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사무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예전에 나를 전직하지 못하게 막았던 사장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내 개인적인 사정을 몰라서 그랬다고. 그런데 그건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그런 게 아닌데? 전직은 원래 요건에 충족하면, 원하면 해줘야 하는 건데. 그런데 사장은 나에게 군대 보낸다고 협박을 했었잖아. 그 차에는 전에 사수였던 형도 옆에 같이 타고 있었는데, 나에게 눈짓을 주었다. 아마 나 대신 뭐라고 말을 해 준 모양이다. 난 그냥 네, 네 하고 말았다. 아직도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는구나.
퇴사하고 몇 년 동안, 일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동안 쌓은 인맥과 노력으로 어느 정도 일을 해 왔었다. 그리고 그동안 그 회사일은 사실 까맣게 잊고 있었고, 그쪽 관련된 사람들과 작업은 조금 하고 있었지만 병역특례 이직 문제로 날 힘들게 하던 사수와 사장이 일을 의뢰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전화를 받고 나서, 한참 동안 고민을 했다. 이 일을 해야 하나? 일정과 페이를 생각하면, 내가 못할 이유는 별로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처지였다.
'이미 마음이 떠난, 불편해진 관계와 일을 다시 해야 하나....'
생각해 보니, 나만 그런 고민을 한 건 아닐 것이었다. 그 사장도 나에게 연락하는 게 불편했겠지만, 지금 계약이 된 일에 가장 잘 맞는 작업자가 나임에는 틀림없었고, 그 일을 맡을 다른 적임자를 당장 구하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림을 직접 그리고 디자인하며 내용을 설명하는 그 어떤 컨텐츠를 빠르게 만들어내는 데는 지금도 이 분야 탑 급이라 생각하니까.
그쪽에서도 많은 고민 끝에 연락을 했을 테니, 서로 작업으로써 Win-win 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돈'이라는 어떤 만화의 대사가 생각이 났다. 내가 프로로써 이 일을 한다면, 이전에 일할 때 감정적으로 상한 일이 있었든 어쨌든 돈을 위해서는 프로처럼 일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하겠다고 했다. 나도 이미 병역특례는 끝난 상황이고, 그쪽에 내가 꿀릴만한 일은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다시 생각해도 저 어설픈 사과는 기분이 좋진 않았다. 사과를 할 거면 상황을 이해하고 사과해야지.
작업 이야기를 들어보니, 짧은 작업기간, 디자인과 애니메이션을 동시에 해야하는 작업등을 보니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았겠다 싶었다. 오죽하면 나에게 연락했을까. 나역시 웃으며 같이 작업했다. 페이는 그냥 그랬다.
이처럼,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 보면 불편한 관계에서 일이 들어오거나 의뢰해야 될 때가 있다. 사실 그런 경우는 상황과 관계에 따라 정도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보통은 크게 다투거나 금전적, 정신적 피해가 컸던 경우가 아니면 다시 웃으며 손을 잡는 경우도 흔하다. 그럴 때 비즈니스 마인드로 일을 위해서 관계를 하다 보면, 더 크게 성장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이건 프리랜서뿐 아니라, 사업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겪어본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직장생활만 하거나 아르바이트만 하다가 뛰어들면 잘 모를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대할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이다.
프리랜서는 불편한 관계라 해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이라면,
충분히 웃으며 비즈니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선은 확실해야 한다.
프리랜서는 대부분 사업자 등록을 하지 않으면 직업 분류상 '일용직 노동자'지만, 분명히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 관계가 중요하고, 그 관계로 일을 확장해 나갈 수 있다. 사소한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일을 완성시키고 확장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일을 끊거나 잇는 선은 단순하게 사람이 싫고 좋고 보다는 다음을 따르는 것이 좋다.
1. 작업 프로세스가 얼마나 안정적이고 체계적인가?
2. 페이는 적절하게 책정되며 제때에 주는가? (계약서를 올바르게 작성하는가?)
3. 앞으로 지속적인 관계 유지가 내 일에 도움이 되는가?
4. 이 일이 나의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신념에 위배되진 않는가?
1. 작업 프로세스는 매우 중요하다. 흔히 이걸 간과하기 쉬운데, 작업 프로세스가 잘 되어있는 업체나 사람은 서로 작업 관련 정보를 주고받을 때 시간과 멘탈이 상당히 절약된다. 피드백을 어떤 방식으로 주는지, 어떤 부분에서 피드백을 주는지 같은 것도 꼼꼼히 생각해 봐야 한다.
2. 계약사항이나 페이는, 프리랜서에게 적절한 책정이 매우 중요하다. 혼자 일하다 보니 가격이 천차만별이기도 하고, 알바 수준으로 퉁쳐 계약해 일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보니 그 수준으로 대하는 업체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분야 사람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를 통하면 일에 대한 적절한 가격 책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말이 달라지거나 날짜를 어긴다면, 그런 신뢰가 없는 업체랑은 별로 다툼이 없었어도 다시 하지 않는 게 좋다.
3. 다 좋아도,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게 그렇게 도움이 안 될 때가 있다. 프리랜서지만 직원으로 등록해서 일을 할 수도 있는데, 일을 많이 주지 않는다면 괜한 부담감만 갖게 된다. 또 서로 일을 주고받고 싶은데 일 자체가 탐탁지 않은 것들이 자꾸 오고 간다면, 이 관계를 할 시간에 다른 관계를 찾아보는 것이 더 낫다.
4. 이건 개인적인 부분인데, 보통 금전적으로 정말 힘든 경우가 아니라면 경험상 그런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포트폴리오로 쓰기에도 적절치 않고, 몰입해서 일을 하기도 힘들다. 별 다른 신념이 없거나, 돈 되는 일이면 다 한다!라는 마음가짐이면 뭐든 할 수 있겠지만, 자기 작업에 어떤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결국 그것이 내 작업물에 드러나고, 서로 반대되는 성향의 작업을 하게 되면 포트폴리오를 보는 클라이언트도 생각이 많아진다. 최소한의 선은 정하고 만들자.
우여곡절 끝에, 이번엔 얼굴 붉히지 않고 작업 끝을 냈다. 하지만 어쩐지 그쪽에서도 나도 다시 일하지 않을 것 같았고 역시나 그랬다. 15년이 넘었는데 그 뒤로 연락한 번 없으니. 하지만 비즈니스적인 마인드에 좀 더 자신감을 가진 나는 조금씩 더 큰 일을 맡아서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예전에 같이 일하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미국에서 꽤 큰 건이 들어온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