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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Apr 06. 2022

감당 못할 일은 하지 마라

큰 일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카시모프, 마이크로소프트 일 해볼래?"


웹에이전시에서 같이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하던 한 친구가, 미국으로 가서 유명 에이전시에 들어가더니 몇 년 후 나에게 저런 제안을 해 왔다. 계속 연락을 하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내가 디자이너들 중에서도 애니메이션에 강하다는 걸 알고 있던 터라 연락을 해 온 것이다.


나는 이미 몇 년 전에도 영화 일 때문에 해외에서 외국인들과 일해본 경험이 있었어서, 나는 흔쾌히 하자고 했다. 작업 내용을 들어보니, 이건 디자인 감각과 애니메이션 감각을 동시에 갖춘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도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첫 맥용 오피스 프로그램 홍보용 배너와 애니메이션. 그동안 삼성이나 LG 등 대기업 작업을 몇 번 해 봤지만 이건 훨씬 크고 중요한 작업이었다.


2008년 처음 나오게 된 맥용 오피스


"웹페이지에 들어가는 그림과 디자인은 다른 사람이 하고, 너는 그걸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거야. 기존의 플래시 애니처럼 딱딱하게 움직이지 말고, 실제 애니메이션처럼 부드럽고 퀄리티 있게 만들었으면 좋겠어."

"음... 그래, 이건 내가 작업할 수 있어. 광고용 배너 애니메이션 4종에 웹 페이지 애니메이션. 이게 다야?"

"아니, 프로젝트가 하나 더 있어. 홍보용 플래시 마이크로 사이트인데, 약 10~20개의 디자인 오브젝트들을 재미있게 애니메이팅 해 주면 돼"


2000년도 후반, 보통 이 정도의 양이면 한국에서는 많이 받아야 400이었다. 그러나 역시 천조국은 천조국인가! 그 녀석은 나에게 파격적인 금액을 제시했다. 1000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 하지만 나는 이미 다른 프로젝트를 두 개나 더 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드라인이 짧지 않았고, 작업자를 한 명 더 두면 무리한 일정은 아니었다. 과연 이것이 돈의 힘인가. 창작욕구가 마구 샘솟았다. 모든 일들이 제대로만 돌아간다면, 다 해낼 수 있었다. 제대로만 돌아간다면 말이다...


기존에 하던 작업 중 한 가지는 핸드폰 UI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이었고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어서 안심하던 차였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애니메이션 용량이 커서 핸드폰 CPU에서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참고로, 당시는 아이폰이 나오기 전이어서 모든 폰은 피쳐폰이었다. 계속해서 용량을 줄이는 작업을 하다가, 마감 일정에 맞춰서 결국엔 에이전시 회사에 불려 가서 플래시로 만든 애니메이션을 GIF로 다시 만드는 일 까지 벌어졌다. 이걸로 며칠은 날아갔다.

당시에는 핸드폰마다 UI가 다 달랐었다.

또 다른 작업은 팀이 모여서 CD-ROM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 디자인에서 계속 가로막혀 일정이 미뤄지고 있었다. 새로 디자이너를 고용해서 작업했더니 이번에는 비트맵 이미지로 만든 메뉴를 전부 벡터 이미지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미국에서는 작업 진행상황을 물어보는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밤을 꼴딱 새 가면서 여차저차 일정은 맞추고 있었다.


일이 안될 때는 한 번에 몰려오나 보다. 그러던 중에 집안에서도 일이 터졌다. 할머니와 새어머니가 크게 싸워서, 이혼한다고 난리가 났고 집안싸움에 나까지 불려 가서 중재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거다. 결국 한밤중에 할머니와 아버지가 동네에 나와서 온갖 집안 치부를 소리치며 싸우는 꼴을 옆에서 내내 들어야 했다. 내일까지 보내줘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도대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결국 일정이 점점 촉박해졌다. 하지만 이건 보통일이 아니라 제품 출시와 맞춰져 있어서 출시 행사, 마켓 홍보 일정 등 나로선 감당할 수 조차 없는 금액과 사람들이 엮인 일이었다. 조절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위약금이 생기면 감당 못할 것도 뻔했지만 위약금 만으로 끝낼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당시 나스닥 시총 2위로, 한참 밑이던 애플과 구글이 각각 아이폰 출시와 안드로이드 프로젝트로 마이크로소프트를 확 따라잡고 있을 때였다. 마이크로소프트로써도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인 셈이다. 난 미련하게도 그제야, 넉넉한 일정과 큰 금액에 담긴 뜻을 알았다. 그것은 질 높은 결과물을, 절대로 마감을 지켜서 내야 하는 것이었다. 마감이 다가올수록 예정보다 결과물을 늦게 줄 수록, 회사도 아닌 고작 일용직 프리랜서인 나는 오금이 저리기 시작했다. 그때 늦은 새벽,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에이전시의 부사장이었다.


내가 개인적인 일들로 일정이 늦어진 것에 대해 버벅거리며 변명을 하니, 변호사를 바꿔주었다. 소송천국인 미국에서 변호사라니... 가슴이 순간 철렁했다. 난 내가 대체 미국 변호사와 영어로 한참이나 무슨 얘길 어떻게 주고받았는지 아직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대화 결론은, 꼭 일정을 맞추고 맞추지 않는다면 큰 일을 치를 것이다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전화를 끊고 잠시 산책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집에도 연락해서 알아서들 해결하라고 했다. 바쁘다고 닥치는 대로 일하던 것들을 정리하고, 중요한 순서대로 정리했다. 다른 미룰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미루면서 결국 마감일을 지켜서 해냈다.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비록 다른 일에서 쓴소리를 들었지만, 그것 역시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그리고 일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그 웹사이트와 애니메이션은 각종 해외 플래시 어워드에서 상을 수상했다.




회사에서 직원에게 일을 줄 때는 팀원의 일정과 노동시간을 보통은 정상적으로 계산해서 준다. 따라서 주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하지만 프리랜서는 영업이나 관리도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에, 돈이나 작업 욕심을 부리다가 일이 틀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프리랜서는 한 프로젝트당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용병 아니던가. 지금 좋은 일이 들어왔을 때 거절하면, 사실 그 클라이언트와 영영 끊기는 일도 다반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일을 다 받으려 해선 안된다.


일에는 어떤 트러블이 생길지 모른다. 모든 일이 물 흐르듯이 흘러가면 좋겠지만, 실제로 프로젝트와 당신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정말 누구에게 말 못 할 말도 안 되는 일로 일정이 어그러질 수도 있다. 그러려면 그것을 완충할 시간을 잡아둬야 한다. 마음에 드는 일, 큰 프로젝트라고 덥석 물지 말고 정말 잘 생각해보라. 보통 클라이언트가 말하는 난이도의 1.5~2배는 어렵다고 생각하면 된다. 클라이언트는 항상 일이 쉽다고 말하며 돈을 깎으려 하니까.


큰 일을 할 때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러니 일정을 항상 넉넉하게 잡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잡아라. 그것이 아니면, 과감하게 거절해라. 과욕이 모든 것을 망친다.


마감이 중요하지 않은 일은 없다. 하지만 마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들도 있기 마련인데 그럴 땐 서로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계약서엔 위약금이 명시되어 있고 계약을 어길 시 어느 법원에서 일을 해결할 지도 명시되어 있다. 단순히 하루 넘길 때마다 몇%로 위약금이 명시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만 물면 되겠지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모든 사업이 그렇지만 프리랜서는 특히 신뢰가 중요하다. 일정을 지키는 것은 프로의 기본자세이자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좋은 일은 한꺼번에 들어온다. 물들어 온다고 함부로 노 젓지 마라. 그러다 노가 부러진다.



마감을 못 지킬 것 같았지만 결국 지켜서 끝내고, 그 일은 성공적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다른 일들을 미뤄두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 작업은 내가 프리랜서들을 고용해서 팀으로 작업을 했는데, 팀원이 말썽이었다. 결국 나도 화가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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