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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May 30. 2022

그대로 베껴주세요

콘셉트와 표절을 구분 못하는 클라이언트

"이 사이트하고 똑같이 만들어 주실 수 있죠?"


오랜만의 홈페이지 디자인& 코딩 작업이기도 했고, 당시엔 일이 좀 안 들어오던 때라 하나라도 하는 게 급했기 때문에 지인의 지인과 작업을 하게 되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 보면 프로젝트 단위로 여러 곳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서로 맘에 드는 회사나 사람과는 일을 계속 같이 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레 인재 풀이 넓어진다. 그러다 보니, 구인 공고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일이 계속해서 들어올 경우가 생긴다. 물론, 일을 잘해야 이어지는 법이지만.


홈페이지 디자인과 코딩은 내가 산업기능요원 시절 많이 했던 작업이다. 하지만 점점 반응형 웹페이지인 HTML5로 옮겨가고 있었으므로, 아마 이쯤이 내가 직접 코딩 작업을 하는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난 반갑기도 해서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난관에 부딪혔다.


처음 회의할 때, 이러이러한 홈페이지처럼 만들어달라고 보여준 예시가 있었다. 텍스트와 파스텔 색으로만 이루어진 아주 깔끔한 사이트였다. 그래서 나는 그런 콘셉트를 가지고 디자인하는 줄 알았다.

대략 이런 느낌의 웹페이지였다.

그런데 만들고 나서 보여주니, 그것이 아니라는 거다. 그냥 똑같이 해달라고 했다. 두 가지의 레퍼런스를 보여주었는데, 하나는 홈페이지의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다 만들고, 하나는 홈페이지 내부의 사진 콘셉트를 그대로 가져다 보정해달라고 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면,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것이 아니었다. 디자인 말고도 예전에 애니메이션으로 영화 예고편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클라이언트는 내가 레퍼런스로 보여준 애니메이션과 똑같이 해달라고 했다. 바로 작년에 만든 한 바이럴 영상에서도, 에이전시에서 나에게 레퍼런스를 보여주며 '똑같이'만들어달라고 했다. 정말 이런 일은 끊이질 않는다.


회사원이 아니라 프리랜서로, 1인 사업자로 일을 시작한 사람들은 자기 작업에 자존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만약 저작권 관련한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에이전시나 클라이언트가 책임져 줄 것인가? 법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더라도 디자이너로써, 작가로서의 자존심은 어떻단 말인가. 내가 일을 하고서도,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포트폴리오에 올리기도 힘들어진다. 그런 일은 보통 그저 계약이나 돈 때문에 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많이 지치게 된다. 남는 것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일거리는 적고 프리랜서는 넘쳐나는 이 시장에서 마냥 내 입맛에 맞는 일을 찾아서 하기도 힘들다.


요새는 폰트나 이미지나 음악을 비교해서 저작권 위반을 잡아내는 AI 기술이 발달했지만, 예전에는 그런 게 없었기 때문에 원작자의 눈에 띄지 않으면 유야무야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대기업도 아니고 작은 업체의 작업은 더욱 그랬다. 어떤 디자인 풍조가 유행하기 시작하면, 그 디자인과 유사한 디자인을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캡처해서 가져다 쓰는 경우들이 더러 있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홈페이지의 막대 부분 디자인을 하는데, 애플의 맥 OS에 나오는 상태 바가 예쁘니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하길래 시안에 맥 OS를 그대로 캡처해서 늘려서 만들었더니 아주 흡족해했었다. 이럴 땐 정말,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멘탈이 부서진다.



그럼 이렇게 클라이언트가 '베껴주세요'와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어떻게 할까? 보통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는 클라이언트들은, 악의적인 마음으로 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대부분 저작권에 관해 무지해서 그렇다. 그러므로 다음처럼 해 보자.


1. 최대한 비슷하지만 레퍼런스에 뒤떨어지지 않는 결과물을 제시한다.

2. 계약서 작성 전이라면, 저작권 위반 시 누구에게 책임이 가는지 아닌지 확인한다.

3. 저작권 책임이 본인에게 있는 계약서 작성 후라면, 저작권 위반 사항을 떠넘기는 행위에 대해 상기시키고 베끼는 것을 정중히 거절한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이처럼 순순히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고 마감이 다가오는데 저런 요구를 할 때도 있고, 자주 일한 곳이라 친분이 있어서 계약서를 안 쓰고 할 수도 있다. 거절하기 어려운 성격일 수도 있고, 정말 '이 정도는 뭐 어때'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하도 일에 지친 데다 하도 윗선의 요구가 강력하니, 그럴 수밖에 없던 적도 있다. 내 경력이 적으면 더 그렇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나중에 내 포트폴리오를 좋은 것들로 채우기 위해서는 되도록 남들에게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하자. 저작권 문제를 상기시키면서 요새는 문제가 크게 된다고 상기시키자.


프리랜서에게 법적인 문제가 생기면, 도와줄 사람은 없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홈페이지 만드는 일은 그것으로 일단락되었고, 나는 홈페이지 관련 작업은 이제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페이에 비해 작업해야 할 양도 많고, 사람에 따라서는 계약에 없는 사후관리까지 어느 정도 해줘야 할 일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고 다음 일을 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또 계약 관련 다른 일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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