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위. 그는 누구인가.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서 꽃미남 포스를 풀풀 풍기는 경찰로 나와 특유의 로맨스를 제대로 보여준 배우. 그는 우수에 찬 눈빛 덕분에 항상 애절한 사랑을 담고 있는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다. 그가 나오는 캐릭터는 대부분 슬픈 사랑이다.
<샹치: 텐 링즈의 전설>은 마블의 새로운 페이즈를 여는 작품으로, 많은 사람의 우려 속에 개봉했다. 우선 주인공인 샹치 역에 시무 리우가 과연 어울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에서 한국 교포로 나오던 그는, 친근한 옆집 아시아인(?) 같은 이미지였다. 외모도 비호감까진 아니지만 잘생겼다고 하긴 힘든 평범한 배우. 하지만 원작의 샹치는 원래 이소룡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라, 상당히 날렵한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중국 무술을 모티브로 한 미국 영화가 과연 제대로 만들어질까 하는 항상 당연한 우려다. 홍콩 반환 이후에 배우뿐 아니라 영화 스텝들도 대거 미국으로 진출했는데, 당시 무술감독 등도 많이 진출했었다. 매트릭스의 무술감독인 원화평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후 원화평은 와호장룡, 킬빌 등에서 무술감독을 하게 된다. 하지만, 매트릭스를 보면 서양인의 무술은 어딘지 느리고 힘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중국 무술의 근본인 '발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움직임이 많아 아쉬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주인공 샹치가 채워주지 못하는 아름다운 아시아인의 로맨스와 서사를 모조리 양조위가 채워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조위는 늙어서도 양조위다. 영화가 끝나고 더 궁금한 것은 '그래서 텐 링즈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가 아니라, '양조위가 지난 1000년 동안 뭐하고 살았나?'였다. 별다른 설명 없이 양조위가 텐 링즈를 달고 등장한 모습으로 영화가 시작되는데, 약 1000년 전이라고만 나온다. 1000년 전이면 송나라가 만들어질 때인데, 딱히 어느 왕인지 어느 시대에 뭘 했는지 특정되지 않았다. 궁금해... 난 웬우가 궁금하다!
마블은 웬우(양조위)의 전설을 내놓아라
그동안 많은 홍콩 무술감독들이 할리우드 영화를 맡아와서, 마블도 그렇지만 헐리우드 무술이 정말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중국 무술이 주는 그 티키타카의 묘미, 발경, 멋짐 폭발 등은 제대로 마음먹고 보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요새는 무술 자체보다는 캐릭터의 이야기나 CG에 더 공을 들이니까. 하지만 샹치는, 그가 처음 버스에서 보여주는 '지르기' 하나로 모든 것을 불식시켰다. 그간 중국 영화를 비롯해 엽문 등에서나 조금 볼 수 있었던 중국 무술의 발경을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발경이 진짜냐 아니냐는 논하지 않겠다. 어디까지나 중국 영화 속의 중국 무술에 대한 이야기니까) 그리고 버스 안에서의 격투신이나, 빌딩 건설 지지대에서의 전투를 보면 마치 젊은 시절 성룡이 돌아온 듯 정말 재치 있고 가슴을 졸이는 액션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의 무술감독은 성룡의 <빅 타임>이라는 영화에서 정말 멋진 호흡으로 성룡과 대결을 펼쳤던 브래드 앨런이었다. 브래드 앨런은 성룡이 발탁한 스턴트맨이자 무술감독으로, 어릴 때부터 가라데, 태권도, 우슈 등 각종 무술을 섭렵한 대단한 실력자였다. 할리우드로 가서 활동도 많이 해서, 그가 참여한 알만한 영화로는 <에라곤> <퍼시픽 림> <킹스맨> 등이 있다. 하지만 그는 올 8월에 세상을 떠났고 성룡이 그 소식을 전했다. 향년 48세. <샹치:텐 링즈의 전설>은 그의 유작이다. 아래는 성룡의 <빅 타임>에 나왔던 모습. 굉장히 매너 있는 격투 장면으로 신선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그는 샹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격투신을 가장 공들였다고 했다. 둘이 싸우다가 사랑에 빠져야 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양조위와 진법란의 이 격투씬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데, 우선 양조위가 하는 권법은 '홍가 철선권'이다. 홍가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황비홍이 전한 홍콩의 대표적인 권법이고, 철선권은 원래 다른 문파였으나 황비홍이 편입시켰다. 철선권은 폭발적인 발경으로 유명한데, 손목에 무거운 링을 달고 수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쿵푸허슬의 옷가게 아저씨가 링을 똑같이 달고 무술을 하는데 바로 홍가철선권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텐 링즈 무술의 모티브다.
홍가권은 남방계 무술답게 직선적인 힘을 위주로 하는 무술이고, 그 무술을 쓰는 웬우(양조위)의 성품과도 딱 맞아떨어지는 무술이다. 그러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장 난은, 물론 설정상 <용의 신비한 힘>을 받았다고 되어있지만 태극권을 사용한다. 태극권은 음양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무술로, 원으로 움직이며 적의 힘을 받아넘기는 <화경>을 중요시한다. 다른 무술영화나 만화에서 보면 직선적인 힘의 공격에 대항해 원의 태극권으로 맞서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용의 힘을 받은 그녀는 내공이 훨씬 높았으므로, 그의 힘을 흘려보내 그대로 그를 제압한다.
이 장면에서 동양사상의 중요한 원리인 음양의 조화를 볼 수 있는데, 그동안 웬우가 권력만을 탐하고 아무도 곁에 두지 않았던 것은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한쪽 기운만 너무 강한 삶이었다. 그러다 난을 만나, 비로소 음양의 조화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건 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급작스런 전개에 설득력을 주는 건 역시 양조위다. 양조위가 아니면 그 모든 연출과 눈빛이 우습게 보였을 것이다. 난을 연기한 진법란의 남편은 영화를 보고, '내 아내도 나를 저렇게 바라봐 줬으면...'하고 SNS에 넋두리 하자 사람들이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전 세계 누구나 양조위를 바라볼 때는 저런 눈빛이 됩니다.'라는 위로 글들이 달렸다고...
물론 이러한 면에서 샹치는 재미있다.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다.
우선, 겉핥기 식 동양에 대한 이해다. 무술 자체를 홍가권과 태극권으로 조화를 살리고 성룡이 돌아온 듯한 스트릿 액션은 정말 볼만했다. 하지만 난이 싸울 때 격투준비 자세를 잡는데, 그것은 태극권의 '단편'이라는 기술로, 그 자세 자체가 태극을 상징하기 때문에 태극권의 상징과도 같은 자세긴 하지만 격투 준비자세는 아니다. 그 자세 자체가 하나의 격투 초식으로 초식을 마무리 한 자세인 셈인데, 예를 들자면 태권도에서 정권지르기를 하고 팔을 뻗은 그 자세 그대로 싸우려고 대기 중인 거랑 같다. 격투 준비자세는 다른 권투나 격투기와 비슷한 자세다. 그런데 그냥 멋 부리려고 초식의 마무리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영 거슬렸다. 뭐, 웬우를 도발하는 뜻으로 그렇게 했다면 모르지만 그런 거 같지는 않다. 태극권의 진수인 '전사(몸흔들기)', '진각(발로 땅을 강하게 밟기)'등은 무시했어도 그건 그냥 그렇다 치자.
중국의 무술, 쿵푸는 단순한 격투기법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사부 : 영춘권 마스터 리뷰>인 쿵푸란 무엇인가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한번쯤 보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뒷부분에 나오는 '절대 악'의 개념이다. 후반부에는 마치 반지의 제왕에나 나올법한 서양 고전동화식 악의 개념이 들어오고 동양의 용과 서양의 용이 합쳐지며 이상한 짬뽕 철학이 되었다. 얕아도 너무 얕다. 애초에 샹치라는 캐릭터가 이소룡을 오마주한 오리엔탈리즘을 마구 내뿜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동양 사상을 너무 얕게 차용한 점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 거기에 기독교적인 선과악 개념이 섞여버리니 유치해지긴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마블은 북유럽 신화나 그리스 신화도 마음대로 가볍게 채용하니까 상관없는 걸지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블이 가진 스토리의 힘은 대단하다. 중간중간 나오는 다른 마블 캐릭터들이나, 쿠키영상에 나오는 시리즈와의 연결성은 그 재미를 배가시켜준다. 아이언맨이 죽고 어떻게 그 허탈함을 달랠지 우려했던 팬들은, 아마 이 정도면 성공적으로 새로운 페이즈를 시작하기에 괜찮은 작품이었다고 어느정도 느낄 것이다. 마블이라는 거대한 세계관에 꽤 크게 차지한 중국 캐릭터이니, 시무 리우도, 양조위도 양자경도, 중국 무술을 제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이 영화는 양조위가 보내는 중국무술영화의 전설의 마지막이자, 앞으로 시작될 마블에서의 중국무술의 전설을 알리는 영화인 셈이다. 앞으로 한국 캐릭터인 아마데우스 조(헐크)나 실크(여자 스파이더맨) 등이 실사화 된다면 완벽한 고증보다는 조금 열린 마음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 영화와 인문학을 접목한 저의 브런치북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도 재미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