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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Oct 04. 2022

<겟 아웃> 정치적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PC뒤에 가려진 무서운 자본주의의 실체

원래 <피노키오> 원작에서 푸른 요정은 '푸른 머리를 한 요정'이었지 금발의 백인 요정이 아니었다. 원작은 모험을 강조하는 이야기지만 푸른 요정을 금발의 백인이 '푸른 옷'을 입은 걸로 바꾸면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지켜야 할 도덕을 더 강조하는 이야기로 바꾸었던 것이다. 피노키오가 나올 당시 미국의 분위기 그대로다. 그런데 여기서 디즈니는 실사화를 하면서 푸른 요정을 흑인으로 바꾸었다. 그것도 백인의 요정 설화 코스튬을 그대로 입힌 채 캐릭터만 흑인으로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에 비하면 거의 동시에 나온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는 인종을 바꾸기보다 메시지를 현대에 맞게 바꾸는 과감함을 선택했고, 그것이 더욱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인어공주>도, 원작에서는 트리톤의 딸들 중에 가장 예쁘고 노래를 잘하는 설정이다. 그래야 원작의 내용처럼 목소리가 없어도 외모로 왕자와 결혼을 할 수 있으니까. 사실 인어공주는 내용 자체가 ‘여성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남자와의 결혼으로 삶의 구원을 얻는’ 이야기라, 현대 진보적인 문화와는 맞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 주인공을 흑인으로 바꾸면 백인이 결혼을 통해 흑인을 구원해주는 서사가 더 추가되는 셈이다. 이야기 자체가 이미 구시대적인데, 이걸 실사화하겠다며 흑인을 '끼워 넣는' 행위들은 <겟 아웃>에서 나온 '겉모습만 흑인으로 바꾸는 행위'처럼 기괴하고 섬뜩해 보인다.


디즈니가 만든 실사화 중에 가장 찬사를 받는 것은 영화 <알라딘>과 뮤지컬 <라이온 킹>이다. 라이온 킹은 오리지널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사자 이야기를 실제 남아프리카 부족의 이야기로 치환하면서 굉장히 독특한 뮤지컬을 탄생시켰다. 비록 디즈니에서 만든 오리지널 이야기지만 아프리카의 이야기이므로 아프리카계 캐릭터가 등장하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뮤지컬 <라이온 킹>은 지금도 최고의 뮤지컬 중 하나다. <알라딘>은 원래 '옛날 옛적 중국에서..'로 시작하는 국적불명의 천일야화 스토리 중 하나지만, 디즈니에서는 아랍 지역으로 통일해서 바꿔버렸고 그걸 그대로 실사화해서 성공했다. 아랍지역이면 지니가 흑인이어도 상관없다. 원래 같이 살고 있으니까. 여기에 자스민의 여성서사가 더해져서, 현대적인 알라딘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 디즈니는 아이들이 흑인 인어공주를 보며 좋아하는 영상을 보여주는 마케팅을 했다. 이건 더 악랄하다. 순수한 어린아이들은 자신과 같은 피부색인 캐릭터가 나오면 당연히 좋아한다. 자신들이 자본의 논리에 이용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런 행위들은 정말 관객들을 '침잠의 방'에 가둬버린다. 미디어 컨텐츠에 PC적인 것이고 진보적인 올바름을 넣었기 때문에, 여기에 반발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PC를 반대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어쨌든 다인종이 들어갔으니 입을 다물어야 한다. 백인 왕실에 흑인이 캐스팅되어도, 백인 동화에서 흑인이 캐스팅되어도, 이상하다는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 그걸 보는 관객들은 영화 <겟 아웃>에서 마치 자신의 몸에 백인이 들어왔는데도 그걸 지켜 보기만 해야 하는 침잠의 방에 갇힌 흑인들 같다.

 자본의 논리로 이용되는 PC가 정말 올바른 것일까? 그것은 미셸 푸코가 성 담론을 이야기한 것과 같이, 자본주의와 권력이 민중의 불만을 해소하는 통로로써 PC를 이용하는 셈이다. PC를 제대로 만들려면 흑인이 나오는 새 이야기를 발굴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까. 그냥, 그들은 기존 이야기에 흑인이 캐스팅되는 게 더 돈이 되니까 하는 거다. 영화 <겟 아웃>에서도 왜 흑인의 몸이 되고 싶냐고 물을 때 그들은 별다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은 생각해보면 더욱 섬뜩하다.

만화, 영화, 게임과 같은 미디어 컨텐츠에서는 이미지만으로 빠르게 그 캐릭터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해서,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합의된 캐릭터를 만들어왔다. 악당은 나쁘게 생기거나 타 인종이고, 여성은 연약하거나 비중이 적으며, 남성이 주로 해결사 역할이 되는 것 등이다. 그래서 미디어 컨텐츠가 가지는 감수성에 대해 꾸준히 문제 제기가 되어왔고, 사회 문화가 점점 발전하며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를 집어넣어 캐스팅하거나 스토리를 만드는 컨텐츠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미디어 컨텐츠에 제대로 정치적 올바름이 이뤄지기는 한참 모자라 보인다. 우리 사회가 거기에 아직 못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하는 컨텐츠들이, 그걸 제대로 하고 있긴 한 걸까? 정치적 올바름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이긴 하지만 단순히 또 다른 상업적 이용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조던 필 감독의 영화 <겟 아웃 (Get Out, 2017)>은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인종차별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던 ‘자본주의식 정치적 올바름’의 깊은 허상까지 정말 소름 돋게 날을 세워 풍자한다.

 




진행 중인 흑백갈등

미국에서는 링컨 대통령이 1860년대에 노예를 해방했다고 알고 있는데, 어째서 미국 내에 흑인에 대한 차별은 현재도 이렇게 심한 것일까? 사실은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한 이후에도, 노예가 완벽하게 해방되지는 않았다. 흑인의 시민권을 보장하는 '수정헌법 13,14,15조'가 발표되었으나, 남부를 비롯한 각 주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1877년 남부에는 흑인이 백인과 공공시설을 같이 이용할 수 없도록 하는 ‘짐 크로우 법’이 통과되었다.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이 오직 정부의 일에만 적용되고, 개인적인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하면서 사실상 흑인 차별을 용인했다.


1896년에는 유명한 '플래시 대 퍼거슨' 사건 판결이 이어진다. 플래시의 외모는 백인이었으나, 1/8이 흑인 혈통이었다. 당시 흑인과 백인의 공공시설 이용 분리를 정당화하는 판결을 하면서, 인종분리정책을 '분리하되 평등하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인정했고, 또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이다'라는 '피 한 방울의 법칙'을 법률로 만들어 흑인을 규정한다. '피 한 방울의 법칙'은 1967년까지 유지되었다. 인종분리정책의 일환인 '짐 크로우 법'은 1964년 폐지되었다. 그만큼 최근까지 흑인을 차별하는 법이 존재했고, 그래서 흑인을 하대하고 혐오하는 문화는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사회의 다른 부분보다도 미디어의 이야기를 하자면, 헐리우드에서 흑인은 아직도 차별적 대우를 받고 있었으며 주연을 맡는 경우도 적었다. 50년대 이후 성장한 미국 코믹스에서 대부분의 히어로도 백인이었다. 60년대의 <스타트렉> 시리즈는 흑인과 동양인에게 전문직 배역을 맡긴 최초의 드라마이고, 또한 흑인과 백인 사이의 키스신이 나온 최초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특별한 것이었고 시청자들의 반발도 컸다. 요새는 디즈니가 마블을 인수한 이후로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들을 다양한 인종으로 교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드라마도 다양한 인종과 성 소수자들이 주연으로 활약하고 있다. 여러 부분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가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흑인 혐오 범죄는 일어나고 있으며 구조적 차별도 남아있다. 게다가 최근 벌어진 '조지 플루이드 사망사건'은, 경찰이 흑인을 여전히 과잉 진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노예제 폐지 이후 16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미국 흑인은 차별받는 삶인 것이다.


 <겟 아웃>의 주인공 크리스(대니얼 칼루야)는 흑인과 백인에 대한 시선을 카메라에 담는 사진작가다. 그는 백인 여자 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엄스)를 사귀고 있는데, 로즈의 집에 초대를 받아 며칠 있다가 오기로 한다. 로즈가 아직 남자 친구가 흑인이라는 걸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걱정하지만, 로즈를 믿고 그 집으로 향한다. 흑인들은 이 시대에도 그런 부분들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침잠의 방으로

로즈의 가족들은 우려와는 다르게 크리스를 무척 반가워한다. 그들은 조금 이상한 농담들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흑인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크리스는 로즈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계속해서 어색하게 생글생글 웃는 흑인 가정부 조지나(베티 가브리엘)와, 시종일관 무뚝뚝한 흑인 정원사 월터(마커스 핸더슨)다. 그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밤에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던 크리스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에 도취한 조지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갑작스레 자신에게 달려오는 월터를 마주한다. 이상한 기분에 다시 집으로 들어온 크리스는 차를 마시던 로즈의 어머니 미시(캐서린 키너)를 만난다.


미시는 심리학자였고 최면술로 크리스의 금연을 도와줄 수 있다고 한다. 크리스는 미시가 그나마 집안 식구 중에 가장 안심할 수 있는 언행을 해왔기에, 반신반의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크리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던 날,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어머니가 죽었다고 자책하고 있다. 마음속에서 자신을 가두던 한 지점이 있던 것이다. 미시는 그 지점에 찻잔 소리를 마킹하며 크리스의 마음을 '침잠의 방(Sunken Place)'으로 떨어트려 버린다. 이 부분에서 영화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로 급히 반전된다. 특히 인간의 의식을 '침잠의 방'으로 떨어트려 버리는 연출은 이전 영화에선 느끼기 힘들었던, 자신의 몸이 자아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두려움을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마치 영화 <그라비티>에서 지구나 우주선으로부터 떨어져 끝도 없는 우주에 떨어지던 그 모습과 유사하다. 자신의 시선이 머나먼 창문처럼 보이는 끝없는 공포가 밀려온다.



침잠(沈潛)은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게 물속 깊숙이 가라앉거나 숨다'는 뜻이므로, 원어에서 sunken이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적절하게 번역한 셈이다. 백인에 의해 말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도록 자의식을 침잠의 방에 가두어지는 모습은, 그동안 백인들이 흑인에게 해왔던 '아프리카 대륙에서 데려와 몸의 자유를 빼앗아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대한 은유다. 그러나 크리스는 다시 로즈의 방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깨어난다. 크리스는 담배를 피우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최면치료가 성공한 것으로 여겼다. 마치 침잠의 방은 꿈이었던 것처럼, 흑인이 노예였던 시절이 아득한 옛날인 것처럼.




겉모습만을 바꾸는 행위

그날 로즈의 부모 친구들인 백인 부자들은 그 집에 모여들었고 파티를 한다. 모두들 백인이었지만 흑인인 크리스를 너무나 반기는 분위기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잘 들어보면 어딘가 어색하다. 괜스레 더 과장해서 자신이 흑인을 좋아하는 걸 어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흑인의 몸이나 흑인의 대상화된 모습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는 그 분위기가 불편하다. 그 와중에 흑인 남자 로건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는 나이 많은 백인 부인과 결혼한 것처럼 보이고, 말투나 행동이 전혀 흑인답지 않다. 크리스가 없는 곳에서 백인들은 빙고게임을 하는데, 마치 그것은 경매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이런 것들로 보건대 최면으로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최면상태의 흑인을 납치해 노예로 만드는 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크리스의 경찰 친구인 로드(릴렐 호워리)는 크리스와의 전화통화를 하면서, 흑인을 최면에 빠트려 성 노예로 만드는 거라 주장한다. 로드의 말투나 캐릭터는 전형적인 흑인 개그 캐릭터이기 때문에 관객들도 헛웃음을 짓게 한다. 크리스 역시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석연치가 않다. 그리고 로즈가 예전 애인들과 찍어둔 사진을 발견하면서 모든 것이 연결되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전에도 계속 흑인을 사귀어 왔었고, 심지어 지금 하인으로 있는 정원사와 가정부도 로즈의 애인이었다.


크리스는 도망치려고 하지만 로즈를 포함한 가족들 전체가 공범이었고, 로즈의 엄마 미시의 찻잔 소리에 크리스는 맥없이 기절해버린다. 그리고 지하실에 묶인 채 갇혀서, 이 이상한 일들의 진실이 담긴 비디오를 시청하게 된다. 로즈의 할아버지는 사람이 뇌를 이식해 영원히 사는 방법을 개발했고, 그러려면 뇌를 이식 받는 쪽에서 최면술을 통해 몸 주인의 의식을 '침잠의 방'에 가둬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즉 이것은 최면술로 사람을 조종하는 것을 넘어서서, 흑인의 몸에 백인의 뇌를 심어 넣는 훨씬 끔찍한 짓이었다!


그제야 이곳에 있던 흑인들이 왜 흑인처럼 행동하지 않는지, 조지나와 월터의 이상한 행동과 몸짓들도 이해가 간다. 그들은 침잠의 방에 갇혀서,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 - 백인이 통제하고 움직이는 것을 어둠 가득한 방에서 조그만 화면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흑인의 몸을 가졌지만 나이 든 백인의 행동을 하며, 때때로 원래 주인의 슬픈 마음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상한 느낌을 줬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백인들은 로즈가 데려온 흑인을 '몸'으로 대했다. 사람으로 대해서 친절한 것이 아니라, 마치 좋은 상품을 대하는 듯한 느낌은 그래서였다.


단순하게 흑인에 대한 혐오나, 흑인 대상 범죄는 이미 끔찍할 정도로 많이 그려져 왔다. 하지만 이것은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바로 백인의 겉모습을 흑인으로만 바꾸는 일, 정치적 올바름을 자본의 논리로 이용만 하는 행위 말이다.



정치적 올바름과 블랙 워싱

미디어에서 PC(정치적 올바름)는 현대인이 미래지향적으로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방식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에 따라 소외된 소수자들을 미디어에 더 많이 노출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올바른 사회 구성원으로 인식하게 도와준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동유럽인들이 범죄자로, 백인은 주인공이나 구원자로 등장하는 영화가 판을 치던 90년대 이전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는 그 인식을 버리기 힘들다. 미디어의 영향력이란 엄청나다. 특히 미디어가 재미있게 잘 만들어져 있으면 그 밑에 깔린 철학을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헐리우드 영화는 이미 미국 내의 미디어 컨텐츠가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미디어 컨텐츠이므로, 그 안에 들어있는 철학이 중요하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꾸준히 흑인이나 소수인종의 미디어 수용성에 대해 논의는 있었지만, 적극 이루어지진 않았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서야 성 소수자나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가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비록 대형 영화 시상식에서는 아직도 흑인이나 소수자가 홀대받고 있는 현실이지만 2019년 <기생충>을 기점으로 많이 바뀌어 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이제는 PC가 돈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더 많은 인종과 다양성을 넣은 영화가, 그렇지 않은 영화에 비해 더 많은 관객이 찾게 된 것이다. 이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디즈니다. 디즈니는 원래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컨텐츠를 만들던 곳이다. 디즈니는 과거에 각 나라의 전래동화를 미국식, 백인 위주로 마음대로 바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성공했다. 하지만 이제 디즈니는 전 세계에 상품을 파는 회사고, 대세는 PC이며 <겨울 왕국>을 기점으로 페미니즘이나 PC가 들어간 새로운 서사를 이어가는 회사로 바뀌었다.


그러나 디즈니가 지금 하는 모습은 예전에 '돈 때문에' 타국의 전래동화를 백인으로 바꿔 만들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블 코믹스의 백인 주인공들을 흑인이나 아시아인, 여성에게 '물려주는' 방식으로 캐릭터를 바꾼 채 그 흐름을 계속 이어간다. 기존에 백인 위주의 이야기였던 동화를, 이야기를 새로 발굴하거나 만들지 않은 채 캐릭터만 흑인, 여성으로 바꾼다. 헐크가 쉬헐크로 바뀌는 것, 푸른 요정이 백인 요정의 옷과 날개를 한 흑인으로, 백인 설화인 인어 중 주인공 한 명만 흑인으로 바뀌는 것이 PC라고 이야기한다. 요점은 그 이야기의 주체가 원래 '백인' 혹은 '남성'위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에 있다. 그 이야기의 본질은 바꾸지 않고 캐릭터만 흑인으로 캐스팅하면 PC를 지킨 것인가? 그게 정말 소수인종을 위하는 것인가? 미국에서도 이것이 PC인지, 캐릭터를 흑인으로 덧칠하는 블랙 워싱(Black Washing)인지 논란이 있다.


BBC의 시리즈 <The Hollow Crown: The Wars of the Roses>의 마거릿 여왕. 흰 피부로 유명한 영국 여왕이지만 흑인으로 캐스팅되었다.

원래 <피노키오> 원작에서 푸른 요정은 '푸른 머리를 한 요정'이었지 금발의 백인 요정이 아니었다. 원작은 모험을 강조하는 이야기지만 푸른 요정을 금발의 백인이 '푸른 옷'을 입은 걸로 바꾸면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지켜야 할 도덕을 더 강조하는 이야기로 바꾸었던 것이다. 피노키오가 나올 당시 미국의 분위기 그대로다. 그런데 여기서 디즈니는 실사화를 하면서 푸른 요정을 흑인으로 바꾸었다. 그것도 백인의 요정 설화 코스튬을 그대로 입힌 채 캐릭터만 흑인으로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에 비하면 거의 동시에 나온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는 인종을 바꾸기보다 메시지를 현대에 맞게 바꾸는 과감함을 선택했고, 그것이 더욱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인어공주>도, 원작에서는 트리톤의 딸들 중에 가장 예쁘고 노래를 잘하는 설정이다. 그래야 원작의 내용처럼 목소리가 없어도 외모로 왕자와 결혼을 할 수 있으니까. 사실 인어공주는 내용 자체가 ‘여성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남자와의 결혼으로 삶의 구원을 얻는’ 이야기라, 현대 진보적인 문화와는 맞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 주인공을 흑인으로 바꾸면 백인이 결혼을 통해 흑인을 구원해주는 서사가 더 추가되는 셈이다. 이야기 자체가 이미 구시대적인데, 이걸 실사화하겠다며 흑인을 '끼워 넣는' 행위들은 <겟 아웃>에서 나온 '겉모습만 흑인으로 바꾸는 행위'처럼 기괴하고 섬뜩해 보인다.


디즈니가 만든 실사화 중에 가장 찬사를 받는 것은 영화 <알라딘>과 뮤지컬 <라이온 킹>이다. 라이온 킹은 오리지널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사자 이야기를 실제 남아프리카 부족의 이야기로 치환하면서 굉장히 독특한 뮤지컬을 탄생시켰다. 비록 디즈니에서 만든 오리지널 이야기지만 아프리카의 이야기이므로 아프리카계 캐릭터가 등장하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뮤지컬 <라이온 킹>은 지금도 최고의 뮤지컬 중 하나다. <알라딘>은 원래 '옛날 옛적 중국에서..'로 시작하는 국적불명의 천일야화 스토리 중 하나지만, 디즈니에서는 아랍 지역으로 통일해서 바꿔버렸고 그걸 그대로 실사화해서 성공했다. 아랍지역이면 지니가 흑인이어도 상관없다. 원래 같이 살고 있으니까. 여기에 자스민의 여성서사가 더해져서, 현대적인 알라딘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 디즈니는 아이들이 흑인 인어공주를 보며 좋아하는 영상을 보여주는 마케팅을 했다. 이건 더 악랄하다. 순수한 어린아이들은 자신과 같은 피부색인 캐릭터가 나오면 당연히 좋아한다. 자신들이 자본의 논리에 이용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런 행위들은 정말 관객들을 '침잠의 방'에 가둬버린다. 미디어 컨텐츠에 PC적인 것이고 진보적인 올바름을 넣었기 때문에, 여기에 반발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PC를 반대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어쨌든 다인종이 들어갔으니 입을 다물어야 한다. 백인 왕실에 흑인이 캐스팅되어도, 백인 동화에서 흑인이 캐스팅되어도, 이상하다는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 그걸 보는 관객들은 영화 <겟 아웃>에서 마치 자신의 몸에 백인이 들어왔는데도 그걸 지켜 보기만 해야 하는 침잠의 방에 갇힌 흑인들 같다.


자본의 논리로 이용되는 PC가 정말 올바른 것일까? 그것은 미셸 푸코가 성 담론을 이야기한 것과 같이, 자본주의와 권력이 민중의 불만을 해소하는 통로로써 PC를 이용하는 셈이다. PC를 제대로 만들려면 흑인이 나오는 새 이야기를 발굴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니까. 그냥, 그들은 기존 이야기에 흑인이 캐스팅되는 게 더 돈이 되니까 하는 거다. 영화 <겟 아웃>에서도 왜 흑인의 몸이 되고 싶냐고 물을 때 그들은 별다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은 생각해보면 더욱 섬뜩하다.


"요새는 흑인이 대세잖아요"





진보적인 가치는 인류가 지향해야 할 지점이다. 약자를 보호하고,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 소외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완벽하게 이상적인 가치가 완성되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가치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사회는 진보적 가치를 또 다른 혐오로 이용하거나, 자본이나 정치적 논리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반인들은 그런 상황에 지쳐서 오히려 2000년대보다 진보를 혐오하고 보수적인 쪽으로 회귀하는 현상이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와 권력이 민중의 불만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진보적인 가치인 척하는 것'에 휩쓸리지 말고, 미디어를 소비하는 관객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에 반대하는 것은 모두 악이다'라는 식으로 반론을 차단해버리는 건 파시즘이나 다를 바 없다. 민주주의의 건강한 가치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마블이나 디씨의 엄청난 팬덤을 영화화하는 것이나, 알려진 동화들, 기존에 유명했던 시리즈에 PC를 입히는 것도 나쁘진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미 기존의 이야기들이 현대적인 문화로 볼 때 메시지가 올드한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무시하고 단순히 겉모습만 진보적인 캐스팅을 하는 것은 관객을 우롱하는 것이다. 최근 PC의 논란이 된 작품들을 보면 내용 면에서 혹평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PC 한 캐릭터를 옛이야기에 무리하게 끼워 넣었기 때문이다. 그건 늙은 백인이 젊은 흑인의 몸에 들어간 것처럼 어색하다.


 현재 정치적 올바름을 가장한 미디어 컨텐츠들은 많은 곳에서 관객들에게 '침잠의 방'에 들어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겟 아웃>처럼 플래시를 터트려야 하지 않을까? '침잠의 방'에서 나와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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