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시모프 May 27. 2022

<뜨거운 녀석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란 무엇인가

범죄율 0%의 평화로운 마을의 비밀

"자네는 범인 검거율이 다른 경관에 비해 400%나 높아. 혼자서 날뛰는 보안관은 곤란해. 자네를 이대로 두면 계속해서 성과를 올리겠지. 그건 절대로 안 되네. 우리 모두 실업자가 될 거야."


범인은 무조건 잡는 원칙밖에 모르는 니콜라스 엔젤(사이먼 페그) 경장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글로스터셔 샌드포드'라는 외진 시골마을로 경사로 강제 발령을 받는다. 그 마을은 '올해의 마을상'을 받을 정도로 아주 한적하고 예쁜 곳. 아무런 범죄도 없는 곳이다. 그곳에서 니콜라스는 살인사건으로 보이는 사고들과 마주한다.


영화 <뜨거운 녀석들 (Hot Fuzz, 2007)>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코르네토 트릴로지>라고 불리는 3편의 영화 중 2편에 해당한다.  <코르네토 트릴로지>란 3편의 영화가 각각 독립적이지만 모아놓고 보면 서로 의미가 연결되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연작 <블루>, <화이트>, <레드>를 패러디한 것이다. 코르네토는 실제 유명 콘 아이스크림 브랜드로 <피와 아이스크림의 3부작>으로도 불린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Dawn of the Dead, 2004)>, <뜨거운 녀석들 (Hot Fuzz, 2007)>, <지구가 끝장나는 날 (The World's End, 2013)>이 그것이다. <피와 아이스크림의 3부작>이라는 이름답게, 피가 난무하는 호러 코미디 장르의 영화들이며 코르네토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각각 딸기맛, 바닐라맛, 민트맛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패러디 영화나 호러 코미디가 90년대 말부터 2000년도 초반에 엄청 쏟아져 나왔는데, 에드가 라이트는 어릴 때부터 만들어왔던 자신만의 연출 능력을 기반으로, 첫 장편영화가 <새벽의 황당한 저주>부터 엄청난 호평으로 단숨에 유명 코미디 영화감독이 되었다. 영화 마니아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패러디와, 잔혹함 속에서 보이는 개그 센스, 그리고 한숨도 지루할 틈이 없는 빠른 전개와 세련된 연출이 그렇다. 그리고 <뜨거운 녀석들>에는 케이트 블란쳇, 피터 잭슨이 카메오로 나온다. 그런데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으니 둘이 어디에 나오는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 참고로, 영화 초반에 나온다.


코미디 영화의 정석이라고 할 정도로 쉴 새 없이 몰아치지만, 그 내용 또한 가볍게 볼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잡지 않으면 없어지는 범죄율'과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잡지 않으면 없는 것

코로나19의 시대에, 모든 걸 원칙대로 검사하고 확진자 수를 공개하는 나라가 있다. 반면, 모든 걸 숨기고 검사를 하지 않도록 해서 확진자 수가 없도록 하는 나라도 있다. 둘 중 어느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일까? 전자는 확진자 수가 너무 폭발적으로 많아져 국민들이 불안을 느끼는 대신, 감염된 사람의 경로와 확진자를 파악해 비교적 정확하게 조기 대응할 수 있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다. 반면 후자는, 확진자 수가 아주 적게 나와서 국민들이 초반에는 불안을 덜 느끼겠지만, 검사를 유료화하거나 검사를 아예 하지 않아 확진자 수를 감추려는 주변 상황을 실제로 겪으면서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추락한다. 정부 조치를 믿지 않고 각자 조심하려는 경향이 더 강해지거나, 아예 안전불감증으로 흘러간다.


코로나 확진자율이 오르거나, 범죄율이 오르는 것은 비슷한 일이다. 단순하게 숫자가 올라가면 공포심을 준다. 코로나 환자가 확 많아지는 것 같고,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은 '환자와 범죄자를 더 잘 찾아내어 표면적으로 더 잘 드러나는 것'이 더 큰 이유다. 단순하게 코로나 환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방역에 구멍이 뚫렸다거나, 범죄율이 올라간다고 해서 치안에 구멍이 뚫린 건 아니라는 거다.


보이는 숫자에 집착하는 대표적인 국가는 일본이다. 성진국이라고도 불리는 일본은 생각과는 다르게 성범죄 비율이 굉장히 낮다. 그러나 단순하게 숫자가 낮다고 해서 실제 성범죄가 적은 것이 아니다. 성범죄를 증명하기 위해 일어나는 2차 가해, 성범죄 피해자가 받는 사회적 지탄 등이 애초에 신고 자체를 꺼리게 만든다. 거기에 애초에 신고받은 경찰이 좋게 좋게 넘어가라는 식으로 피해자를 설득하고, 검찰도 기소 자체를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인데 성범죄율이 높을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일본 여성들은, 스스로도 가해자 탓을 하기보다는 '내가 조심했어야 했어'라고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성들의 각자도생이다.

일본은 코로나19에 대한 대처 방식도 똑같았다. 분명 코로나19가 엄청나게 퍼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사를 안 하거나 비싼 가격 등으로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확진자율을 낮췄다. 숫자가 적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식이었다.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건 독재하는 나라의 특징이다. 밖으로 보이는 지표나 언론을 통해서 잘못된 정보를 퍼트려 마치 우리가 잘살고 있는 듯이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권은 유지할지 몰라도, 죽지 말아야 할 국민들이 죽게 된다. 잡지 않으면 없는 것, 그거는 대중을 속여 체제 유지를 하려는 세력의 농간인 셈이다.


<뜨거운 녀석들>에서 엔젤 경사는, 너무나 탁월한 능력으로 범인을 많이 잡아서 문제였다. 시작하자마자 보이는 빠른 편집의 시퀀스는, 그가 너무나 범인을 잘 잡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범인 잡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런던 경찰청은 그가 범인을 너무 잘 잡았기 때문에, 다른 동료들이 일을 할 수 없다며 그를 아주 한적한 시골로 전근시켜버린다. 그 시골은 '올해의 마을'상을 수상하기도 한 '글로스터셔 샌드포드'. 그곳은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마을'이다.


하지만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마을'이라는 별칭은 허울뿐이고, 사실은 전혀 원칙을 지키지 않고 '관행'대로 처리하는 시골마을일 뿐이었다. 미성년자들이 술을 마시고, 불법무기를 소지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경찰들 자신조차도 지각과 업무태만이 이어진다. 엔젤 경사는 그들을 모두 잡아들이지만 경찰은 그들을 그냥 훈방시키거나, 관행대로 '벌칙' 정도로 처리한다. 즉, 경범죄들은 범죄 처리되지 않는다.



사건과 사고

그런 평화로운 마을에서, 아주 잔인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여느 공포영화에서 모티브를 딴 것 같은 가면을 쓴 살인마가 하나씩 살인을 저지르지만, 그걸 자동차 충돌 사고로 위장한다. 그런데 경찰들은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사고'라며 얼버무린다. 엔젤경사는 '공식 단어장에 따르면 사고 대신 충돌이라는 말을 쓰게 되어있어' 라며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왜냐하면 '사고'라는 말에는 누구의 책임도 있지 않다는 뜻이 들어가 있거든"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에는 의도가 없었다, 오해였다, 사고였다, 관행이었다며 넘어가려는 부류들이 있다. 이런 일에 책임을 지지 않고 회피하려는 사람들은, 고위공직자가 되어서도 그럴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청문회를 하고, 여론을 수렴하는 것이다. 청문회가 그저 지루한 정치 방송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게 좋다. 그래야 그 공직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태도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청문회 결과를 언론을 통해서만 보면, 전 세계 신뢰도 꼴찌인 한국 언론이 어떤 식으로 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형 언론사가 아닌, 스스로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찾아보고 귀찮지만 팩트체크를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은 사건을 사고로 위장할 가능성이 크다. 어떤 큰 사건을 '사고'로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책임이 없다며 회피하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은 공직자 자리에 있어선 안된다. 국민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수사와 기소의 분리

우리나라에서 법을 적용해 사람을 정치적으로 판단한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우린 독재 정권 아래서 숱하게 겪어왔다. 검찰의 간첩조작 사건으로 인해 투옥되었던 사람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 몇십 년 수감생활 끝에 석방되는 건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또, 사실 경술국치나 이승만 박정희의 독재도, 따지고 보면 법을 자기식대로 해석해서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서 조선인들을 탄압하거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것도, 민주적인 시위를 불법시위로 간주하고 때려잡은 것도 다 법대로 행해진 일이다.


법이라는 게, 알고 보면 어떻게 기소를 하는지 해석을 하고 판결을 내리는지에 따라 아주 달라진다. 그래서 사실은 '법대로 하겠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적용할 사람들이 법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가가 더 중요하다. 판사도 항상 정의롭게 판결할 것 같지만, 한국에선 아직까지도 국민의 편에서 판결을 내리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에서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법관들은 퇴임하면 대기업의 법무팀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노후를 위해서 그쪽에 유리하게 판결을 내릴 때가 종종 있다.


이렇게 보자면 법대로 하는 것보단 관행을 따르는 게 좋은 거 아닌가? 뭐가 더 옳은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사건이 기소되고 판결 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은 범죄를 저지른, 하지만 정치적 성향이나 재산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인지 잘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범죄를 수사하고 기소하는 주체가 분리되어있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하나에 모여있으면 필요에 따라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검찰을 제외하고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검사가 기소권과 수사권을 다 가진 나라는 없다. 보통 기소권만 가지고 있다.


그럼 한국은 어쩌다 기소권과 수사권을 검찰이 다 가지게 되었을까? 해방 직후, 미군정은 요직에 있던 친일파 경찰들을 그대로 자리에 앉혔다. 따라서 당시에는 친일파 경찰들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다. 경찰이 수사를 할 수 있으면, 친일파를 몰아내려는 세력들, 특히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쉽사리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회는 검찰에게 임시적으로 수사권을 주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온 거다. 그 와중에 검찰의 막강한 권력을 독재정권이 이용해서 오히려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들을 마음껏 수사하고 기소해서 잡아넣었다. 검찰의 권력은 바로 '기소권'이다. 기소 자체를 하지 않으면 사법부에서 무죄가 나기도 전에, 애초에 죄가 아닌 것이 되니까. 현재 한국에는 기소권을 분리하기 위해 '고위공직자 수사처'가 생기고 검찰의 기소권을 제한하는 법이 통과되었지만, 얼마나 제대로 돌아갈지는 아직 미지수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의 검찰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

'글로스터셔 샌드포드'마을에는 사실 마을 주민 원로들이 만든 자경단이 있었다. 그 자경단은 스스로 범법자를 확정하고, 처결하고, 마을을 깨끗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들을 견제할 세력은 전혀 없었다. 경찰서장도 자경단이었으니까. 그냥 그들이 지목하면 그 사람은 범법자가 되고, 무참하게 살해당하며, 그것이 누구의 책임도 아닌 '사고'로 위장해왔다. 이런 자경단은 스스로는 좋아 보이지만, 결국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일을 처리하게 된다. 심지어 그것이 현실의 검찰과 달리 권력이나 돈에 대한 탐욕이 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썩게 마련이다. 그들의 시작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지금 결국 그들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그저 그 사람들이 '자경단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엔젤 경사는 자경단의 진실을 알게 되고 체포하려다 오히려 그들에게 죽을뻔한다. 죽다 살아난 엔젤 경사는 혼자 무기를 잔뜩 들고 돌아와 자경단들과 전쟁을 벌인다. 그토록 싫어하던 영화 속 액션스타처럼 변신해 잔뜩 무기를 들고 사우는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다. 게다가 평범한 노인들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커다란 총이나 무기를 들고 싸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엔젤 경사가 혼자 다 처리하기엔 역부족. 다행히도 글로스터셔 샌드포드 마을 경찰 전부가 자경단은 아니었고, 그저 관행에 물든 사람들이었다. 엔젤경사와 그의 파트너 대니(닉 프로스트) 덕분에 나중에는 각성하고 엔젤 경사를 도와준다.

자경단이 모든 판단을 내리고 범인이라 단정 짓고 처결하는 건 굉장히 큰 문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블에선 영화 <시빌 워>에서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어벤저스들을 마음대로 날뛰는 자경단 취급을 한 것이다. 미드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살인사건을 주인공들이 자경단 역할로 해결하려 하지만 그것이 갱단 보스를 살려내는 일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선과 악이 분명하지가 않다. 원래 이 영화는 당시 미국에 나온 애국자법으로 이슈 된 공공선의 개념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스토리이기도 하다. '공공선을 위한다'라는 그 선은 누가 결정하는가? 또 그걸 빌미로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도청하고 감시해도 되는가?


마오쩌둥 주석은 낱알을 마구 먹는 참새를 가리켜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에는 거기에 반기를 들 사람들도 없이, 참새 소탕작전에 나섰다. 참새는 없어졌으나, 참새가 먹던 벌레들이 창궐해서 결국에 중국엔 대기근이 닥쳐 많은 사람이 죽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비록 그것이 공공선을 위한다라 할 지라도 무서운 결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는 조금 느리게 진행되더라도 반대하는 세력끼리 서로 토론하고 합의하며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다.


온갖 액션 영화와 호러영화의 패러디를 타고 넘어가서, 영화는 정말 시원하게 마무리짓는다. 이런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도 유쾌하고 통쾌하게 끝내는 것이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장점이다. '다 죽여!'라고 하면서 다 쏴버리는데도 왜인지 모르지만 죽는 사람이 별로 없다.




범죄율은 '인구 10만 명당 형법범죄의 건수'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범죄율은 그 국가. 지역의 치안상태를 나타내는 좋은 지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여타 범죄는 지역의 범죄 인식 정도나, 기소되는 정도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어서 정확한 비교를 할 순 없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범죄라고 인식할 수 있는 '살인율'로 보통 비교한다.


그러나 그것도, 견제받지 않는 권력들이 살인을 사고로 조작하거나 통계 자체를 숨기고 조작하는 일도 가능하다. 안 좋은 지표를 숨기려고 하는 그 자체가, 대중의 건강이나 안전을 생각하기보단 자신들의 권력유지에 힘쓰는 일이다. 한국에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들이 아직도 판을 치고 있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덮어두면 곪아서 팔다리를 잘라내야 할 수도 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될 수도 있다. 숨기고 덮어두려 하지 말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권력기관, 견제받는 권력기관이 정말 대중을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내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 모른 채 당할 수도 있다.


일본 속담에,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모든 걸 완벽하게 덮을 수는 없다. 아무리 덮고 가려도 썩은 냄새는 나기 마련이니까.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