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시모프 Sep 01. 2021

회사를 옮기려 하다니, 군대 가고싶어?

산업기능요원의 직장 옮기기 프로젝트

"꿇어!"


그날은 사장이 화사 마당에, 산업기능요원들을 집합시키고 무릎을 꿇게 했었다. 솔직히 무슨 일로 그런 집합을 한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점심시간에 회사 마당에서 직원들이 족구를 했던 거 같은데. 이 어이없는 군기잡기에 벙쪄 들어왔을 때, 내 후임으로 들어온 산업기능요원 친구에게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산업기능요원의 월급을 일반직원과 차이 없이 주는 회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직원만 60명이 되는 회사에, 산업기능요원 등의 T.O. 도 더 많고, 심지어 야근이 있기는 해도 회사에서 자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날 같은 말도 안 되는 군기잡기는 더더욱 없고. 사실 사장은 그날 말고도 본인이 화가 나면 물건을 던지거나 깨부수기도 하고, 감시탑 같은 사방이 뚫린 사장실에서 직원들을 내내 감시하기도 했으니, 여기서 계속 다녀야 하는 나는 깊은 절망에 우울해져 있을 때였다.


친구의 얘기를 들은 나는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다닌 회사는 전부 박봉에 회사를 집처럼 여기는 곳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곳은 대기업이나 가능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월급에, 매번 계속되는 야근에 출퇴근이 힘들어져 회사 근처로 고시원을 잡고 생활했기 때문에 생활비가 많이 쪼들리던 터였다. 당시에 연애도 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연애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산업기능요원의 전직에 관한 법을 병무청에서 찾아보았다.


*승인전직
-산업기능요원 1년 이상 병역지정업체 근무한 경우(현재는 6개월이다)
-방위산업물자의 생산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와 연구분야 또는 생산설비의 폐쇄·이전·축소 등으로 병역지정업체의 해당분야에 근무할 수 없는 부득이한 사유가 발생한 경우
-근무 중인 병역지정업체가 경영악화 등으로 통산 3월 이상 임금이 체불된 경우 또는 휴업하거나 영업정지처분을 받은 경우
-병역지정업체에서 해고된 사람이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하거나 법원에 해고의 효력을 다투는 소송을 제기하여 그 결과 해고가 위법하거나 부당하다고 확정된 경우
-병역지정업체의 장의 지시로 부득이하게 위반행위를 한 사람이 그 사실을 신고한 경우(전직은 신고자의 경우만 해당)



즉, 나는 1년 6개월 이상 근무했으므로 업체의 승인을 받으면 전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산업기능요원과 전문연구요원이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승인전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이유는, 업체들이 요원들을 과도하게 부려먹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업체가 요원 평가에 대해 제대로 복무하지 않았다고 하면, 남은 기간을 복무기간으로 환산해 군대에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쉬운 말로 하면, 사장에게 밉보이면 군대에 끌려가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울며 겨자 먹기로, 최저임금 수준의 연봉에 야근을 밥먹듯이 하며 부려 먹히는 요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요원을 사람처럼 대해주는 업체가 있다는 소식에, 나는 더 이상 이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졌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가 않았다. 일단 '당연 전직' 대상이 되는, 업체가 망하거나 임금을 연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사를 다니는 동안 업체를 알아보고 면접을 봐야 했다. 난 친구에게 그곳에 자리가 있느냐고 물었고, 마침 T.O. 가 있다고 했다. 친구는 수시로 구인받는 메일이 있으니 이력서를 넣어보라 했다. 워낙 좋은 회사라 실력 좋은 지원자들도 많아서 인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지원 메일을 넣었더니, 한번 면접을 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난 일단, 월차를 내고 친구가 말한 회사에 가서 면접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청담동에 있던 그 회사는 당시 업계에서 1,2위를 다툴 정도로 유명한 회사였고, 직원들에 대한 처우도 좋았다. 그리고 직원들도 젊고 활기찬 것이, '벤처기업'하면 떠오르는 그런 진취적이고 젊고 활기찬 그런 느낌이었다. 포폴을 보여주며 면접을 보는 동안, 꼭 이곳에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점점 강해졌다. 그 회사에서는 내 포트폴리오와 경력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지금 있는 회사의 부당한 대우들에 대해서도 무척 공감했다. 하지만 자신들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니, 2주 안에 승인을 받아오라고 했다. 일단 합격한 것이었다!


하지만 돌아와서도, 회사를 옮긴다고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단 지금 다니는 사장에게 전직 사유서를 보내야 했다. 역시나 그날도 야근을 했고, 새벽이 되어서야 일을 끝내고 충혈된 눈으로 장문의 전직 사유서를 썼다.



사유서를 써 놓고, 먼저 산업기능요원 선배들에게 상담을 했다. 그런데 이 회사가 만들어지고 전직을 한 사례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도 옮기려 했었지만 사장이 협박 아닌 협박을 해서 그만두게 되었다고. 그래도 할 수 있으면 빨리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라고 응원해 주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다른 팀 팀장과, 사수에게도 전했다. 하지만 둘의 반응은 달랐다. 다른 팀 팀장은 웃으면서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만 좋은 곳에 갈 수 있으면 가는 게 좋겠다는 입장이었고, 사수는 그냥 웃으며 할  있으면 해 봐, 하지만 사장이 안 보내줄걸- 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회사가 이렇게 바쁜데 네가 그만두면 되냐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사장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괘씸죄로 나를 군대에 보내버릴 것을 예상해야 했다. 많은 산업기능요원들은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고, 또 회사에 찍히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굳이 전직을 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직은 산업기능요원의 당연한 권리다. 1년이 지나면 전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당한 대우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병역특례업체에서는 산업기능요원의 근태 보고서를 불량으로 제출하면 언제든 군대에 끌려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난 그만큼 절박했고, 당당했으며, 나 혼자 죽을 생각은 없었다.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무기가 있어야 했다.


일단 나는 야근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밤에 작업을 한 것이 당연한 메신저나 메일, 파일 자료들을 모았다. 하지만 법으로는 불법이어도 야근 가지고는 치명타를 줄 수가 없는 시절이었다. 그러다 난 내 월급명세서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4대 보험이 월급에 비해 좀 많다고 느껴졌다. 조사를 해 보니, 국민연금을 내가 100%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원래 국민연금은 업체와 근로자가 50%씩 부담해서 내야 한다. 그런데 난 내 연봉의 두배를 내고 있었다. 사장은 원래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교회를 착실히 다니고 계신 경리팀 이사님을 나쁘게는 생각 안 했는데 여기에서 완전히 깼다. 이건 명백히 불법이었고, 내 마음은 완전히 굳어졌다.


사업장가입자의 경우 보험료율인 소득의 9%에 해당하는 금액을 본인과 사업장의 사용자가 각각 절반, 즉 4.5%씩 부담하여 매월 사용자가 납부하여야 합니다. 사업장가입자의 연금보험료는 가입자가 개별적으로 납부할 수 없고, 사용자에 의하여 일괄적으로 납부합니다.
<국민연금공단 '사업장가입자의 보험료율' 설명>


난 그 새벽에 전직 사유서를 메일로 사장에게 보냈다. 그 뒤로 집에 와서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 출근했다. 사장이 출근해서 나를 호출하기까지, 정말 길고 긴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사장과 면담을 시작했다. 난 기간이 지났으니 전직을 할 수 있는 요건이 되었고, 나를 원하는 회사도 봐 두었다고 이야기했다. 박봉과 회사 업무환경이 좋지 않아, 더 대우해주는 회사로 가겠다고 했다. 국민연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최후의 카드는 남겨둬야 했으니까. 예상대로, 사장은 고민하는 듯하더니 나를 보낼 수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난 정말로 화가 나는 것을 억누르며, 몸을 떨면서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이야기했다. 가족과 여자 친구 이야기도 하며, 힘든 상황을 말했다. 하지만 사장은 담담하게, 들어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나를 군대에 보내버릴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는 은근한 압박을 했다.


그리고 사수와 면담을 시작했다. 그전까지 사수는 나와 회사에서 굉장히 친밀한 관계였지만, 이날 이후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나는 꼭 회사를 옮겨야겠다고 했고, 사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너밖에 모르네. 네가 지금 나가면 회사에 남은 다른 사람들은 일이 더 많아져. 그리고 산업기능요원이 회사를 옮긴 사례가 생기면 다들 떠나려고 할 거야. 그렇게까지 회사에 피해를 끼치면서 정말 옮겨야겠어?"

"네. 그건 제 권리입니다. 불법이 아니에요."

"... 좋아. 그럼 나는 지금부터 너를 비즈니스 적으로만 대할 거야. 너와 나의 관계는 여기까지야."


난 그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사수는 철저하게 사장의 편이었다. 실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난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서, 난 정확히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했다. 그날부터 사장과 나의 기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자리도 구석으로 옮겨졌다. 조금이라도 내가 근태를 게을리하면 나를 군대에 보내버릴지도 몰랐고, 내 입장에서는 회사가 정해진 시간 외에 야근수당도 주지 않으면서 야근을 시키거나 불법적인 일을 시키거나 부당한 대우를 하면 바로 노동청이나 병무청에 신고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나에겐 아직 말하지 않은 최후의 카드-국민연금 부당징수건이 있었기에 당당할 수 있었다. 엊그제까지 친형처럼 지내던 사수의 싸늘한 시선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2주였다. 그 안에 결정이 나지 않으면, 나머지 1년 6개월을 이런 불편한 상태로 다녀야 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난 정말 꿋꿋하게 칼퇴근을 했다. 정말 웃긴 일이지 않은가? 회사에 대항하는 일이 근로기준법대로 회사를 다니는 것이라니.


1주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사장은 다시 나를 불러, 자신이 졌다고 시인했다. 내가 야근을 하지 않고 버티는 것도, 나를 해고하고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도 모두 회사에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자신이 엄청난 아량을 베푼 양 말하는 것도 굉장히 아니꼬웠지만 어쩌겠나. 나는 이겼고, 회사를 옮기면 그만이었다. 마지막 카드를 손에 쥔 채로, 나는 해냈다!


병무청의 승인을 기다리는 며칠 동안 인수인계를 하고,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전직할 회사에 소식을 전하고, 출근하기 전까지 며칠 조금 쉬었던 것 같다. 그리고, 들뜬 마음으로 청담동으로 출근했다. 뭘 가지러 갈 일이 있어서 한 달 뒤에 회사에 들리니, 회사는 잠시 휴업한다는 공지를 붙이고 잠겨있었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몇 명이 내가 나간 이후에 전직을 하겠다고 했고, 회사는 운영이 힘들어져 잠시 닫았다고 했다. 나는 전혀 안쓰럽지 않았다. 최저임금 수준으로 돈을 주고 고혈을 쥐어짜며 회사를 유지하고 있는 거라면, 그 회사는 운영을 아주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 회사는 일을 하고는 있는 모양이지만 그 후 그 작은 회사가 분리되기도 하고 그때만큼 잘 나가진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회사를 다니거나 클라이언트와 일하는 프리랜서는, 자신이 혹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건 아닌지 알아야 한다. 지금은 아르바이트생들도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각종 미디어 등이나 SNS가 활발하게 도움을 주고 있지만, 당시에는 주변에서 당연한 듯 살고 있으면 나만 유난한 사람이 되는 분위기였다. 지금도 자신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거나 법을 잘 알아보지 않으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대처를 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내가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이 정당한 대우인지, 법적으로 확실하게 알고 일하며 대처하자.


주변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일하는 분위기와 웃는 얼굴에 묻어 흘러가면 안 된다. 자신의 청춘을 그렇게 버리지 말아라.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 더 나은 환경에서 나를 원하는 회사가 어딘가에 있다. 당신은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할 권리가 있다. 계약을 할 때도, 연봉협상을 할 때도, 자신의 권리에 당당해야 한다. 그러려면, 근로기준법 등과 같은 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정말 최소한의 법을 지키지 않고 직원의 고혈로 유지되는 회사들은 지금도 많다. 내 권리를 알면, 나는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다.




새 직장으로 옮긴 나는 연봉은 두배 가까이 올랐으며, 사장의 폭언도 없고 서로 직급이 아닌 닉네임으로 부르는 열린 회사 분위기에 잘 적응하며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제대로 대우받으며 다닌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팀장은 나에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산업기능요원이 업무 외적인 것을 할 수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업무시간 외의 일은 자유였다. 그래서 흔쾌히 수락하고 고작 몇십만 원짜리 일이긴 해도 아는 사람을 통해 작은 외주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직원, 혹은 이전 직장 선배들까지 나에게 조금씩 일을 주기 시작했다. 그동안 죽어라 일을 했던 게 헛되진 않았다. 난 프리랜서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 05화 네 능력이 회사에 알려지면 안 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