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말, 초고속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본격적인 IT시대가 열렸다. 모뎀을 이용한 PC통신을 뒤로하고, 웹 브라우저를 이용한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 www) 시대가 온 것이다. 2000년에 일을 시작한 나는, 초고속 인터넷이라고는 하지만 속도가 현저하게 느린 인터넷 속도에 빠르게 다운로드할 수 있는 매크로미디어의 FLASH를 이용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작업을 했었다. 보통 짧은 3분짜리 애니메이션이라도 avi, mov 등으로 받으려면 용량이 커서 시간이 걸렸고, 스트리밍 포맷이던 윈도우 미디어 비디오(wmv)는 화질과 음질이 너무 떨어졌었다. 당시에는 지금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는 mp4 포맷도 없었고, 유튜브 같은 대형 동영상 플랫폼도 없었다.
그래서 플래시로 누구는 웹사이트를 예술적으로 꾸미기도 하고, 누구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도 했다. 특히 인터넷의 보급과 더불어서 플래시 웹사이트의 발전은 아주 두드러졌는데, 기존의 html로 만들어진 웹디자인은 너무나 정적이고 촌스러웠던 반면 플래시 웹사이트는 만들기에 따라 디자인의 제약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플래시 웹사이트로 가장 혁신적이었던 사이트 중 하나는 EYE4U 사이트, 모션그래픽으로 혁신을 이끈 사람은 힐만 커티스, 애니메이션으로 혁신을 이끈 사람은 조카툰 등이 있다.
국내에도 졸라맨이나 엽기토끼 등 수많은 인기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등장하면서, 플래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많은 IT기업들이 뛰어들어 플래시 애니메이션, 플래시 웹 에이전시 회사를 차렸다. 이후 플래시에는 다양한 기능들이 추가되면서, 웹 브라우저에서 동영상 스트리밍 플레이어가 되거나, 자바스크립트와의 연동으로 플래시 게시판 등 많은 분야에 사용되었다. 2010년대 초기까지는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IT 신제품이나 새 영화가 나오면 홍보용 플래시 마이크로사이트는 무조건 제작했다. 플래시로 된 웹사이트 하나 없으면 시대에 뒤떨어져 보였으니까.
플래시 퇴출!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플래시도 스티브 잡스가 CPU 점유율을 너무 잡아먹고, 보안에 문제가 있다며 아이패드, 아이폰에서 플래시를 금지시키며 무너졌다. 스티브 잡스는 미래의 웹사이트는 html5라며, 그것을 밀기 시작한다. 물론 당시에 플래시 제작사인 어도비와 애플 간에 사이가 좋지 않기도 했지만, 플래시에 분명 문제는 있었다.
플래시는 인터넷 초창기에 인터넷 속도가 느렸을 때, 벡터 연산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획기적으로 용량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비트맵 이미지가 가로세로 300픽셀이라면, 총 90000픽셀의 색상을 하나하나 지정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벡터 이미지는 그와 다르게 선과 색을 수식으로 연산해서 넣는다. 따라서 벡터 이미지를 이용한 플래시는, 용량은 적지만 CPU 점유율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젠 인터넷 속도가 고화질의 동영상을 스트리밍 할 수 있을 정도로 빨라졌고, MP4라는 좋은 영상 압축기술도 나왔고, HTML5라는 움직임을 자유롭게 줄 수 있는 웹사이트 스크립트도 나왔기 때문에 굳이 플래시를 쓸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아이폰 같은 모바일 기기의 발전이 한몫했다. 모바일은 PC에 비해 배터리와 연산이 떨어지는데, 플래시를 적용하면 발열도 심하고 배터리도 빨리 닳으며 심하게 느려지게 된다. 그래서 유튜브 같은 동영상 사이트의 플레이어도 원래는 플래시였다가, 전부 바뀌게 된다. 결국 맥과 윈도우에서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플래시로 먹고살던 사람들은 이제 다른 길을 찾는다. 지금은 FLASH라는 툴이 ANIMATE라는 툴로 바뀌었고, 아예 애니메이션을 영상으로 뽑도록 특화되어있다. 그나마 플래시가 초창기에 매크로미디어에서 어도비에 인수된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애프터 이펙트와 프리미어와 같이 연동되게 되었으니까.
IT업계는 플랫폼과 툴이 변화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내가 5년 전에 배웠던 기술이 지금은 전혀 쓸모없게 될 수도 있고, 5년 전에 흥했던 플랫폼이 지금은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상황을 20년째 겪으면서, 플래시 애니메이션에서 CD-ROM 타이틀로, 애프터 이펙트를 이용한 모션그래픽으로 계속해서 공부하고 달라져왔다. 그때그때 일을 하며 페이를 받고 살았지만, 지나고 보니 내 작업들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제는 PC에 CD-ROM자체가 없이 나온다. 플래시 웹사이트가 리뉴얼되는 건 기본이고, 아예 이젠 플래시 자체를 지원하지 않는다. 내가 참여한 웹사이트가 전 세계의 웹사이트 중에서 상을 주는 FWA(Favorite Website Awards)에서 상을 받을 때만 해도 대부분의 사이트는 플래시였다. 이제 그 사이트가 무엇이었는지 검색도 힘들고, 그 당시의 온전한 모습으로 웹사이트를 볼 수도 없다. 웹 브라우저에서 볼 수 없으므로 캡처된 영상으로만 존재한다. 또 벤처기업 작업들은 수시로 회사가 망하거나, 보안의 이유로 포트폴리오에 올리지 못하는 일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심지어, 원본 작업 파일도 작업한 프로그램 자체가 업데이트되거나 사라져 버려 열 수 없게 된 경우도 있다. 영상으로 만들었어도 홍보용 영상은 곧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업계에서 살아남는 것은 둘째 치고, 작업물들이 사라져 가는 것은 창작자로서 마음 한쪽이 쓰린 일이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발자취가 아닌가. 게다가 지금의 인스타그램, 유튜브나 behance처럼 포트폴리오를 정리할 수 있는 플랫폼이 없거나 클라우드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에는 하드디스크가 날아가면 없어지는 것이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겐 포트폴리오가 모든 것이다. 내 포트폴리오를 어떤 방식으로 정리하고 보여줄지, 작업할 때부터 염두해둬야 한다. 지금 작업하는 플랫폼이 사라지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남겨놓는 작업은 아주 중요하다.
1. 작업의 결과물을 최대한 보편적인 포맷으로 남겨 놓는다. 이미지라면 bmp, jpg, png 등, 영상이라면 avi, mov, mp4, 음악이라면 wav, mp3, 등.
2. 작업물을 하드디스크나 CD에만 남기지 말고, 반드시 클라우드를 이용해 백업한다.
3. 활성화된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이용해 보기 쉽게 모아놓는다. 현재는 인스타그램, 유튜브, behance 등이 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계의 변화를 인지하고 새로운 툴을 익히는 것에 주저하지 말자.
내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내 작업물들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클라이언트한테 제안할 포트폴리오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살아온 삶이 어땠는지 찾아보기도 힘들어진다. 타인이 볼 때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였을지라도, 나에겐 굉장히 소중한 자식 같은 존재들 아닌가. 지금의 플랫폼이나 포맷이 영원할 거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보편적인 방법으로 백업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