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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Aug 13. 2021

<바후발리> 카르마란 무엇인가

카르마와 카스트가 질서있게 얽힌 자이나교

휘어진 나무 위에 전사들이 올라간다. 그리고 서로의 팔을 잡는다. 나무의 줄을 끊자 나무가 펴지며, 전사들이 성벽으로 날아간다. 전사들은 가지고 있던 방패로 몸을 숨겨 마치 철로 만든 공처럼 된다. 성 너머로 날아간 철공은 바닥에 부딪히며 다시 전사들로 나뉘어져, 성 안의 병사들을 도륙한다.


아마도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보고 웃었을 그 '발리우드의 위엄' 짤의 원작 영화. 제목은 <바후발리> 시리즈다.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탄 이후로는, <바후발리> 감독이 <기생충>을 보고 '지루한 영화다'라고 해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었다. 나중에 한국인들은 그가 <바후발리>의 감독인 걸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화의 감독이라면 그럴만 하지."


하지만 <바후발리 : బాహుబలి / Bãhubali, 2015>는 사실 그렇게 우습게만 소비될 영화는 아니다. <바후발리>는 인도 고유의 종교인 자이나교를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그 화려한 액션 뒤에 보여지는 철학 또한 윤회와 카르마를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생충>을 보면서 그 안에 숨겨진 한국인만의 정서를 외국인들보다 설명 없이 더 잘 이해하듯, <바후발리> 역시 인도 사람이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정서와 가르침 등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영화가 전 세계에서 8,400만 달러를 벌어들여 인도에서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한 영화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블이 서양의 다양한 신화를 짬뽕시켜 만든 만화의 실사화로 인기를 끌었듯, <바후발리> 역시 그런 영화다.


지역별 인도의 언어. 힌디어는 발리우드. 톨리우드는 텔루구어를 쓰는 지역이다. 그래서 텔루구어와 타밀어로 개봉하고, 넷플릭스에 있는 버전은 힌디어 더빙 버전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엄밀히 말하면 발리우드가 아니다. 발리우드는 인도 북부, 특히 힌디어를 쓰는 뭄바이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를 할리우드에 비견해 만들어진 용어인데,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를 만드는 곳이라 그렇게 불렸다. 하지만 인도에는 그밖에 언어도 지역도 너무 다양하다. 이 <바후발리>는 인도 남쪽 텔구루 지역에서 만들어져, 톨리우드라고 불리는 영화다. 인도는 각 지방마다 언어나 문자도 다르고 문화도 달라서, 주가 국가 수준으로 차이 난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힌디어를 주로 쓰는 발리우드 대신, 텔루구어를 쓰는 톨리우드 영화가 역대 인도영화 1위를 한 것은 그 지방 사람에게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주연 배우인 프라바스는 타밀 출신이다. 후에 <RRR>을 만든 감독이기도 한 S.S. 라자몰리 감독은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신화를 섞어서, 그 속에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마하바라타와 바가바드기타

<마하바라타>는 세계에서 가장 긴 전쟁 서사시로, 쿠르크셰트라 전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후발리 1>에서 나오는 칼라케야 전투는 이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원래 쿠르크셰트라 전쟁은 쿠루 왕족의 왕좌를 놓고 카우라바와 판다바 사이의 전쟁을 그린 서사시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전쟁의 모습을 묘사하고, 특히 '아스트라'라고 불리는 마법과 같은 신비한 기술도 등장한다. 또한 판다바의 아들 중 차남인 비마세나는 힘이 세기로 유명한데, 그의 주 무기는 샤이카라는 커다란 철퇴다. 영화에서도 바후발리의 형인 발랄라데바가 바로 어마어마한 힘으로 철퇴를 쓴다. 아마 발랄라데바의 모티브가 비마세나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재미있게 볼만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마하바라타>의 일부인 <바가바드기타>에 나오는 철학과 <바후발리>영화의 대비다. <바가바드기타>는 지금도 힌두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인기 있는 경전 중 하나로, 그 현실적인 철학이 후대에 나온 불교보다 더 수준이 높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많다. 주 내용은 이렇다. 판다바의 아들 중 아르주나가, 친척들과 전쟁하기를 꺼려한다. 그러자 마부로 변장한 크리슈나가 영혼의 불멸성을 말하며, "그것들은 죽여도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싸우라"라고 이야기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존재가 생겨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비존재가 생겨날 수 없다. 진리를 보는 자들은 이 둘의 차이를 안다. 그러므로 이 모든 편재하는 것은 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라. 이 불멸하는 것은 누구도 파멸시킬 수 없다. 이 육신은 유한하지만 육신의 주인은 영원불멸하며 헤아릴 수 없는 것에 속한다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싸워라. 아르주나여!" <바가바드기타>


이 <바가바드기타>의 철학이 영화 속에서 더 다가오는 이유는, 이 영화의 시작에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건, 장소 등은 허구이며 실제 인물이나 사건, 장소 등과 일치하는 점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동물들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CG와 모형이 사용됐습니다'라는 자막이 뜬다. 보통 대부분은 영화가 허구라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인공인 바후발리를 비롯해 인도 사람이면 누구나 알만한 장소나 이름 등이 나온다는 것, 또 이들은 죽고 죽이는 살생을 하지만 사실은 하나도 죽거나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였지만 죽지 않았다. 위에 말한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이 떠오르지 않는가? 또 살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바후발리'가 실제로 자이나교의 성인이기 때문이다.


바후발리와 자이나교

역사 속에서 바후발리는 자이나교의 시초 리샤하나타(리샤바)의 아들이다. 바후발리라는 이름의 뜻은 '강한 팔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이나교의 시초인 리샤하나타나 실질적인 창시자인 바르다마나보다도 대중적인 인기가 있다. 바후발리는 인도 곳곳에 초거대석상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중 고마테슈와라 석상은 서기 981년에 만들어진 17m 높이의 석상으로, 인도 7대 불가사의로 뽑혔다. 그 석상에 각종 염료와 우유 등을 붓는 행사를 마하마스타카비셰크(Mahamastakabhishek)라고 하며, 헬기를 타고 생중계할 정도로 큰 행사다. 유튜브에서도 바로 찾아볼 수 있다.

바후발리는 선 채로 명상을 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동안 팔과 다리에 덩굴이 자라났다는 신화가 있다.

이토록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기에, 바후발리라는 이름을 자막에 쓰인 대로 영화의 주인공 이름으로 '우연히'썼을 리는 없다. 거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바로 자이나교의 가르침인 불살생과 윤회, 카스트와 카르마를 넣기 위해서다. 사실 윤회와 카르마는 인도 고대 철학인 우파니샤드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사상을 근거로 하는 모든 종교 -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이 세세한 부분은 다르지만 각자 공유하는 철학이다. 그중에서도 자이나교는, 특히 살생을 금지하고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자이나교를 제대로 지키며 사는 성인들은, 코에도 벌레가 들어가 죽을까 망을 하고 살며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어 죽는다. 이런 극단적인 고행을 중요시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인도 밖으로 퍼지지 못하고 인도 내에서만 중요한 종교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자이나교의 가장 인기 있는 성인이, 이름만 같다고는 해도 전쟁에 나가 사람들을 도륙했다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면 많은 인도인, 특히 자이나교 사람들이 꺼림칙하게 여길 것이다. 예를들어 예수라는 이름의 장수가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영화가 나온다고 하면 어떨지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래서 앞서 말한 문구를 굳이 넣어,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처럼 이 영화는 죽였어도 죽지 않는 영원성을 가지며, 실은 바후발리는 아무도 죽이지 않은 셈이 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아마렌드라 바후발리(프라바스)는, 마히쉬마티 왕국에서 가장 낮은 계급의 사람들도 좋아하고 존경받는 왕자이다. 그리고 자이나교의 바후발리를 모티브로 한 것이 더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형인 발랄라데바(라나 당구바티)와 대립하며 전쟁하는 부분이다.


실제 역사에서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리샤하나타는, 자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수행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나라를 100명의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신은 깨달음을 얻어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주며 교리를 전파했지만, 그 아들들은 권력을 갖기위해 전쟁에 휩싸였다. 특히 아들중 '바라타'라는 아들은 특별한 차크라 무기를 개발했다고 나온다. 그것은 바로 회전하는 톱니바퀴다. 영화에서도 전차에 달린 무시무시한 회전하는 톱니바퀴가 나오는데, 이 무기가 근거 없이 아무거나 가져다 만든 게 아니라 신화에 근거해 바라타의 차크라 무기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98명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그 무기에 굴복해 왕국을 내주었다. 하지만 바후발리는 최후까지 저항했다. 자이나교 신화에서 이 형제끼리의 전투는 아주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마하바라타의 내용과 섞여 엄청나게 액션이 강조되었지만, 실제 기록 속에 있는 자이나교의 바라타와 바후발리의 전투는 그렇지 않았다. 둘 다 세력이 막강해 피해가 클 것을 예상하고, 둘이 서로 세 번에 걸친 무기 없이 싸우는 1대 1의 전투를 했다. 이것은 역사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무기 없이 전투에 승리하는 장면이라고 나온다. 첫 번째는 서로 눈을 바라보며 눈을 감지 않는 눈싸움, 두 번째는 강에서 물을 서로에게 붓는 물싸움이었다. 두 번의 전투에서 바후발리가 이겼다. 세 번째는 주먹으로 때리는 레슬링이었는데 꼭 이기고 싶었던 바라타는, 여기에서도 수세에 몰리자 무기 없이 싸운다는 규칙을 깨고 무기를 쓰게 된다. 바후발리는 여기에서 분노하고, 또한 자신의 행동과 세상에 혐오를 느꼈다. 그래서 바라타에게 용서해달라 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머리를 뜯으며 승려가 되어 깨달음에 정진하기 위해 명상에 들어간다. 바후발리는 선 채로 1년 동안 명상을 해서 팔과 다리에 덩굴이 자라났다고 한다. 명상 동안 바라타에 대한 혐오가 계속해서 명상을 방해했지만, 바라타는 바후발리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 그 모습을 보고 참회했다. 그리고 바후발리 역시 그 모습을 보고 바라타에 대한 미움을 버릴 수 있었고 깨달음을 얻었다.


인도인, 자이나교인들에게 바후발리는 그런 인물이다. 그러므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윤회, 카스트와 카르마에 대한 이야기가 더 와닿을 수밖에 없다.




윤회와 카르마, 카스트

자이나교는 불교와 같이, 모든 계급의 사람도 윤회한다고 생각하며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는 것이 목표인 종교다. 거기에 신은 없으며, 따라서 힌두교에서의 신은 있지만 그들에게 자신의 해탈을 빌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무신론이다.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고행을 하며,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 따라서 1편 시작 부분인 폭포를 올라가는 행동은 '고행을 통해 해탈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쩐 일인지 폭포 밑의 마을의 강가에, 팔로 갓난아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아기는 사람들이 구해주지만, 아기를 들자 손은 폭포 위를 가리킨다. 모두들 폭포를 보는 사이, 손은 떠내려가고 만다. 사람들은 아기에게 쉬두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기서 폭포 위와 아래를 나누는 것은 카스트(계급), 혹은 지상계와 천상계를 말한다. 폭포 아래 마을 사람들은 여성이 족장이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 폭포 위를 올라가는 것은 시바신이나 가능하다고 말한다. (늙은 요기의 이마에 빨간 세줄의 문양은 시바신을 섬긴다는 뜻이다.) 하지만 쉬두부는 누가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폭포 위로 올라가려 한다. 또, 어마어마한 힘으로 시바신의 돌을 직접 옮겨 전통을 파괴한다. 사실 쉬두부는 영웅 아마렌드라 바후발리의 아들인 마헨드라 바후발리였던 것이다. 그건 이 바후발리의 영웅적인 출생이나 면모를 드러내려고 한 부분도 있지만, 자이나교의 카르마와 카스트에 대한 교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자이나교는 카르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카르마란, 자신이 살았던 생에서 행한 일들로 생기는 결과와 책임이다. 한국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한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카르마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카르마를 떨쳐버리려면 고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러야 윤회를 멈출 수 있다. 카르마가 쌓이면 카르마에 따라 윤회를 하게 된다. 즉 내가 다음 생에서 어떻게 태어날지는, 카르마가 결정한다.


그러나 이 교리는 자이나교에서 자신이 태어난 계급인 카스트를 정당화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감독인 S.S. 라자물리는 카스트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이나교의 또 다른 중요한 가르침은, 카스트에 관계없이 누구나 고행을 통하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카스트를 인정하면서 또 카스트를 벗어날 수 있는, 양면적인 종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도의 상위계층도 하위계층도 자이나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자신의 위치에 맞게 평화롭게 폭포 아래서 살아가려는 마을 사람들,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려고 하는 바후발리, 모두가 자신의 계급에 맞게 그 위치에서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던 <바가바드기타>에서도 크리슈나가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를 들면서, 자신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마헨드라 바후발리는 아버지 아마렌드라 바후발리의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환생이다. 그걸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1인 2역을 했다. 즉, 전생에서 쌓은 카르마가 있기 때문에 다시 위쪽 계급으로, 천계로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카스트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폭포를 오르는 것에 끌린 바후발리를 막기 위해, 마을 족장이자 어머니는 폭포 위로 쉽게 올라갈 수 있는 동굴을 막아버린다. 하지만 그 행동 덕분에 오히려 바후발리가 폭포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되었다. 지력, 무력은 바후발리가 카르마로 인해 타고난 것이지만, 그걸 제대로 얻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고행을 통해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자이나교의 교리다. 바후발리는 계속해서 폭포에서 떨어지면서도 폭포를 오르는 고행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이야기는 또, 자이나교에서 카스트와 관계없이 누구나 고행을 통해 해탈할 수가 있다는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 속에, 모순적인 가르침을 잘 담아낸 부분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아래 계급, 지상계인 폭포 아래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바후발리가 위로 올라가 도착한 윗 계급, 천계는 화려하지만 전쟁이 끊이질 않고 서로 죽고 죽이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곳에서 바후발리는 아버지의 시종이자 호위무사였던 카다바를 만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신화와 사랑

폭포를 오르는 마헨드라 바후발리의 모습도 뭔가 인간 같진 않지만,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는 아마렌드라 바후발리의 모습은 정말 범상치 않다. 사람들은 그 모습 때문에 코믹 액션이라느니 대륙의 기상이니 하지만, 그것보단 아마렌드라 바후발리가 가지고 있는 '신화적인 모습'을 표현한 연출이다. 특히 바후발리 2에서는 소제목이나 등장음악부터 바후발리를 폭풍의 신인 '루드라'하고 동일시한다. 참고로 루드라는 우리가 흔히 시바라고 부르는 파괴의 신과 동일한 신이지만, 시바는 좀 더 부드러운 이미지를 강조한 이름이고 루드라는 파괴적인 본성이 살아있는 이름이다. 영화 내내 바후발리가 시종일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멋짐이 폭발하는 포즈를 잡으며 액션을 하는 모습은 그래서다. 바후발리는 인간이 아니라 전쟁의 신이다. 그에게 역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시련의 이야기는 사실 여성의 서사라고 봐도 될 정도로 여성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아마렌드라 바후발리가 마음을 뺏기게 되는 데바세나(아누쉬카 쉐티)는, 단순한 공주가 아니라 키도 크고 싸움도 잘하며 한치의 물러섬이 없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바후발리와 발랄라데바 형제의 어머니 왕비인 시바가미(라야 크리슈난)인데, 그녀의 포스는 무시무시하다. 그런데 그런 그녀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데바세나였다. 시바가미의 왕국인 마히쉬마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나라의 공주이면서도 기개가 대단하며, 그 기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영화는 그런 시련과 깨달음 속에,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 신적인 존재에게 역경을 주는 것도 사랑이며, 이길 힘을 주는 것도 사랑이다. 아버지 아마렌드라 바후발리도, 아들인 마헨드라 바후발리도 그런 여인들의 사랑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더욱 큰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시바가미와 데바세나. 둘은 바후발리를 위해 둘 다 불타는 숯을 이고 고행을 하며 걸어간다. 이 장면은 참으로 명장면이다. 현실적인 고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것은 사랑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또한 멋짐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바후발리 역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떠나고 맞서지 않았다면, 그러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발랄라데바는 그러한 사랑을 얻지 못했다. 사악한 마음도 있었지만, 오로지 권력에 취해 술수를 부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지 못했다. 발랄라데바의 카르마는 그를 천계에서 떨어트려 버린다.





종교적인 교리나 가르침은 심오해서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고, 때론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어려워서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감흥을 받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바후발리>는 화려한, 때론 달콤한, 때론 재미있는 액션과 이야기 속에 그것을 신화와 종교와 섞어 잘 버무려내어, 윤회와 카스트와 카르마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게 엮어내었다. 단순히 돈만 많이 들여서 때려 부수고 화려한 CG를 넣었다고 해서 이렇게 대성공을 한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바후발리>는 인도영화에 굵은 획을 그은 영화가 되었다.


카르마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행위의 결과와 책임이다. 바후발리는 그 카르마로 죽음을 당하지만 환생해서 대업을 이루어내고, 발랄라데바는 카르마로 인해 아예 영혼까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자이나교에 의하면 영혼은 죽지 않는다. 끊임없이 나의 행위로 인해 내가 고통받아 윤회하며, 카르마를 모두 벗어버리고 윤회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나는 비록 자이나교의 교리에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나의 카르마가 나와 내 주변 세계를 만든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자, 오늘의 내가 무기력해지며 좁은 세계를 만드는 것을 느끼는가?

노래를 들으며 바후발리처럼 루드라 신의 가호를 받아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wLYYYTZihD8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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