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개그 무술 영화 장면이라고 돌던 영상이 있었다. 와이드샷에 화려하지도 않고 슥슥 움직이는 것 같은 액션에 꼼짝 못 하고 제압당하는 모습. 하지만 그 영상이 가진 동작의 절제와 영상미가 묘하게 마음을 끌었다. 그리고 이게 무슨 영화인가 찾아보니, 원제는 사부(師父)라는 제목의 영화고, 한국어로는 <사부:영춘권 마스터>라는 제목이었다.
영춘권이 무엇인가. 이소룡이 엽문에게 배운 무술로 유명한 그 무술이다. 영화에서 주먹을 연타로 빠르게 지르는 중국 무술이 떠오른다면 그게 영춘권이다. 번자권도 연타로 유명하지만 번자권은 미디어에 많이 나온 적이 없으니까. 게다가 이 영화는 중화권 영화제 중 가장 권위 있는 금마장영화제에서 최우수 액션상을 받은 영화다. 영춘권으로 최우수 액션상을 받은 영화라니!
주인공은 '진 사부'로, 실제 이소룡의 스승인 엽문, 그리고 그 엽문의 스승인 진화순을 모티브로 해서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진화순에게 이런 이야기가 실제로 남아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조금 의문이 든다. 청나라 말기의 무술영화라면 보통 일대종사인 엽문이나 곽원갑, 황비홍으로 만든다. 그런데 왜 잘 알려지지 않은 엽문의 스승인 진화순을 모티브로 잡았을까. 그것은 진화순의 이야기에 '쿵푸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정한 고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진사부(랴오판)는 광동에서 천진으로 도망 와 무술 도장을 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천진은 무술로 유명한 곳이다. 그 유명한 정무문(정무 체육회)을 만든 곽원갑의 고향이기도 하며, 배우 이연걸이 챔피언이었던 무술대회도 천진 무술대회다. 이렇듯, 천진은 무술인의 자부심이 강한 곳이다. 도장을 열기가 쉽지 않다.
영화에서는 그중에 생기는 무술인들의 세속적 욕망, 그리고 중국 무술이 어떻게 고인물이 되는지 잘 표현되어 있다. 또 중국 무술을 정말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다 보고 나면 '최우수 액션상을 탄 이유가 이래서였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게다가 이 영화는 무술만 볼거리가 아니라, 미장센이 아름답고 절제되어 있으며 주인공 ‘진사부’와 그 부인, 제자와의 묘한 관계나 스토리들도 아름답고 기묘하게 그려져 영화적으로도 완성도가 높다.
쿵푸는 공부(功夫)
흔히 쿵푸로 불리는 중국 무술은,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달마대사는 보리달마(보디 다르마,போதிதர்மன்)라는 인도에서 건너온 사람이며, 선종불교의 창시자다. 하지만 연구 결과 달마대사는 아직 소림사가 세워지기 전, 숭산에서 승려들의 좌선과 깨달음의 수련에 신체가 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역근경을 저술했고, 그 이후에 세워진 소림사의 2대 방장이 주변의 각지에서 무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승려들의 신체단련을 넘어서서 조정의 후원을 받아 무술을 연마한 것이 밝혀졌다.
달마대사의 이야기가 전설이든 아니든, 쿵푸의 기원을 달마대사에게서 찾는 건 어떤 의의가 있다. 달마대사는 인도에서 온 사람이고, 남인도 지역에서는 고대부터 칼라리파야투(Kalaripayattu, களரிப்பயிற்று)라고하는 무술이 있었다. 이 무술은 정신적인 방법론과 수련은 요가에, 의학적 치료는 아유르베다에 둔 전통무술이다. 또한 다양한 무기술과 동물의 모양을 닮은 자세, 맨손 기술에선 다양한 혈자리를 익힌다. 따라서 타밀 지역의 칼라리파야투가 바로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들여와 전한 무술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렇다면 인도의 칼라리파야투가 동아시아 무술 전체의 기원인 셈이다.
칼라리파야투의 대련 모습
칼라리파야투에서는 무기술을 먼저 다루고 맨손 격투를 나중에 가르치는데, 신체적 정신적으로 단련이 되어야만 맨손으로 싸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만큼 칼라리파야투에서는 정신 수련을 중요시하고, 그 방편으로 요가의 방법론을 따른다. 사실 요가는 단순히 몸을 멋있고 섹시하게 스트레칭하는 기술이 아니다. 요가(योग)는 제어, 합일, 수단, 방편이라는 뜻이 있다. 즉 요가는 몸 안에 있는 차크라를 열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몸을 제어하고 그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이 된다. 요가의 철학이나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동작만 따와서 과학적으로 분석한 현대의 요가 스트레칭은, 요가의 아주 겉면만 보는 것이다.
이는 요가로 깨달음의 수행을 해 보면 알게 된다. 깨달음의 과정 중 '쿤달리니 각성' 등을 체험하면 온몸이 뱀처럼 뒤틀리게 된다. 이때 몸이 요가로 단련되어있지 않으면 그 각성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이렇듯 육체적인 단련이 정신적인 깨달음과 연결된다는 오랜 철학이 녹아있는 게 요가다.
달마대사 기원설은, 쿵푸가 그런 칼라리파야투의 수행방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즉 누군가를 해하고 살생하려는 목적뿐 아니라, 자신을 단련하고 우주의 이치를 깨닫도록 수행하는 것도 목적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중국 무술이 고대 중국 곳곳에서 만들어졌고, 그것이 통합되고 교류하고 발전하면서 컸으므로 뭐가 기원인지 일기 힘들다는 게 정설이긴 하나, 쿵푸 역시 요가의 철학이 녹아 있으므로 불교 사찰-소림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원으로 삼는 것이다.
공부(쿵푸, 功夫)의 실제 단어의 뜻은 사실 무술과는 상관없이, ‘오랜 시간 노력하고 연마해 숙달된 실력, 조예’를 말한다. 중국 무술을 싸우는 기술, 즉 무술(우슈, 武術)이라 부르지 않고 공부라고 불렀던 것은, 오랜 시간 연마해 수행해서 깨닫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수련의 정도가 높으면, ‘공부가 대단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쿵푸는 오래 반복하고 연마해서, 그리고 요가처럼 그 동작들이 함의하는 우주와 합일되는 철학을 동시에 이해해 내면까지 갈고닦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 문파의 종사는 그저 무술 사범의 지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경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불교, 도교와 같이 커왔던 쿵푸의 이상적인 이야기고, 실제 쿵푸는 전쟁 때문에 실전이 더 강조되었다. 그 예로, 모든 중국 무술 문파는 원래 무기술이 같이 들어있다. 창, 검, 도 등 각자 문파마다 무기가 있어서, 그 무기를 다루기 위한 연습이 문파의 동작이 되었다. 전쟁이 빈번한데 언제 맨손으로 싸우고 있단 말인가. 만화 ‘권법 소년’으로 유명해진 팔극권도, 원래는 창을 다루는 무술이다. 가장 유명한 고수가 ‘신창 이서문’으로 불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소룡과 그의 스승 엽문이 했던,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영춘권은 무엇인가?
영춘권은 원래 ‘엄영춘’이라는 여성이 소림사의 비구니에게서 배워서 전파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무술이다. 그래서 동작이 힘 있고 호쾌하기보단, 근접기술로 급소를 빠르게 가격하고 꺾는 모습이다. 특히 손기술이 아주 빠르고 연타가 특징이다. 수련은 주로 목인장(나무로 만든 인형)으로 수련한다. 쿵푸영화에서 목인장 수련이나 무술을 시작할 때 서로 손을 천천히 맞대면서 빠른 손동작으로 서로 막고 공격하는 모습 등은 다 영춘권의 모습이다. 영춘권은 원래 중국에서 유명한 무술이 아니었다. <사부>에서도 영춘권은 듣도 보도 못한 무술 취급을 당한다. 영춘권이 쿵푸영화에 많이 보이게 된 것은 당연히 이소룡의 역할이 크다. 정작 자신은 영춘권을 넘어서서 절권도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말이다.
엽문 3에서 목인장으로 수련하는 견자단. 엽문은 진사부의 제자다.
그 영춘권도 사실 무기술이 있다. 팔참도라고 하는 기묘하게 생긴 짧고 넓적한 단도인데, 이 영화에선 다른 영춘권 영화에서 잘 나오지 않는 팔참도를 쓰는 모습이 주로 나온다. 영춘권은 근접전을 하는 무술이라, 양손에 팔참도를 들고 창이나 검을 제압하는 기술들이 발전했다. 상대방을 빠르게 연타로 가격하는 권법 기술이, 무기를 들면 어떤 모습으로 바뀌는지 보는 것도 흥미롭다.
영화에서 주인공 ‘진사부’는, 정말 오래 많이 수련해서 자신이 고수가 되었다고 단언한다. 그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모습이, 1대 1로 붙는다면 누구든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즉 ‘공부’가 경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그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광동에서 도망 나와 천진까지 와서 영춘권을 전수하고자 한다. 하지만 천진은 외부인을 철저히 경계하고 체면을 중요시한다. 천진에 있는 각 무술 문파 8개를 깨면 진사부가 무술도장을 열 수 있게 하겠지만, 그 도장깨기를 한 사람은 쫓겨나게 된다. 이 무슨 황당한 논리인가. 그래서 진사부는 영춘권의 존속을 위해, 도장깨기를 할 제자를 들여 키우기 시작한다. 도장깨기는 제자에게 시키고, 그 제자는 버리고 자신이 도장을 열려고. 그래서 진사부는 자신이 그토록 오래 수련하고 단련한 ‘공부’를, '영춘권 전수'라는 대의를 위해 이용한다.
싸움의 기술
사실 쿵푸의 진수를 알려면 실전 싸움이어야 하고, 무기를 들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수가 너무 많으면 싸울 수가 없다. 쿵푸 영화에서는 너무 과장되어 맨날 수십 명을 혼자 상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싸우는 상대가 고수일 때는 사방에서 한 번에 공격하면 제아무리 공부가 뛰어나도 막아낼 재간이 없다.
영화 중간에 소매치기 일당이 달려들어 진사부와 아내에게 몰매를 놓으려고 했지만, 그곳은 좁은 골목이었다. 즉 상대방이 올 수 있는 방향이 정해져 있다. 여기에서 진사부는 자신의 공부를 십분 발휘한다. 여기서 진사부가 아내와 벤치에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십 수 명의 패거리를 봉술로 제압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여러 명이 사방에서 달려들면 싸우기 힘들지만, 한쪽에서 올 수 있도록 장소가 제약되면 싸울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된다. 그렇게 되면 고수는 여러 명의 상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이 일련의 과정들에 나타나는 연출과 대사와 연기는 상당히 절제되어있어서 마치 연극이나 시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어느 부분에서는 코믹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절절하며 어느 부분에서는 애틋하다. 이런 세련된 절제미를 무술영화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독특하다.
쿵푸(공부, 功夫)와 우슈(무술, 武術)
사실 쿵푸라 불리던 중국 무술은 중국 공산당의 문화 대혁명으로 대거 탄압을 당했다. 중국 공산당은 무기를 다루고 무술을 하며 종교처럼 집단을 이루고 있는 무술인들을, 위험한 종교집단이나 폭력배로 규정해서 없애려고 했다. 그리하여 많은 무술가들이 대만과 홍콩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쿵푸를 꽃피웠다. 홍콩에선 엽문의 제자 이소룡이 나오면서 홍콩영화의 대 중흥기가 시작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중국은, 예전 소림사와 기타 무술을 재건하려 했지만 각 문파를 다시 만드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 우슈(무술, 武術)라고 부르며 그 안에서 태극권 형의권 팔괘장 등을 하나로 합쳐버렸다.
당연히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대련도 굉장히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었다. 우슈-무술이라고 하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쿵푸를 그저 ‘싸우는 기술’로 생각한 것이다. 거기에는 중국 무술이 오랫동안 가졌던, 쿵푸의 정신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 태극권은 그저 광장에서 하는 노인들 기체조로, 소림권은 팔닥거리는 무용처럼 바뀌었다. 소림사도 사찰이 아니라 이미 소림무술학원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무술대회도 ‘산타(대련)’보다는 ‘표연(품세)’위주로 이루어졌다. 쿵푸가 쿵푸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던 철학, 사상, 마음가짐 등은 이미 무너져갔다.
사실 쿵푸는 근대 전쟁에서 총과 화포가 더 중요해지자, 맨손 기술보다 전술이나 무기를 더 중시 가르쳤다. 무술에는 군인의 체력단련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고수들은 지방에 가서 생계를 위해 도장을 열고 민간인을 가르쳤지만, 실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기술은 아무에게나 전수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극의는 무서운 살인 기술이 될 수 있으므로 아무에게나 전수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평생 최대 두 명에게만 진정한 권법을 전수한다”
모두에게 함부로 가르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대대로 내려온 문파의 명맥을 끊을 수는 없고. 그것이 무술가들의 딜레마였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기차가 생기고 서로 교류하면서 세상은 빠르게 변화했지만, 무술가들은 변화보다는 전통을 중시했다. 사실 이미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중국 무술계는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던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천진의 무술가들은 바로 그 모습이다.
황비홍, 곽원갑, 엽문이 활동하던 중국은, 신문물과 서양문화에 뒤쳐져 혼란기를 겪던 시기였다. 전통을 살려야 하는지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무술가들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엽문과 곽원갑은 각각 홍콩과 상해에서 쿵푸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중심인물이다. 곽원갑은 상해에 정무 체육학교를 세웠고 그것이 곧 ‘정무문’이다. 곽원갑은 서양인을 상대로 시합을 해 이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엽문은 중국 무술 최초로 대중에게 ‘중국 무술의 비전’을 공개했다. 그만큼 엽문과 곽원갑은 변화 속에서 쿵푸의 정신을 지키려 한 인물이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영춘권은 유명한 무술이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나 영춘권의 ‘진사부’가 가지고 있던 사부로써의 마음. 외적으로도 내면으로도 진정한 공부를 쌓는 쿵푸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진사부는 징정한 사부였고 영춘권은 진정한 쿵푸로 남아있던 것이다. 그것이 엽문을 통해 훗날 이소룡에게까지 전해졌다.
이 영화의 액션은 진정한 공부를 쌓은 쿵푸와, 화려하기만 한 무술이 뭐가 다른지 제대로 보여준다.
드디어 영화를 보기 전 보았던, 긴 골목에서의 전투씬이다. 진사부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일부러 골목으로 도망 왔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적이 오는 곳을 한정 지으면, 여러 명도 상대할 수 있으니까. 이 장면에선 화려한 카메라 연출이나 호쾌한 액션이 없다. 그동안의 쿵푸 영화는 크게 휘두르며 크게 피하고, 카메라를 흔들거나 화면 전환을 하면서 눈을 정신없게 했다. 그러나 여기선 날 것 그대로, 카메라를 와이드 하게 고정시켜 놓고 세세한 움직임만 빠르게 따라가며 보여준다. 마치 제이슨 본이 이스라엘 전투 무술인 크라브마가를 하는 장면처럼.
이 골목에서는 각 문파의 고수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고수들이 가져온 무기는 골목 싸움에 맞지 않은 큰 창이나 검이었고, 영춘권의 팔참도는 그것을 제압하는데 아주 능숙했다. 움직임 몇 번으로 바로 제압해 영춘권 특유의 빠른 손놀림으로 상대를 난도질하며 쓰러트린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하니 모두 치명상은 일부러 피했다. 마지막으로 진사부는 자신을 몰매 놓으려는 각 문파 제자들에게, 진정한 사부로써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천진의 무술가들에게 쿵푸의 진수를 가르쳐 주었다.
무협에서 보던 정신과 의리와 깨달음이 살아있는 무술을 쿵푸라고 부르지만, 현대 중국에서 전해지고 있는 무술들은 말 그대로 싸우는 척하는 기술일 뿐이다. 영화에서 화려하게 소비될 수는 있지만 실전성은 여전히 부족하고, 중국 정부에선 지금이라도 키워보려 하지만 이미 명맥이 끊겼다. 그것은 가라데와 태권도의 명성과 실전성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홍콩마저 중국 본토로 넘어간 요즘, 안타깝게도 문화 대혁명과 함께 진정한 쿵푸는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쿵푸는 말 그대로 우슈, 무술로 그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중국 무술을 실전성이 없다며 우습게만 볼 것이 아니라, 거기엔 그런 슬픈 역사가 있다. 그리고 모든 진정한 ‘쿵푸영화’는 문화 대혁명 이전, 엽문과 곽원갑에 멈춰져 있다. 그 영화들마다 진정한 중국의 정신을 외치지만, 이제 그것은 그저 허망하고 쓸쓸한 메아리로만 들려온다.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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