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당신 책임이야
젊은 프리랜서가 당하는 계약 문제
"카시모프 씨, 이거 위약금 물어야 하는 거 아시죠?"
프리랜서를 하다 보면, 작업이 없이 붕 뜨는 기간이 생긴다. 어쩔 때는 너무 바빠서 눈물을 머금고 작업을 할 수 없다는 메일을 보내야 할 때도 있고, 일이 다 끝났는데도 다음 작업이 없어서 준비기간만 있는 시간 말이다. 그게 자발적인 휴가면 좋겠지만, 프리랜서에게 그다음 작업이라는 게 항상 확정이 안되어있기 때문에 그 기간은 쉬는 게 아니라 포트폴리오를 만들던지, 작업을 따내기 위해 제안서를 만들고 고군분투하는 기간이 된다. 그러던 중, 평소와 다르게 생각보다 어렵게 작업을 따낸 일이 있었다.
그 작업은 온라인 교육을 위한 이러닝 애니메이션이었다. 콘셉트도 내용도 성우 녹음 등 전부 클라이언트 측에서 준비해주고, 나는 작화와 애니메이션만 해 주면 되었다. 이런 일은 보통 퀄리티나 내용이 마음에 다 드는 일은 아니지만, 속은 편하다. 내용이나 연출을 신경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포트폴리오로 내보이기 힘든 경우도 많아서, 조금 아쉬울 때도 있긴 하다. 내용은 인기 방송을 패러디해서 어떤 내용을 교육하는 이러닝이었는데, 그렇게 하는 기획 자체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가 기획한 일은 아니니까.
프리랜서라는 직종에 뛰어든 사람들은 영업을 스스로 해야 하는데, 프리랜서 성향을 가진 작업자들은 대부분 돈문제에 소극적인 소위 '작가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페이 문제에 있어서도, 계약서 작성에 있어서도 그냥 좋은 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여지가 많다. 그래서 프리랜서는 정석대로 계약서를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정이 너무 바쁘다거나, 페이가 너무 소액이라거나. 하지만 어지간한 일은 정확하게 계약을 하는 것이 좋고, 정 안된다면 구두로 주고받은 것보다는 메일이나 문자로 페이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 좋다. 페이와 계약은 정말 중요하다.
이번에 따낸 일 역시, 굉장히 일정이 촉박한 작업이었다. 계약하러 회사에 갔더니 그곳은 허름하고 오래된 사무실이었고, 좀 나이 든 분이 사장이었다. 분명 다른 일들을 하다가, 바뀌어가는 트렌드를 따라서 이러닝 부서를 만든 것이 역력했다. 기획조차도 예스러웠으니까. 거기에서 계약을 맺으면서, 나는 웃으며 서글서글 좋은 사람 이미지를 보여줬다. 네, 괜찮아요.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시겠죠. 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작업이 시작되고, 내가 만든 캐릭터와 파일을 주고받으면서 피드백이 생겼다. 나는 이미 다른 여타 작업자들이 하지 못하는 속도로 열심히 작업 중이었는데, 그런 나조차 따라잡기 힘든 일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작업은 시간이 촉박하니 중간중간 피드백을 받기보다는 한 번에 끝내고 피드백을 한 번에 받는 게 더 좋았지만, 그쪽 입장에서도 나와 처음 작업을 하니 영 못 미더웠나 보다. 그러면서 일정은 조금씩 밀리고, 결국 그쪽에서 작업해서 줘야 할 것들이 늦어지면서 내가 완성하는 게 며칠 미뤄지게 되었다. 이러닝은 보통 다른 회사에서 교육 일정이 잡혀있어 런칭 날짜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감이 늦어지면 사고가 난다.
그쪽 회사에서는 나를 계속 다그쳤고, 나는 계약 마감에는 며칠 밀리긴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실제 런칭 날짜에는 맞출 수 있었다. 그러던 다음날, 클라이언트에서 연락이 왔다. 나의 귀책사유로 마감이 늦어졌으니, 계약서에 적힌 대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감을 아슬아슬하게 맞추거나 조금 밀렸어도 여태 그런 위약금은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난 계약서를 찾아보았다. 계약서에 적힌 대로라면 난 계약금의 대부분을 다시 돌려줘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난 이미 그 전 일이 없던 기간에 쓴 카드값을 갚느라 수중엔 돈이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듣다 보니, 클라이언트의 태도가 정말 너무했다.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취급을 하면서,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게 역력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일이 늦어진 것에는 나 혼자 잘못한 게 아니었다. 중간중간 피드백이 자주 일어나는 작업 방식에 문제가 있었고, 그쪽에서 나에게 보내줬어야 할 소스들이 늦어진 것도 큰 이유였다. 그걸 그 시간에 주고 나더러 남은 시간에 만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 사기에 가까운 거였다. 그제야 감이 왔다. 이것들이 날 힘없고 멋모르는 프리랜서로 보고 털어먹으려 하는구나. 난 당장 그전에 헐렁하게 입었던 옷과 다르게, 옷을 갖춰 입고 가고 모자도 벗었다. 당시엔 머리를 삭발한 상태여서 부드럽게 보이려고 모자를 쓰고 갔었는데, 삭발한 상태 그대로 사고 칠 것 같은 분위기 잡으며 클라이언트 사무실에 쳐들어갔다. "사장님 오시라고 해요"
대략 이런 마음가짐이었다
사장과 팀장이 와서는, 달라진 내 분위기에 태도가 금방 달라졌다. 그전에는 꼬투리 하나라도 잡아서 계약서를 들먹이며 남은 돈을 못주고 받은 돈도 토해내야 한다고 윽박지르고 겁주더니, 강하게 치고 나가니까 그제야 꼬리를 내리는 것이다. 난 오히려 그쪽 잘못으로 계약이 잘못된 거 아니냐, 나에게 협박까지 하는 거냐, 노동부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사장은 전에 듣지 못한 부드러운 말투로, 다음에 더 좋은 작업을 같이 할 테니 이 일은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잔금을 받고 마무리하는 걸로 하자고 나를 다독였다. 사실 나라고 이 회사와 일을 더 하고 싶겠는가. 그냥 피해받지 않는 선이면 되었다. 난 고민하다가 그러자고 했다. 물론, 그 뒤로 그 회사에서 두 번 다시 연락은 없었다.
프리랜서는 혼자다 보니, 분명 정당하게 일을 했는데도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가 종종 있다. 특히 어리숙해 보이면 문제가 생겼을 때 잘못을 떠안아버리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계약서를 쓸 때, 바로 회사에 가서 계약서를 처음 받아보고 사인하지 말고, 계약의 내용 중 페이 지급 관련이나 위약 관련, 저작권 관련해서 내가 부당한 피해를 입지 않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는 부당하게 대하지는 않지만, 별 다른 일 없겠지- 하고 나이브하게 생각하다가는 큰코다친다.
1. 계약서는 반드시 계약 작성 전에 문서로 받아보고 문구를 확인한다.
2. 소액이고 계약서까지 쓰는 게 불편하면 반드시 메일이나 채팅으로 페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둔다.
3. 계약서를 쓸 때, 어리숙해 보이면 안 된다. 일을 잘할 것 같은 이미지와, 어리숙한 이미지는 다르다.
4. 책임을 떠넘긴다면 어리숙하게 당하지 말고, 침착하게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아본다.
프리랜서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고독한 싸움이다. 클라이언트는 나의 파트너이기도 하지만, 사회는 냉혹한 법이고 어디에나 나를 물어뜯을 수 있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조금만 약해 보이면 어제는 친구였던 사람들에게 공격당하기 일수다. 일만 잘하면 됐지 라는 생각으로는 내 작업, 내 브랜드를 지키기 힘들다. 언제나 투사의 마음가짐으로 용기 있게 대처해야 한다.
우여곡절도 많은 프리랜서 생활도 벌써 10년, 20년이 흘러갔다. 그러는 중에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계속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생기며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아쉬운 것은 내 작업물들이었다. 작업물들은 어느새,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플랫폼이 변화하며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