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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Jun 20. 2021

<막달라 마리아> 역사 속의 여성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지워지고 오해받은 여성, 막달라 마리아

선사시대는 오히려 여성을 특별하게 생각했지만, 문명사회가 되면서부터 여성에 대한 차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역사 속의 남성들은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여성을 짓밟고 지우려 노력했을까? 요새 한국에 일어나는 페미니즘 논쟁을 제쳐두고라도, 역사에서 여성이 심한 핍박을 받고 살아왔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정치와 종교가 일치되어있던 제정일치 시대에는 여성을 차별하는 정당성을 종교 경전에서 찾았다. 여성차별이 가장 심하다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 계열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가 세계에 가장 많은 신자를 거느리고 힘 있는 국가들의 종교가 된 것은, 안타깝게도 가부장제에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던 여성의 목을 더욱 조른 것이나 다름없다.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Mary Magdalene, 2018)>은 2016년 영화 <라이언, Lion>으로 데뷔한 가스 데이비스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니콜 키드먼, 루니 마라 주연의 영화 <라이언>으로 오스카 상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던 그는 현재 촉망받는 감독 중에 하나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의 OST는 영화 <컨택트, Arrival>로 유명한 요한 요한슨의 유작이기도 하다. 캐스팅도 화려한데, 예수 역할로 호아킨 피닉스, 막달라 마리아로 <캐롤>의 루니 마라가 등장한다. 이처럼 호화로운 영화가 우리나라에는 소리 소문 없이 개봉했다가 사라진 것은 왜일까. 아마 종교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색채가 강해 보이고, 오락적인 요소가 없어 보여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넘겨짚어 이 영화를 지나치기엔 좀 아다. 이 영화는 오히려 종교적 색채를 빼고 실제 그 시대의 예수의 삶과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막달라 마리아의 눈으로 새롭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라는 이름은 신약 성경에 여성의 이름은 아주 소수만 나오는데, 그마저도 마리아가 여러 명 등장해 헷갈리게 만든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또 영화로 나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조금 성경을 아는 사람은 '죄 많은 여자''귀신 씌었던 여자''창녀였던 여자''간음하다 돌로 맞아 죽을 뻔한 여자''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여자'등으로 떠오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성경에서 막달라 마리아라고 정확히 지칭한 여성은 '일곱 마귀가 있었다가 나간 뒤로 예수를 따르는 여자''예수의 죽음을 십자가 밑에서 지켜본 여자''처음으로 부활을 목격한 여자'이다. 나머지는 모두 다른 여성들이 막달라 마리아와 합쳐진 것이다. 즉 창녀도 아니었고 기름 부은 여자도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실제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을 당시, 요한을 제외한 다른 남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다. 그 자리를 지킨 것은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네 명의 여성들과 요한 뿐이었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뒤 시체와 무덤을 관리하던 것도 막달라 마리아였으며, 무덤이 열려 시체가 사라진 것을 처음 발견한 것도 막달라 마리아였다. 성경에는 다른 행적이 나오지 않지만,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부 목격한 증인으로써 정말 중요한 인물이다.


정말 다른 행적은 없을까? 이상하게도 막달라 마리아의 행적이나 중요성이 들어간 문서들은 모두 외경으로 분류되어 신약 성경 목록에서 빠졌다. 일반인들은 신약 몇 권, 구약 몇 권이 원래부터 딱딱 정해져서 소중하게 내려져 오는 거라 생각하는데, 초기 기독교만 해도 구약 모세5경을 제외하곤 성경이라 불리는 복음서와 문서 편지는 수없이 많았고 무엇을 성경으로 해야하는지 정해진 목록도 없어서 다양한 교파가 존재했다. 300년이나 지나서야 대체적으로 '보편적인' 성경을 추렸고, 그중 그리스 철학이나 동양철학. 신비주의 등이 들어갔다고 생각되는 속칭 영지주의 문서들이 빠졌다. 그 문서들을 나중에 이집트 수도원에서 묻어버려 최근에서야 '니그함마디 문서'라고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그중엔 '마리아 복음서'라는 문서도 있다. 이 때문에 사실 근래에 '막달라 마리아'와 관련된 음모론이 많이 생겼다.


마리아의 복음서


이렇듯, 성경 목록은 신이 정해준 것도 아니며 저자가 불분명한 것도 많다. 그 와중에 591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4대 복음서에 나오는 죄지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 베타니아의 마리아를 하나로 합쳐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고 강론했다. 그 해석은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유일한 '여제자'를 지워버리기에 충분했고, 그 해석은 쭉 이어져왔다. 20세기 초 까지도 막달라 마리아는 녀, 죄 많은 여인, 회개한 여인 등으로 인식되었다. 르네상스, 그 이후에도 그려진 막달라 마리아를 보면 대부분 가슴을 드러내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는데, 그건 그녀가 '창녀'와 '예수에게 기름 부은 여자'와 혼합되어 생긴 이미지다. 교황청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성인으로 추대하며 내세운 의의가 '참회의 성녀'다. 따라서 많은 고전 미술작품에 등장한 막달라 마리아는, 실제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여자는 이래야 한다'라고 당시 교황청에서 만들어 낸 이미지에 불과하다.


고전 미술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이미지는 극단적이다. 하지만 사실 어느 것도 정확한 건 아니며, 만들어진 이미지에 불과하다.


게다가 창녀들의 재활원 등으로 '막달레나 공동체''막달레나 수녀원'등이 있을 정도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다가 회개한 여자'로 이미지가 굳혀있었다. 성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라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사도 중의 사도'라고 불리던 막달라 마리아가, 로마 가톨릭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죄 많은 여인, 창녀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개신교에서는 일부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가 아니라 언급하는 곳도 있지만, 개신교의 특성상 결정된 하나의 해석이 있는 게 아니라서 가톨릭에서 내려오던 그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톨릭에서는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죄지은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별개의 인물임을 선언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막달라 마리아를 '중요한 사도의 역할'이라고 인정했고, 지금의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막달라 마리아의 기념일을 축일로 격상하며 사도급으로 인정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공식적으로 12 사도와 같은 예수의 직계 제자이며, 사도와 같은 중요인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사도'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에 '12 사도'라 정확히 지칭하는 명칭과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서 지칭한 사도는 모두 남자였기 때문에 사제는 남자만 해야 한다는 법이 아직도 있다.


이 영화는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쓰였다고 알려진 <마르코 복음서>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있는 <마리아 복음서>를 참고해서 예수의 행적을 재해석했다. 그리고 다른 캐릭터들도 새롭게 묘사했다. 제자들 중에 흑인도 있고, 유다가 배신을 하게 되는 이유도 흥미롭다. 종교적으로 예수를 그리려 하기보단,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만약 예수라는 인물이 실존했다면 실제 상황은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고민이 엿보이는 수작이다. 그리고 경전을 1차원적으로만 해석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일반인과 종교인 둘 다에게 외면을 받는 영화가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의 죄

막달라 마리아 혹은 마리아 막달레나 (Mary Magdalene)라고 하는 이름은, '막달라 지방의 마리아'라는 뜻이다. 막달라는 한때 4만 명이 거주하는 어촌으로 번성하는 지역이었으나, 로마의 침략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노예로 끌려가고 파괴되었다. 예수가 태어난 시대는 이스라엘 지역이 로마에게 철저히 파괴당하고 핍박받던 시기였다.


막달라 지방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남녀가 회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는 모습도 나오는데, 여기서 보이는 가족들 간의 대화와 분위기를 보건대 당시 유대인은 철저히 가부장적인 문화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루니 마라)는 특별한 강함을 가지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닌 타인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고 안심시키게 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여성은 남성에게 매여 살고 있고, 그런 약자의 삶을 사는 동안 자연스레 여성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연대하는 문화와 마음이 길러진 것처럼 보인다.


성경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였으나 예수가 치유해 준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마귀가 들렸다'라는 것은 사실 인간이 해석하기 나름이었다. 마녀사냥도 그런 식으로 이뤄져 왔고, 지금도 일부 목사들은 자신들의 맘에 들지 않으면 '마귀가 들었다'라며 얼토당토않은 폭력으로 '퇴마'를 하지 않은가? 영화에서 이 부분은 철저히 상상에 의한 해석이지만, 당시 시대상을 보면 충분히 그랬을 법하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저, 집안에서 시키는 대로 결혼하는 게 싫었던 거다. 그래서 잠자리가 이루어질 것 같은 밤에 뛰쳐나가 회당에서 겁에 질려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그녀를 '마귀가 들렸다'라고 단정 지어버린다. 남자들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의 수치라고 말한다. 그리고 밤중에 마리아를 물가로 불러내 물고문을 하며 마귀를 내쫓으려고 한다. 막달라 마리아의 아버지만이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했다. 미안함에 그 의식을 그만하라 했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이미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고 마음을 닫았는데, 남자 가족들은 그걸 또 마귀의 탓이라 생각한다.


그 와중에 예수의 말을 듣고 다니던 마리아의 형제가 예수(호아킨 피닉스)를 불러온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를 보고, '너는 마귀가 들린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 단순한 몇 마디의 말로 그녀를 안심시키고, 그녀의 형제들처럼 그녀를 대하지 않고 그저 원하는 것을 물었다. 당시의 여자들은 '여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이 조차 없었을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음이 진정되고, 그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집에서 도망쳐 나와 예수를 따른다.


성경에서는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군중 중에 여성들도 많다고 되어있는데, 영화에서는 그게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성 사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나온다. 사실 그렇게 심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막달라 마리아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여성의 마음을 얻기도 힘들고 외갓남자들을 따라서 길을 나서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막달라 마리아는 여성들을 공감하고 이해해주며 예수의 말을 전달했다고 영화에서 표현하고 있다.


즉, 막달라 마리아가 마귀가 들렸다고 알려진 것조차 여성에 대한 차별의 기록이었을 수 있다. 영화는 아예 '회개하는 성녀'라는 막달라 마리아를 완전히 새롭게 해석했다. 급진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기득권이 신의 이름으로 '죄인'이라고 단정 짓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죄, 마귀, 악마, 마녀를 종교적 문화적으로 해석하기 나름이고 현재에도 얼마나 많이 기득권의 뜻대로 단정 짓는지, 그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받는지. 당연히 이 영화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으로 남은 여성들이 얼마나 왜곡되고 지워지고 차별받았는지 생각해본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교황청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이라고 인정한 것을 보면, 타당성이 없는 건 아니다.




신비함이 없는 예수와 제자들

예수는 첫 등장부터 신기할 정도로 별다른 신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목소리는 병약해 보이고,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옷은 누더기다. 오히려 망상증이나 조현병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좀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호아킨 피닉스가 맡은 예수의 이미지는 그전에 나온 예수의 일생을 다룬 영화들과 사뭇 다르다. 이전의 예수들은 대부분 그림에 그려진 그대로 성스럽고 인자하며 젊고 잘생긴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예수를 다룬 영화에서는 꽃미남이 아닌 예수를 찾긴 힘들다. 아니, 하나 예외가 있긴 하다.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예수를 맡은 윌리엄 데포. 그건 주제가 주제니만큼 예외로 두자.


이전 영화에 나오는 보편적인 예수의 이미지


이 모습은 당시 유대인의 흔한 헤어스타일과 수염의 모습이라, 그렇게 특이할 건 없다. 그러나 당연히 예수는 길을 떠돌고 길에서 자면서 설교를 했을 것이므로, 이 영화에선 머리도 옷도 깔끔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나름의 고증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특별히 잘생기고 잘나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평범하게 생긴 중년 여성 배우가 맡아서 했다. 그러나 그런 점이 이 영화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막달라 마리아>에서 예수는 외관만 독특한 건 아니다. 목소리나 행동도 특이하기 이를 데 없다. 목소리도 힘이 없고, 설교도 요새 목사들처럼 강하고 설득력 있는 웅변을 하지 않는다. 예수는 표정이나 말투의 미묘한 변화와 말의 내용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조용히 설교하고, 군중들을 포섭하고 포교하는 일은 목소리가 큰 제자들이 도맡아 한다. 그리고 예수는 조금만 주변 상황이 복잡해지면 환시를 겪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전혀 제어하거나 수습하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거나 쓰러져버린다.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을 두고 수시로 쏘다니며 혼잣말을 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천사들과 대화하고 계시다'라고 말한다. 이는 실제로 환청과 환시를 겪는 인물을 현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에 영화를 보다 보면 예수는 그저 광인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다. 제자들은 그가 실제로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려냈기에 그를 메시아라고 하며 따르고 있지만, 예수의 행동은 무엇하나 그들의 기대와는 정 반대다. 왜 광기 어린 연기를 자주 보여주는 호아킨 피닉스를 캐스팅했는지, 감독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당시 로마의 침략과 폭정으로 이스라엘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당연히 유대인들은 그들에게서 실질적으로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자들 역시, 예수가 비유를 들어 설교를 하지만 결국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도록 선동을 해서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믿어왔다. '천국(영화에선 영어로 kingdom이라고 하니까 '하느님의 왕국'이라 해석하는 게 더 맞다)이 여기에 임한다'라는 말을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해 평화로운 하느님의 왕국이 될 것이라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그저 환시에 보이는,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광인 같은 행동을 할 뿐이다.

 

또 사도들 중에 제1사도라 불리는 시몬 베드로 (Peter: 피터)는 <노예 12년>으로 유명한 아프리카계 영국 배우인 추이텔 에지오포가 맡았다. 당시 중동-북아프리카 지방은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을 것이므로 피부색이 다양한 것은 당연하다. 한국인이나 북유럽처럼 인종이 외적으로 거의 단일화된 민족은 이런 부분을 상상하기 힘들지만, 중동은 원래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아서 외형으로 '민족'을 구분하는 정체성 자체가 모호했다. 19세기 말에 아랍민족주의가 생겼을 때도 피부색이 아닌 언어로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실제로, 에티오피아에는 자신들이 솔로몬 왕의 후예를 공식적으로 시조로 하고 있는 흑 유대인인 '베타 이스라엘'이 존재한다.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볼 때 12 사도 중에 아프리카계 없으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첫째 사도인 베드로를 흑인으로 묘사한 것은 그동안의 관례에서 보면 파격적이다. 베드로는 현재 가톨릭의 초대 교황으로 추대받고 있기 때문에 로마에서 발생해 백인들의 종교가 되어버린 가톨릭의 시조가 흑인이라고 하는 모양이니 말이다. 물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해, 지금은 비 이탈리아인들이 교황이 되고 있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그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베드로와 유다


다른 사도는 크게 중요하게 나오진 않지만, 유다(타하르 라힘)는 꽤 중요하게 나온다. 예수를 배신해 흔히 고전 미술에서는 악인으로 묘사하는 유다는, 처음 제자로 들어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을 걸어 친절하게 대해다. 영화 전체 내용에서도 유다가 악인인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도 왜 유다가 배신을 하게 되었는지 그 심리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해주진 않는다. 제자들은 모두 고향과 가정을 떠나며 생긴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만큼 예수에게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 절박했다. 그 심정들이 만들어내는 갈등은 영화 내에서 더 성경의 내용을 개연성 있게 만든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사도들 간의 대립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를, 제자들은 딱히 차별하거나 성역할을 강조하진 않는다. 모두들 같이 노숙하고 예수의 뒤를 따른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 있는 예수를 찾아가, 더 깊이 있는 자신의 생각을 질문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서 예수는 그녀에게 더 관심을 두게 되고 그녀가 자신을 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부분은 <마리아 복음서>에 언급되는 부분인데, 가톨릭과 기독교에서는 '영지주의'문서라며 비판하지만 그 철학과 사상의 내용이 신약성경처럼 쉬운 개념만 쓰여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경이나 티벳 사자의 서와 같이 깊이 있는 종교철학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을 잠깐 보자.


마리아 복음서 4장

"... 그러면 물질이란 소멸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천지 만물과 현상을 지닌 모든 것,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은 서로서로 더불어 살아가고 존재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다시 그들 자신의 근원 속으로 녹아들어 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적 속성은 그 물질의 본성만이 홀로 재하는

그 근원으로 들어갔을 때에만 녹아들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당신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해 주셨나이다.

그러하오니 우리에게 세상의 죄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 죄라는 것은 없다. 그렇지만 죄라고 불리고 있는 타락한 본성을 쫓아

일들을 행하면서 죄를 만드는 사람인 바로 너희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근원으로 향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만물의 힘의 정수인 선량함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오는 이유도 그와 같다."


사실 신약성경 내용이나 비유는 현대인에게는 크게 어렵지 않다. 그리고 비유를 들었지만 굉장히 구체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마리아 복음서>의 내용들이 조금 생소하게 보인다. 하지만 영화 중에 이런 부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는다. 다만 대화의 흐름 상, 막달라 마리아가 더 예수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있을 거라는 암시를 줄 뿐이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존재'로 규정하고, 그의 말을 듣기만 하고 그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딱히 질문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각대로 해석한다. 지금 유대인에게 메시아라는 건 종교적, 영성적인 완성을 도와주는 존재라기 보단, 실질적인 로마로부터의 구원을 시켜주는 존재인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도 그런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 오히려 그중에 유다는, 신비주의에 가깝도록 예수를 숭배하는 인물이다. 기적 한 번만 일으키면 로마군들을 다 없애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보여준 예수의 행동은 그저 환시를 겪으며 성전을 파괴하는 광인이었고, 유월절에 모인 사람들을 그들의 뜻대로 예수의 힘으로 봉기를 일으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지만 예수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도망쳐 구석방에서 숨어 유월절을 보내며 조용히 최후의 만찬을 즐겨야 했다. 제자들까지도 예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분이 우리 민족의 구원자인가.


유다는 예수가 기적을 보여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이야기하지만, 예수는 계속 다른 얘기만 한다. 당시 사회상은 '메시'라는 말만 나와도 로마군에게 잡혀갈 정도로 안 좋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유명한 유다의 배신이 나오는데, 로마군에게 예수를 팔아넘긴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온, 누가 예수인지 지목하기 위해 예수에게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예수에게 실망했거나, 예수가 싫어서라거나, 돈 때문이 아니었다. 예수가 계속해서 기적을 미루고 있어서, 로마군에게 잡히는 것처럼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일이 생기면 큰 기적을 보여 로마군을 다 쓸어버릴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자신의 믿음대로 되지 않고 예수가 죽어버리자 유다는 자살을 한다.


또,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가 잡혀갈 때 도망을 쳤다. 막달라 마리아도 두려웠지만, 예수가 말한 '증인'이라는 축복을 따라 용기를 내어 죽음을 지켜보러 간다. 그녀는 십자가에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고, 무덤에 묻고, 무덤을 관리한다. 제자들은 그때까지도 모두 숨어있었다.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3년 동안 따르던 자신들이 따르던 스승이 죽어버렸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으로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실제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것인지, 아니면 환시를 경험한 것인지는 확실하게 나와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부활을 목격했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는다. 이런 갈등 부분은 <마리아 복음서>에 나와있다.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막달라 마리아고, 그녀에게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르침을 전해줬다는 것을 베드로가 믿지 못하며 질투하는 부분이다.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과, 막달라 마리아가 이해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예수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말을 거의 곧이곧대로 이해한 편이었고 막달라 마리아는 비유적이고 현실적으로 해석했다. 그 갈등으로 인해 마리아는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그 이후에 막달라 마리아의 행적은 사실 전설 등으로만 남아있을 뿐 공신력 있는 문서로 정확히 전해지는 것은 없다.

여기에서 종교의 오래된 문제를 알 수 있는데, 바로 영화에서 나오는 베드로와 같은 '근본주의 해석'이나 유다와 같은 '신비주의 해석'이다. 선한 믿음이라는 근거를 가지고 보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모두 자신들의 뜻대로 해석하고 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파기적을 중시하는 신비주의 파가 여전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가톨릭과 기독교도 여전히 과학과 대립하는 부분이 있고 정치적인 문제에서 뒤처지지만, 중세시대의 종교개혁을 겪으며 점점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근본주의, 신비주의는 오히려 그 신앙의 본질보다는 성경과 자연현상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2000년도 더 된 문화를, 진리라는 핑계를 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혐오하고 학살하고 전쟁해 왔는가. 과거 흑인과 여성차별의 근거를 그들은 성경에서 찾았다. 지금도 그 차별은 여전하고, 이젠 동성애를 차별하는 데 근거로 쓰인다. 하지만 성경에 나온 다른 율법-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거나 이혼을 하지 말라거나 등은 자신들의 편의대로 전혀 지키지 않는다. 특히 요새는 백신 음모론 같은 위험한 비과학 음모론까지 주장하며 사회 질서를 위협한다. 대부분의 근본주의나 신비주의는 자신들의 교회를 위해 남을 차별하고, 그 근거로 성경을 이용할 뿐이다. 성경이 진리인 것처럼 말하면서, 해석은 제멋대로인 것을 어떻게 세상을 사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영화에서는 근본주의나 신비주의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만이 현실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한 역사의 과정 속에서 <마리아 복음서>에 쓰인 대로 '감히 여자가'진정한 뜻을 알았다는 것을 인정 못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예수의 여제자'는 지워지고 매장되기에 충분한 것으로 묘사한다. 사도는 남자들로 구성되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도 사제는 반드시 남자만 가능하다. 이제는 너무 오래 지워지고 잊혀지고 기록도 없어져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하긴 힘들지만, 영화 <막달라 마리아>는 여러 정황들을 근거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있을 법한' 이야기를 전해준다고 볼 수 있다. 성경에는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가 프랑스나 서유럽 쪽으로 가서 전도했다는 전설도 있고, 그녀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파가 있다는 설도 있다.




여성이 인간 취급을 받으며 참정권을 얻게 된 지 불과 몇십 년 되지 않았다. 역사 속의 인물들이 대부분 남성인 것은 실제 남성만이 역사에 남길만한 일을 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령 여성이 무슨 일을 했다고 한 들 많은 곳에서 그것을 폄하하고 지우기에 바빴다. 여성뿐 아니다. 종교와 신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죄인'의 낙인이 찍혀서 사라져 갔을까.


또, <마리아의 복음서>의 내용에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 표현했다고 해서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와 결혼하는 여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녀를 다시 '여성'으로 축소하고 폄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서장금이 가장 뛰어난 의녀로써 왕의 총애를 받을 때, 모두들 그녀를 첩으로 삼는 것이 그녀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 했다. 하지만 왕은 그녀를 사모하던 동부승지의 말을 들어, 서장금을 여인으로 취하지 않고 그 능력을 인정하는 '대장금'이라는 호칭의 벼슬을 주어 '어의'에 임명했다. 그것이 그들이 여인으로써 사랑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첩이 되는 순간 서장금은 그저 '지아비에 속한 지어미'가 되는 것이니까.


그 실제적인 차별의 역사를 보려 하지 않고 사람들은 일단'PC(정치적 중립성) 묻었다' '페미 묻었다' '예수와 사도들, 성경을 모독했다'라며 보지도 않고 이 영화를 폄하한다. 그러나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어두웠던 여성차별의 역사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역사 속 대부분의 기득권 남자들은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여성들을 억압하고 지우려고 노력했었다. 사회가 바뀌어가고 있는 이때, 우리는 그런 역사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부족했던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발전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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