. 매력적인 포트폴리오를 갖추지 않고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뛰어들 수는 없다. 그러면 당신의 가게는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시켜먹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포트폴리오란 무엇인가? 디자이너라면 당연히 그 시대의 트렌드를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다 똑같이 따라한 듯 찍어낸 듯한 포트폴리오로는 어필을 할 수가 없다. 왜 나를 선택해야만 하는가? 나의 무기 하나는 갖춰야 한다. 카페를 또 예로 들면, '저 카페는 라떼가 맛있어' '저 카페는 치즈케익이 색다른 맛이야' '저 카페는 과일주스가 독특하더라'와 같은 것이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나만의 무기가 있는지 살펴보고 만들어 놓자. 자신있는 분야나 무기가 하나쯤 없다면 차라리 회사를 계속 다니라고 권유하고 싶다. 오랫동안 프리랜서로 일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회사를 다니면서 굉장히 많은 양의 포트폴리오와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데 시작할 수는 없다.


고정적인 클라이언트, 수입

일을 주기적으로 주는 클라이언트가 있다면 회사랑 매한가지 아니야? 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프리랜서의 입장에서는 고정적인 수익이 매우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외주 일을 받는 신뢰관계가 쌓이면, 아예 월급처럼 정기적인 날짜에 돈을 지급받기도 한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이런 정기적 수입이 없다면 사실상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내 살 깎아먹기'식의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즉, 이게 없다면 무척 고생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하기 싫은 일, 내가 할만한 일이 아닌 작은 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해야 할 때가 많이 생긴다. 그러므로 내 삶을 위한 최소한의 클라이언트와 작업을 구축해 놓은 후, 프리랜서로 뛰어드는 게 좋다. 이런 관계는 처음부터 되는 건 아니고, 작업을 잘해서 서로 좋은 신뢰가 쌓이면 저절로 만들어진다.


외주를 받는 방법

프리랜서는 과연 어디에서 일을 받을까? 그건 플랫폼일 수도 있고, SNS일 수도 있고, 수없이 많은 외주 공고에 지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건 포트폴리오와 브랜딩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그 심한 경쟁에서 전혀 뽑히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럼 시작하자마자 망하게 된다. 따라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일을 받을지, 깊게 고민하고 그 방식을 좀 해봐야 한다. 해보는 건 어렵지 않다. 해보면서, 인맥을 통하지 않고서도 일을 받아서 할 수 있겠구나 싶을 때 프리랜서를 시작해야 한다.


나의 작업 영역

외주를 받다 보면, 내 역량이 어디까지인지 잘 파악하지 않고 욕심이 앞서서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있다고 어필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내가 어느 부분만 할 수 있다고 하면, 마치 더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사람에 비해 능력이 떨어져 보일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 오히려 자신의 영역을 아는 것이 훨씬 프로다운 자세다. 그 부분에서만큼은 자신 있게 내 일을 끝낼 수 있다면,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다른 영역은 다른 사람에게 외주를 주면 된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손을 댔다가 하청에 하청에 하청을 주게 되면 돈은 돈대로 나가고 일은 일대로 망가지는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회사에서는 부서나 직책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만, 프리랜서로 있다 보면 덜컥 전체를 받아버리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역을 아는 것이 프로다운 자세라는 걸 잊지 말자.


내 작업의 수준과 일정, 페이

내가 하는 작업의 수준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업계 상위권인지, 중위권인지, 하위권인지. 상위권인 사람이 능력이 좋다고 싸게 일을 하는 것은 시장교란이자 골목상권 침해인 셈이고, 하위권인 사람이 비싸게 받으려 한다면 그건 사기꾼인 셈이다. 서로의 영역에서, 서로에게 걸맞은 일을 받아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러려면 내 위치를 알아야 한다. 무턱대고 비싸게, 혹은 싸게 받아선 안된다. 플래시도 그랬고 영상업계도 그랬지만, 진입이 쉬워지고 관련 학과 졸업생이 쏟아지면서 가격이 엄청 다운되는 파도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수준을 잘 알고 가격을 잘 정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도 살아남는다. 또 내 작업 수준을 알고 일정을 정확히 체크할 줄 알아야 한다. 프리랜서는 일정을 체크하고 압박해 줄 사람이 없다. 스스로 체크해야 한다. 일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마감을 맞추지 못하는 프리랜서는, 프리랜서의 자격이 없다.




난 몸으로 부딪히며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이런 것이구나 슬슬 깨닫고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작업을 오래 하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일들을 겪게 된다. 어느 날 나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누가 알았을까? 나를 그렇게 갉아먹으며 전직시켜주지 않으려 했던 회사에게서 외주 의뢰가 들어올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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