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달프다. 매번 같은 고통이 반복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를 만들어 이 고통의 삶을 벗어난 삶을 누릴 수 있는, 진짜 나, 진짜 세상이 있다고 믿었다. 천국, 발할라, 극락, 열반...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과 내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야 현실에서 반복되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었을 테니까.
영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 (Last Action Hero, 1993)>는 그런 삶에 대해 현실과 영화 속을 넘나들며 이야기하고 있다. <다이하드> 시리즈로 유명한 존 맥티어넌 감독은 가벼운 어린이용 코미디 영화로 <라스트 액션 히어로>를 만들었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요새 메타버스로 많이 활용되고 있는 것은 게임이나 SNS지만, 이 영화에선 영화 그 자체가 하나의 메타버스라는 설정이다. 영화는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고, 실제 배우들이 연기한 영상 데이터의 집합체다. 플레이하면 무한히 같은 것을 반복해 연기하고 같은 시나리오가 흘러간다. 우리가 신으로서 영화를 창조했다면, 그 안은 반복된 희로애락이 서린 삶인 것이다.
시네마 키드의 액션 히어로
주인공 대니 메디건(오스틴 오브라이언)은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시네마 키드'로, 오래된 영화관에서 죽치고 살며 본 영화를 또 보고 또 보는 아이다. 또 그 영화관의 영사기사 닉(로버트 프로스키)은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로 대니를 손자처럼 아낀다. 둘의 관계는 마치 <시네마 천국>의 토토와 알프레도 같다. 대니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액션 영화 <잭 슬레이터>이고,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그 주인공 잭 슬레이터(아놀드 슈워제네거)다. 대니는 이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대사를 모조리 외울 정도다. 영화 속 영화인 <잭 슬레이터> 시리즈는 팡팡 터지는 B급 액션물인데, 잭 슬레이터의 멋짐이 폭발하는 액션을 보면 요새 인도영화가 어디에서 영향을 받아서 그러는지 알 수 있다.
절대로 죽지 않는 액션 히어로 잭 슬레이터
대니는 학교에서 고전영화 수업을 듣는다. 선생님은 <햄릿>을 보여주며, 햄릿이야말로 최초의 액션 히어로 중 하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니가 보는 햄릿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대니는 햄릿을 잭 슬레이터로 바꿔 상상한다. 잭 슬레이터의 햄릿은, <잭 슬레이터> 영화 속의 캐릭터처럼 무자비하게 정적을 살육한다.
사실 대니가 영화에 푹 빠진 이유는 현실이 힘들기 때문이다. 이혼하고 가난한 가정, 작고 힘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잭 슬레이터'를 동경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가. 현실에서 다 하지 못한 사랑과 복수, 슬픔과 욕망과 분노를 통쾌하게 터트리고 싶어 영화를 본다. 내가 아닌 다른 현실을 경험하며 위안을 얻으려 영화를 본다. 닉은 영화를 보며 고통스러운 삶을 잠시 잊는다. 대니에게는 잭 슬레이터야말로 더 이상 없을, 마지막 액션 히어로인 셈이다.
닉은 <잭 슬레이터 4>의 필름을 미리 받았고, 상영 전 검사를 해야 하는데 그때 상영 전에 대니에게만 보여주겠다고 약속한다. 대니가 밤에 영화관에 오자, 닉은 오래전 검표원 복장을 하고 기다린다. 그리고 전설의 마술사인 '후디니'가 준 마법의 티켓을 대니에게 물려준다. 마술사 해리 후디니는 탈출 마술을 주로 하는 마술사였다. 그 티켓으로 현실을 탈출해 영화 속으로 들어가거나, 영화 속을 탈출해 현실로 돌아온다는 설정이므로 후디니가 전해준 것이 의미가 맞아 들어간다. 이제 그 티켓을 찢어 사용해 볼 시간이 왔다.
이데아와 동굴 속
대니는 티켓의 힘으로 영화 속에 들어가게 된다. 잭과 마주하게 된 대니는 엄청나게 신나 하지만, 대니는 자신의 말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떠들어댄다. 이곳은 영화 속 세계고, 잭은 인기 영화배우가 연기한 역할일 뿐이라고.
만약 정말로 나 자신만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다면, 아마 보통은 혹시나 자기가 어떻게 될까 봐 아무 말도 못한다. 그리고 말하고 싶어도 이 세계가 패닉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함부로 진실을 내뱉지 않는다. 보통 그런 진실은 이 세계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발언이고, 기득권과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대니는 사실 이 세상의 평화나 안정에 관심이 없다. 상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신난 어린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잘 표현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로지 '나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 '나는 진짜 사람이고 여기는 허구의 세계다'라는 권위의식에 빠져있다. 그러나 영화 속 세계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아무도 자각하지 못한다. 잭 슬레이터가 근무하는 LA 경찰서에는 우리에겐 익숙한 온갖 영화 속 허구의 캐릭터가 즐비하다. 그러나 그 이상함을 아무리 말해줘도 영화 속 사람들은 알 수가 없다. 이는 마치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생각나게 한다.
플라톤은 현상의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데아는 그 사물과 세계의 실재이며 본질이고, 현상은 그 이데아가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은 책 <국가>에서 '동굴의 우화'를 예로 들었다.
동굴 안에 사람이 가운데 장벽에 묶여있고, 맞은편 동굴 벽만 보게 되어 있다. 그 벽에는 장벽 너머에서 비취진 빛에 동물과 사람의 그림자들이 비친다. 하지만 사실 장벽 너머에서는 모닥불을 피워 빛을 내고, 동물이나 사람 모양의 조각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묶여있는 사람이 보는 벽에 그림자를 비추며 놀고 있다. 평생을 그렇게 묶여서 사는 사람은, 그 그림자놀이가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누군가 풀려서 장벽 너머로 가서 그림자의 실체를 보고, 심지어 동굴 밖으로 나가 태양빛을 보고 실제 사람들과 동물을 본다. 하지만 이제 그가 다시 돌아와 묶여있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설파한다 해도, 묶여있던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그림자만 보는 사람들은 현상을 보는 것이고, 풀려나 실제 태양과 자연을 알게 된 사람은 이데아를 본 것이다. 사실 인간이 과학으로 하는 모든 것은 세상의 본질, 즉 이데아에 접근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과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현상이다.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도 현상이다. 그러나 그 두 현상의 본질은 다 중력에 있고, 중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공간을 일그러트림으로 생기는 현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력이 공간을 일그러트림'이 이데아인가? '사과가 떨어지는 것'보다는 이데아에 가깝지만 그것 역시 현상일 수 있다.
대니는 동굴 밖에서 들어온 사람이다. 실제로 영화라는 것이, 어두운 동굴같은 공간에서 뒤에서 비춰진 빛을 벽에 비춰 현실로 믿게 만드는 장치 아닌가? 대니는 이 빛과 그림자들이 허상이라고 외치고, 진실을 알리고 싶지만 평생을 영화 속 배역에 묶여 살아왔던 사람들은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진실을 안다 해도 진실을 전달할 방법이 없다. '전달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에서 또한 고르기아스의 <회의주의 논변>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설령 어떤 것을 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전달할 수 없다.
진실을 알게 하려면 묶여있는 자를 풀어 동굴 밖으로 데리고 가는 길 뿐이다.
이데아를 마주하다
대니는 우여곡절 끝에 잭과 함께 영화 밖으로 나온다. 잭은 영화밖에 나와서야 자신이 허구의 인물이고, 자신이 속한 세계가 허구의 세계임을 알게 된다. 잭 슬레이터의 삶과 고통들은 모두 누군가가 돈을 벌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잭은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다. '동굴의 우화'에 나오는 묶여있는 사람들은 그저 깨닫지 못했어도 실제 사람이었지만, 잭은 '동굴의 우화'에서는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본질,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이 꼭 기쁜 일은 아니다. 때로는 진실은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빨간약으로 마주하는 진실은 고통 그 자체다. 인간이 로봇들의 배터리로 배양되어 살고 있다는 현실. 90년대 후반의 지구 모습은 로봇이 배터리 인간을 정서적으로 안정시키기 위한 허상일 뿐이라는 것. 그래도 매트릭스는 나았다. 본질인 실재는 있지 않았나. 잭 슬레이터는 허구 그 자체다. 영화 속에서 밖으로 나왔다고 해서 잭 슬레이터를 연기한 아놀드 슈워제네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대니는 영화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온 잭 슬레이터와 함께, 영화와 현실이 어떻게 다른지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은 대니도 우리가 볼 때는 <라스트 액션 히어로>라는 영화 속 세계의 인물일 뿐이다. 대니는 자기가 사는 세계가 현실이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볼 때는 그게 또 재미있는 지점이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섬뜩하다. 우리도 우리가 사는 현실이 본질이 아닌, 이데아의 그림자인 '현상'이라면?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이데아를 알려주려 온 사람이다. 예수 역시 인간의 본질을 알고 설파하러 온 사람이다. 현상일 뿐인 우리는 그들을 '혹세무민 한다'는 이유로 죽였다. 힌두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비슈누가 꾸는 꿈이다. 비슈누가 꿈에서 깨어나면 이 세상은 멸망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현상'이 아닌 '본질'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사실 과학이 발전하면서 그것을 더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2017년에는 '홀로그램 우주론'이 과학논문 저널에 발표되기도 했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양자가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픽셀처럼 정수로 존재한다는 것도 밝혀졌다.
영혼, 정신적인 것의 본질뿐 아니라 물질적인 것의 본질에 우리도 다가갈 수 있을까? 현재는 인간에게 의미 있는, 가장 작은 것은 플랑크 길이(1.616229×10^-35m)에서부터, 가장 큰 것은 관측 가능한 우주(456억 광년) 사이에 있다. 그보다 작은 것이나 그보다 멀리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이데아에 근접할 수는 있으나 정확한 이데아는 아니다. 어찌 되었건, 인간은 어느 정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거시적인 '현상'만 보며 살아갈 뿐이다. 우리 역시 '현상'인 이데아의 그림자만 보며 살아간다.
잭 슬레이터는 그곳에서 자신의 이데아,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마주한다.
현상을 넘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현상일 뿐이라서 공(空)이라 해도, 그것이 허무주의로 빠질 필요는 없다. 최근에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동시에 모든 것에 의미가 생길 수 있다. 내가 삶에서 고통을 받을 때, 내가 원한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 때, 내 삶이 후회될 때, 계속해서 반복되는 '내 역할'에 빠진 삶. 이 세상이라는 것이 모든 것의 실재라면 그것들이 오히려 더 절망적이지만, 사실은 한발 더 물러나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다. 우리는 작은 양자의 일시적인 인연에 의해 잠깐 모인 결과일 뿐이다. 원자핵과 전자의 거리를 보면 존재보다 비존재가 훨씬 크다. 이 세상은 그 사이에 가득 찬 에너지의 장이다.
정말 실재하는 이데아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사고와 현상을 넘어선 존재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동굴 속에서 그림자가 비친 벽을 보면서, 동굴 밖으로 나가보진 못해도 저것이 누군가의 그림자놀이라는 걸 깨닫는 것. 불교의 석가모니도 <범망경>에서 세상을 보는 62가지의 견해, 62견에서 그 이야기를 한다. 영혼이 존재하느냐 아니냐, 사후 세계가 있느냐 없느냐, 세상이 영원하냐 아니냐 등으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저마다의 견해가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가지고 그것을 생각하는 자신들의 견해일 뿐이라고. 그런 62가지의 견해의 그물에 걸리지 말고, 그 모두를 통찰하고 넘어서는 것을 반야(般若)라고 한다.
다시 영화의 세계로 돌아온 잭 슬레이터는 이제 자신이 그림자인 것을 안다. 그래도 좌절하거나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다 하며 그 안에서 그것을 벗어난 삶을 산다. 이전에도 그는 절대 죽지 않는 액션 히어로라서 그를 위협하는 건 거의 없다시피 하긴 했지만, 반복적으로 그를 괴롭히는 것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을 사는 대니에게도 마찬가지다. 대니의 현실은 고통이었다. 그것의 도피처로 영화에 빠져들었지만, 이제는 현실의 고통에 당당히 맞서고 자신을 펼쳐갈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영화를 본다. 우리는 현실을 잊기 위해 영화를 본다. 우리는 새로운 시각을 느끼기 위해 영화를 본다. 우리는 '안전한'자극을 받기 위해 영화를 본다.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보기 위해 영화를 본다. 잘 만들어진 영화에 비하면, 내 평범한 삶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 같다. 혹은 답답하고 해결될 일 없는 사건만 가득한 영화.
하지만 내 영화가 사랑과 행복만 가득하다면 거기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 모든 고통들 역시 나라는 현상만 건드릴뿐, 내 본질은 건드릴 수 없다. 내 삶의 영화에 감독이 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현실에 괴로운 일이 생길 때, 소프라노 조수미가 유학시절 가졌다는 마음가짐을 다시금 되새겨보자.
"일이 재미있게 진행되겠구나"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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