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숨을 위협하는 최강의 적은 최고의 벗과 같은 것."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만화 <배가본드>에서, 당대 천하무적 검성으로 불리던 이토 잇토사이는 이렇게 말했다. 살면서 나와 같은 수준의, 나와의 대결을 즐기는, 그러면서도 나와 공존하기 힘든 라이벌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자 불운이다. 때문에 <내일의 죠>나 <공포의 외인구단>등의 스포츠 만화에서는 정석처럼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어 있고, 추리물에는 주인공 형사와 대적하는 범인, 히어로물에는 히어로와 빌런이 등장한다. 그건 선악처럼 비춰지지만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인 셈이다. 좋은 라이벌은 서로의 잠재력과 기술과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대결에만 치우치다 보면 서로를 파멸로 끌고 가는 사례도 적지 않다.
영화 <프레스티지 (The Prestige, 2006)>는 다양한 라이벌 구도를 담고 있다. 알프레드 보든(크리스찬 베일)과 로버트 엔지(휴 잭맨), 그들은 견습 마술사 시절부터 라이벌이다. 둘 다 마술에 대한 애정과 집착과 자신감이 있고, 둘 사이의 사건들은 그 경쟁을 더욱 부추기며 서로의 마술 속임수(프레스티지)를 알아내고 훔치고 폭로하는 행동을 통해 서로를 점점 더 극단적인 상태로 몰아간다.
이 영화의 두 마술사의 대결은 마치 존 네빌 마스켈린 (John Nevil Maskelyne (1839-1917))이라는 마술사가, 당시에 캐비닛 안에서 심령 마술을 하던 데이븐포트 형제(Davenport brothers)의 트릭을 폭로한 사례를 모티브로 했다.
데이븐포트 형제의 캐비닛 마술 데이븐포트 형제의 마술을 폭로하며 공중부양을 선보이는 존 네빌 마스켈린 데이븐포트 형제는 2개의 나누어진 캐비닛에 묶인 채 들어가, 가운데 캐비닛에 들어간 악기가 연주되는 소리를 들려줘서 심령 마술을 해냈는데, 존 네빌은 그 트릭을 공개하며 자신의 독자적인 여러 마술을 개발했다. 그중 몇 가지는 아직도 여전히 쓰이고 있으며, 그는 독창적인 탈출 마술이나 공중부양 마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데이븐포트 형제는 그 뒤로도 여러 마술사들에게 자신들의 심령 마술이 가짜라는 것이 폭로되었고, 심령술사나 초능력자를 폭로하기로 유명한 위대한 마술사 후디니도 그들을 가짜라고 밝혔다. 그래도 여기저기 전전하면서 마술을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소설 <프레스티지>를 각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동생 조너선 놀란은, 원작의 결말을 영화에 맞게 과학적인 반전을 끌어내는 선에서 마무리짓도록 바꾸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도 M. 나이트 샤말란 못지않게 반전이 자주 나오는데, 놀란은 반전보다는 영화의 소재나 구성이 더 주목을 받아서인지 반전을 그렇게 주목하진 않는 것 같다. 사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보다 보면, 초반에 영화 전체 내용에 대한 복선을 다 깔아주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복선을 눈치채 버리면 초반에 이미 결말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인터스텔라> 영화 시작 부분에서 드론을 잡기 위해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달리는 장면이 영화 전체 내용과 상관없이 되게 길게 나오는데, 그 장면이 영화 전체 내용인 '웜홀을 통해 시공간을 가로질러 오래전 보낸 인류의 신호를 찾아 쓸모 있는 행성을 찾으러 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크나이트를 찍은 놀란은 예산에 압박을 느껴, 프레스티지를 저예산으로 찍었다고 한다. 그래서 특수효과도 상당히 제한적이고 대부분을 실제 로케이션으로 촬영했으며 조명도 거의 현장의 자연스러운 불빛으로 찍었다. 그에 비해 캐스팅은 상당히 화려한 편인데, 특히 주인공 3명이 크리스찬 베일, 휴 잭맨, 스칼렛 요한슨이고 니콜라 테슬라의 조수 역할은 골룸으로 유명한 앤디 서키스이며 테슬라 역할은 무려 가수 故 데이빗 보위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DC의 배트맨과 엑스맨의 울버린이 싸우고 마블의 블랙 위도우가 조수로 나오는 영화라고 하기도 한다. 데이빗 보위는 특유의 오드아이와 포스로, 니콜라 테슬라의 신비한 느낌을 잘 표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 영화의 흥행은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프레스티지>는 아카데미에선 최우수 미술감독상과 최우수 촬영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흥행과는 별개로 평단에서는 평가가 좋은 편이었다.
토머스 에디슨 vs 니콜라 테슬라
사실 이 영화는 토머스 에디슨과 니콜라 테슬라의 관계에 대한 배경지식이 좀 있어야 재미있다. 영화에 잠깐 스쳐 지나가지만, 에디슨이 테슬라를 자꾸 방해하려고 하는 것 같다. 에디슨과 테슬라는 당시 발명·공학계에서 아주 유명한 라이벌이었다. 특히 교류와 직류 전쟁으로 유명한데, 이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 <커런트 워>에 잘 나와있다. 여기서 보면 사실 에디슨의 '제너럴 일렉트로닉스 (GE)'와 조지 웨스팅하우스의 '웨스팅하우스'회사가 진짜 라이벌 관계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테슬라는 GE에 있다가 나와서 작은 회사를 차리고 웨스팅하우스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디슨과 테슬라의 이야기가 더 극적이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런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졌다.
둘의 관계를 간단히 말하자면 테슬라는 교류를 주장했고, 에디슨은 직류를 주장했다. 직류의 전압은 일정하고 교류의 전압은 파형을 그리며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에디슨은 직류가 더 안정적이라 여기고 발전소를 만들며 사업에 들어갔지만, 테슬라가 주장한 교류 전기는 먼 곳까지 전송하기 더 쉽고, 작은 변압기로 전압을 바꾸기가 용이했다. 에디슨도 사실 교류가 더 낫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걸 인정할 수가 없어서 교류는 위험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교류로 동물을 죽이고 전기의자를 발명해 사형수를 처형하는 데 썼다. 결국 사형수는 8분이나 걸려 죽었고 교류의 위험성을 알리는 데 실패했다. 그 뒤로 전류 전쟁에서는 웨스팅하우스가 이겨서, 현재 우리는 대부분 교류 전기를 쓰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에디슨과 테슬라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즉 <프레스티지> 영화에 나오는 에디슨과 테슬라의 관계는 사실 어느 정도 소문에 의해 만들어진 모습이다.
그리고 테슬라는 실제로 에디슨처럼 사업가 같은 스타일이 아니었고, 천재 괴짜 실험 과학자 쪽에 가까웠다. 에디슨은 다른 사람이 발명한 것을 개량하고 산업화하는데 더 유능했고, 또 몇 번이나 될 때까지 실험을 반복하는 걸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테슬라는 꿈속에서로 장치를 고안하고 실험하고, 한 번에 만들어냈다고 한다. 테슬라는 에디슨의 그런 무모한 반복 실험 등을 비하한 적이 있고, 에디슨은 테슬라를 질투했다. 그래도 결국 테슬라는 사업수완이 전혀 없었던 데다가 그가 하려던 프로젝트가 돈이 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무료로 전기를 보급하는 무선전송 탑을 만들려고 했다) 투자자들도 떠나고, 특허는 뺏기고, 형광등의 원리를 발명했으나 실상 형광등을 만들어 돈을 번 것은 에디슨이고... 여러모로 불쌍한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도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쫓기고 돈에 쪼들리는 모습이 나온다.
멋짐이 폭발하는 테슬라(데이빗 보위)의 등장 순간이동 마술기계를 테슬라가 만들어주는 장면은, 테슬라가 등장하는 음모론인 <필라델피아 실험>을 아는 사람들이면 흥미 있어하거나 피식 웃을 부분이다. 테슬라가 사람들에게 실제로 임팩트를 준 발명은 테슬라 코일인데, 고주파 고전압을 발생시키는 장치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거대하고 시끄럽고 아름답고 번개가 치는 변압기인 셈. 그런데 저 테슬라 코일을 이용해서 레이다에 걸리지 않는 선박 실험을 하려 했다가, 배가 순간 이동하게 되었다는 루머가 바로 <필라델피아 실험>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선원들이 배의 벽과 결합되어서 죽었다는 얘기도 있고. 하지만 그 순간이동이나 선원이 죽은 건 모두 거짓 음모론이고, 실제로 실험은 있었지만 별일 없었으며, 지금도 그 기술을 발전시켜 잠수함 등의 자성을 중화시키는 디가우징 기술로 사용되고 있다. <프레스티지>에서는 '테슬라 코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썰이 영화에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관계도, 둘의 경쟁이 기술의 발전에 좋은 것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나중엔 테슬라의 몰락을 가져오기도 했다. 후대에 평가받기로 테슬라가 더 뛰어난 천재성으로 좋은 발명들을 많이 했으나, 둘이 싸우느라 제대로 특허등록도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해 말년에는 가난하고 쓸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창작자 vs 프로듀서
여기서 또 중요한 라이벌은 창작자와, 프로듀서다. 영화의 전체에서 진정한 마술을 다루는 것은 바로 마술사의 마술 조수로 나오는 존 카터(마이클 케인)이다. 사실상 이 사람은 마술을 만들고, 조율하고, 위험상황에 대처하고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프로듀서인 셈이다. 마술사는 그 쇼의 배우와도 같다. 하지만 기술적인 의미의 마술에서만 그는 프로듀서 역할을 할 뿐, 알프레드와 로버트의 경쟁은 그의 능력을 벗어나게 된다. 그 둘이 처음에 조수로 있던 마술사조차 존 카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는데, 알프레드와 로버트는 당시 마술사의 선을 넘어서는 마술을 추구하면서 그의 그림자 역할에서 벗어난 셈이다.
그 또한 창작자와 그를 다루는 프로듀서 간의 힘겨루기라도고 볼 수 있다. 감독과 프로듀서, 소설가나 만화가와 편집자처럼 예술에서는 다양하게 실제 창작자와 그것을 조율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창작자가 프로듀서의 그늘에 가려지게 되면, 실제로 자신의 창작보다는 프로듀서의 말에 끌려다니게 된다. 서로 잘 맞는 프로듀서와 창작자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좋은 작품을 만들지만, 그 역할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기싸움이 지속되면 서로와 작품에 상처만 남긴다.
어느 정도의 역할이 서로에게 어울릴지는 서로의 성향에 달렸다. 어릴 때 만화책을 보면, 완결된 후 만화가가 꼭 '담당기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후기가 나온다. 거기서 보면 담당기자는 독촉을 하기도 하고, 초밥을 사주며 달래기도 하고, 신인에겐 작품의 리뷰를 하며 다시 만들라 하기도 하는 존재로 나오는데 왜 그런 위치가 필요한 지 알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느끼지만 창작자가 작품에 몰입할 때, 전체적이고 실리적인 부분을 다 신경 쓰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럴 땐 그런 창작자를 조율하고 다듬어 줄 좋은 프로듀서가 필요한 법이다.
마술사인 알프레드와 로버트가 프로듀서인 존 카터의 손을 벗어나서 질주하게 된 끝없는 경쟁은, 그들의 몰락을 가져온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프레드 vs 로버트
알프레드 보든(크리스찬 베일)은 머리도 잘 감지 않아 눌린 머리에, 어눌한 입모양을 하며 거들먹거리는 모습은 영국의 하층민이라는 걸 보여준다. 심지어 출신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 그에 반해 로버트 엔지어(휴잭맨)는 항상 깔끔하고 옷도 잘 입고, 매번 공연이 망해서 수입이 거의 없을 텐데도 돈을 엄청 쓴다. 로버트는 마술사를 위한 예명이고 본명은 따로 있다고 한다. 둘은 태생부터가 너무 다르다. 하지만 둘은 마술에 대한 열정으로, 유명한 탈출마술사의 조수로 들어가 일하기 시작한다. 알프레드는 손을 묶는 보조, 로버트는 탈출마술사의 보조, 로버트의 아내 줄리아 엔지어(파이퍼 페라보)는 수조에 손이 묶인 채 들어가는 역할이다.
손목을 묶는 역할이었던 알프레드의 실수로, 줄리아는 수조에서 익사하게 된다. 로버트는 너무나 슬퍼하며 알프레드를 책망한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에 알프레드는 별다른 죄책감이 없어 보이고, 결혼해 아이까지 낳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그것에 더욱 분노해 둘 사이는 점점 안좋아진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는 복수를 한다기보다, 마술사로서의 명예를 망가트리려 하고 그것이 훨씬 더 큰 복수라 여긴 것이다. 이 관계는 서로의 행복을 앗아간 것에 대한 복수로 계속 이어진다.
둘의 경쟁이 끝도 없이 극단으로 치달으며 결국 알프레드가 최고의 마술이라 할 수 있던 순간이동 마술을 선보일 때, 어떻게 하는지 로버트는 알아내지 못한다. 그저 그 장치가 겉으로 전기방전을 일으키는 모습이 있을 뿐. 그래서 로버트는 알프레드의 조수 펠론을 납치해 비밀을 알아내는데, 바로 과학자 테슬라에게 가보라고 한다. 그리고 로버트는 결국 테슬라에게 순간이동장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의문이 몇 가지 생긴다. 로버트는 테슬라에게 얼마든지 줄 만큼의 돈이 있었고, 당시에 테슬라는 이론만 있을 뿐 순간이동장치를 아직 만들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로버트가 오기 이전, 테슬라가 아직 성공하지도 못한 순간이동장치를 돈도 없는 알프레드에게 줬을 리가 없다. 결국 알프레드는, 전기방전이 일어나는 장치인 '테슬라 코일'만을 사서 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알프레드는 어떻게 순간이동마술을 했는가?
알프레드의 순간이동 마술의 핵심은 테슬라 코일이 아니라, 바로 아주 어릴 때부터 이 마술을 위해 출생신고도 안 하고 그림자로 살아온 그의 쌍둥이 형제, 펠론이었다.
알프레드는 마술에 대한 '헌신'을 강조한다. 쌍둥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변장을 바꿔가며 서로로 살아가는 건 그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그건 둘이 완벽히 하나처럼 생각하고, 같은 목표를 향해 헌신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그 순간이동 마술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었고, 그걸 위해 평생을 바쳐온 셈이다. 알프레드는 마술사에 대한 명예와 사랑을 다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로버트는, 돈도 많은 귀족인데 취미로 마술을 시작한 거다. 그 역시 마술에 대한 애정이 있었지만 당연히 알프레드만큼 모든 걸 건 것은 아니었다. 영화 내용에서는 자세히 다뤄지진 않지만, 로버트는 눈앞에서 아내가 익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계속해서 그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그가 보이는 마술에 대한 집착은, 마술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더 큰 것 같다. 그는 세수를 할 때마다, 아내가 물속에서 죽던 모습을 떠올린다.
테슬라가 만들어 준 장치는 사실 순간이동장치가 아니라, 무엇이든 복제되는 장치였다. 그래서 로버트는 자신을 복제해 원본을 밑으로 떨어트려 수조에 가둬 죽게 만들고, 새로운 자신이 무대 밖에서 나타나도록 마술을 짰다. 이 부분이 영화의 첫 시작인데, 로버트는 수조에 갇혀서 도와달라는 말을 하다가 결국 그의 아내처럼 죽고 만다.
사실 이 부분은 소설과 설정이 많이 다르다. 소설은 복제될 때 영혼 없는 시체와 영혼이 있는 몸으로 분리되어 복제된다고 나온다. 마지막도 그의 시체가 불사의 몸이 되어서 나중에 후손들에게 무덤에서 발견되자 도망간다는 설정인데,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부분을 잘 각색한 것 같다. 좀 더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데다 영화에서만 보여지는 로버트의 숨겨진 마음이 드러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장치를 가지고 다르게 마술을 할 수 있었는데 왜 꼭 원본을 수조에 빠트려 죽였을까? 진짜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두려움도 있지만 로버트가 가지고 있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 때문은 아닐까. 몇 번이고 아내가 죽으며 겪었던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을 자책하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복수. 자신은 마술사로 유명해지고 알프레드를 이겨서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를 죽이려면 그냥 죽이면 되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알프레드가 바로 '살인마'라는 걸 알리고 싶었고 그러기에 자신이 몇 번이고 아내처럼 물에 빠져 죽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아내에 대해 보이는 집착은, 순간이동 마술을 할 때마다 결혼반지를 빼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어차피 두 개가 되어도 한쪽은 물에 빠져 죽을 걸, 왜 굳이 빼고 했을까. 결혼반지 자체가 두 개로 되는 걸 인정할 수 없었던 거다. 사랑은 오직 하나여야 가치가 있으니까.
나 vs 그림자
순간이동 마술은 대역을 쓰면 아주 간단하고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알프레드의 마술은 대역 같지가 않았다. 손가락이 잘린 것까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버트는 그 마술의 숨은 트릭을 알고 싶어 했고, 자신은 그 마술에 쇼의 효과를 더 극적으로 만들어서 재미를 주려했다. 로버트는 자신과 정말 비슷하게 생긴 술주정뱅이 배우를 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순간이동 마술을 성공시키지만, 정작 마술이 끝난 후 그는 관객의 박수를 받지 못했다. 마술 구성 때문에 마술이 끝나면 무대 밑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배우였던 대역은 관객의 박수를 받고 쇼를 완성시키는 재미에, 대역의 역할을 점점 벗어나려고 한다.
어느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역할을 나눈, 나와 그림자는 서로의 기싸움보다는 역할을 정확히 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그 마술은 역할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세팅되어 있었다. 한쪽은 이름을 걸고 마술을 하지만 계속해서 관객의 박수를 받지 못하고, 한쪽은 이름 없는 대역이지만 박수를 받는다. 이 기울어진 갈등은 결국 나중에 로버트의 마술을 망쳐버리는 계기가 된다.
그럼 똑같이 대역을 쓴 알프레드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쌍둥이 대역을 쓴 알프레드는, 누가 진짜고 누가 그림자인지 정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역할을 바꿔가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려면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서로 계속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고, 마술을 향한 끊임없는 헌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쪽이 손가락을 잘렸을 때, 망설임없이 다른 쪽이 손가락을 자르는 일은 정말 둘이 하나처럼 살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정말 공유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사랑이다. 한쪽은 아내를 정말 사랑하고 섹스하고 아이를 가졌지만, 다른 한쪽은 아내를 사랑할 수가 없었다. 알프레드가 살면서 실패한 부분은 바로 그 사랑까지 공유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결국 그 갈등은 계속해서 커져 아내를 자살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렇게 완벽하게 나와 그림자가 한 몸으로 살았음에도, 결국 실패했다.
나와 그림자의 갈등으로 마술을 망치고 자신도 절름발이가 된 로버트는 그림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크다. 그래서 순간 이동장치로 인해 생긴 자신의 복사본이 나타날 걸 알고, 총을 준비해 둔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자신과 똑같은 대역이니 둘이 된 시점에서 그만두고 서로 쌍둥이처럼 똑같으니 알프레드처럼 순간이동 마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는 그러지 못했다. 그림자가 나를 침범해 모든 것을 망가트릴 거라는 생각이 자리 잡혀있으니까.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이다. 하지만 그림자 또한 사람이다. 어떤 일을 할 때, 대역이 필요하다면 그 대역이 가져야 할 자세와 헌신을 생각해야 하고, 그림자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큰 일을 할 수 있다.
적당한 경쟁심은 나와 내 라이벌을 자극해 서로가 더 좋은 결과물을 내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모든 경쟁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대부분 현실에서의 경쟁은 진흙탕인 경우도 많다. 나와 라이벌의 현명한 발전을 위해선,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선을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한쪽 빛이 강하면 한쪽은 그림자가 되는 법이다.
과연 나는 빛을 내는 라이벌인가, 그림자인 라이벌인가? 내가 빛이라면 그림자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가? 내가 그림자라면 빛을 벗어날 수 있는가? 라이벌은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스승이자, 나를 위협하는 적이다. 나에게 그런 라이벌이 있다면, 나는 그와 어떻게 살아갈까.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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