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시모프 Feb 25. 2021

<로보캅 2014>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영혼의 발현인가 혹은 세포의 프로그램인가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에 있고 저기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됐고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꿈이 아닐까?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이 단지 환상이 아닐까? 악이 존재하나? 정말 나쁜 사람이 있을까?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나?

언젠가는 나란 존재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이 되는 게 아닐까?"

-<베를린 천사의 시> 중에서-


문득 내가 나임을 알았을 때, 사람은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인간은 무엇인가. 동서양을 관통하는 모든 철학은 바로 이 질문에 답을 하려고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의문은 내면에서 질문을 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탐구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영혼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뇌라고 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들은 허상이라 하기도 한다. 영화 <로보캅>은 몸이 로봇으로 대체된 경찰이, 로봇처럼 감정이 절제된 자아와 감정이 살아있는 자아를 겪으며 '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1987년에 나왔던 <로보캅>은 당시 유행했던 SF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들 속에서 원작 없이 만들어진 작품이다. 또한 <토탈리콜>, <원초적 본능>, <스타쉽 트루퍼스>등 당시 명작 영화들을 꽤나 만든 폴 버호벤 감독의 출세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SF의 명작 반열에 들만큼 뛰어난 연출과 특수효과로 흥행을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후속작들은 감독이 바뀌고 졸작이 되었다. <로보캅>만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와 시대상, 주제의식 등은 독특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속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로봇'이 나오는 영화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블레이드 러너>등에 나오는 로봇-안드로이드와는 다른 이야기다. 어찌 보면 공각기동대의 아이디어의 원천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사이보그'에 관한 이야기다.


안드로이드는 두뇌까지 기계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을 가진 순수한 '로봇'을 말하는 거라면, 사이보그는 두뇌는 사람이고 몸만 기계인 로봇을 말한다. 멀리 서는 <600만 달러의 사나이>가 있고, 최근에는 <저스티스 리그>에 나온 '사이보그'를 생각하면 쉽다. 이전에는 로봇이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로봇을 인간처럼 여기느냐 아니냐가 SF의 주제였다면, <로보캅>에서는 '뇌만 살아있는 나는 인간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공각기동대>에서 주인공 쿠사나기 소좌 역시 계속해서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


후속작들이 삽질하는 와중에도 <로보캅>의 팬들은 항상 영화가 이어지기 바랐는데, 2014년에 리부트 된 이 <로보캅 2014>도 그 프로젝트 중 하나다.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 등 여러 히어로 영화들이 기존에 만들어진 1편을 리부트 하면서 설정이나 CG를 새롭게 하는 게 유행이었어서, <로보캅>도 후속작보다는 '리부트'를 택한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 주제가 좀 달라지게 되고, 결국 뒤로 갈수록 원작보다는 못했다는 평을 듣는- 명작은 아니고 킬링타임 정도로 보면 그나마 괜찮은 팝콘무비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굳이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는, 이 <로보캅 2014>에서는 원작 <로보캅>에서 잘 나오지 않던 '인간의 자아와 의식'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중요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육체와 나

주인공 알렉스 머피(조엘 킨나만)는 정의감 넘치는 열혈 형사다. 때문에 무기밀매조직을 검거하려다 타겟이 되고 그 과정에 사고를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른다. 사실 1987년작에서는 로보캅을 예수에 비유해 만들었기 때문에, 물 위를 걷는 장면이나 손이 날아가는 장면 등 죽음과 부활을 연결시켜 로보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리부트 로보캅에서는 그런 비유는 철저하게 빠졌다. 대신 육체를 잃는 과정에 대한 심리적 묘사가 더 부각되었다. 원작에선 바로 인간적인 면이 전혀 없는 사이보그가 되어 나타나고 나중에 서서히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설정이지만, 여기서는 그 반대다. 아마 시나리오 작업 중에 그게 더 요새 SF추세에 맞는 세련된 감정표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알렉스 머피는 사고로 몸의 많은 부분이 쓸 수 없게 되고 죽어간다. 로봇 경찰을 미국에 도입하려는 로봇회사 옴니코프는 이것을 기회라고 여긴다. 미국에선 한 국회의원의 법안으로 로봇이 경찰을 할 수 없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의 뇌가 살아있는 사이보그를 먼저 도입해 국민들을 로봇에 익숙해지게 하려는 것이 옴니코프의 목표다. 알렉스 머피는 그것에 적임자였고, 부인의 동의를 얻어 장애인 재활용 의족의수를 만드는 데넷 노튼(게리 올드만) 박사와 연계해서 사이보그를 제작한다. 영화 중간에 기계인 부분이 다 떼어지면서 만들어진 로보캅의 실체가 드러나는데, 폐와 얼굴, 뇌, 왼손 말고는 인간인 부분이 없다.


알렉스 머피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충격을 받고 죽여달라 하지만 노튼 박사는 알렉스를 설득한다.

'뇌는 건드리지 않았어, 자네의 영혼은 그대로야'


우리는 뇌가 우리 자신이라 여긴다. 팔다리는 떼었다가 붙이더라도 그게 나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극단적으로 '뇌'만 살아있다면, 그건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나를 이루는 본질에는 내 육체와 연결되는 것이 많다. 호르몬, 장내 미생물, 신경망, 근육, 호흡... 하지만 일반인들은 뇌의 어디쯤 '영혼'이 있다고 믿고, 그 '영혼'이 나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영혼을 건드리지 않았다 라는 말에 알랙스 머피는 설득당한다. 하지만 뒤에 연구원들끼리 대화할 때 '영혼이요?' 라며 비웃는다. 즉 그들은 영혼의 실체를 믿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그저 알렉스라는 개체의 감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필요한 말을 한 것일 뿐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계속해서 죽었다 살아난다. 그래서 수년이면 완전히 새 몸이 되어, 그 이전의 나와 같지 않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세포의 교체주기 중 가장 긴 것은 근육세포로, 15년 정도의 주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심장과 안구, 뇌세포는 그렇게 교체되지 않는다. 내가 나라고 자각하는 '영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육체보다는 영혼에 무게를 둔다. 하지만 과연 육체, 뇌가 달라져도 나라는 것이 똑같이 존재할까? 그리고 뇌 안에 있다고 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의 '영혼'은 정말 육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가?


영화에서는 옴니코프는 로보캅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려면 기존에 이미 존재하던 안드로이드 로봇 경찰보다 사이보그인 로보캅이 우수하거나 최소한 비슷해야 했다. 그런데 알렉스 머피가 아무리 우수한 경찰이었다 하더라도, 기계 센서와 뇌와 기계 몸이 통신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바로 처리하는 게 아니라 '감정'이 들어간다. 우리는 생각이 빛의 속도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생각은 절대 빛의 속도가 아니다. 뇌의 시냅스 연결 간에 전기신호가 전달되는 건 화학물질을 분비해서이고, 전달되는 데는 시간이 소요된다.


그래서 옴니코프에서는 그걸 해결하기 위해, 적과 싸우는 모드로 들어가면 뇌를 대신해 컴퓨터가 몸을 통제하도록 프로그램을 바꿨다. 즉 기계 몸이 먼저 반응해 총을 쏘고, 의식은 그에 뒤따라오도록 선후관계를 바꾼 것이다. 여기가 이 영화의 포인트다. 이를 두고 노튼 박사는 '자신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고 느끼고, 아무 차이를 못 느낄 것이다'라고 한다. 전투 모드의 순간 알렉스 머피라는 의식, 자유의지는 그저 기계 몸에 얹혀 타고 있는 셈이다. 그 순간 뇌는 자기 몸의 OS가 아니라 잉여 프로그램 중 하나일 뿐이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몸의 기관들이나 세포들이 내 명령을 듣고 있을까? 내 명령을 듣는 건 고작 수의근 뿐이다. 내 손에게 커지라고 명령할 수 있나? 심지어 내 기억을 내가 지울 수 있나? 생각해 보면, 나는 그저 근육을 써서 팔다리를 움직이고 이동하고 흔들어대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내 의지보다는, 여러 충동이나 본능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내가 타인에게 성적 호감을 느끼는 것조차 뇌가 아니라 뱃속의 미생물이 관여한다고 한다. 그만큼 내가 내 육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건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몸은 여러 장기들의 명령과 협업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인데, 그 위에서 놀고먹는 잉여 프로그램이 '나''영혼'은 아닐까? 마치 만화 <스머프>에서 왕따 당하는 똘똘이 스머프가 '내가 다른 스머프들에게 일을 잘 시키고 있구나'하고 착각하는 것처럼. 사실 스머프들은 파파스머프의 말을 따르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만 살아있으면 여전히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정말로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기억과 나

정상적인 육신을 가졌던 알렉스 머피와, 90% 이상 기계 몸으로 바뀐 알렉스 머피가 스스로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건 기억의 연결성 때문이다. 만일 깨어났는데 그 이전 기억을 모두 잊어버렸다고 해 보자. 그럼 그것을 알렉스 머피라고 할 수 있을까?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기억상실증은 사람을 완벽히 바꿔버린다. 바로 어제까지 몇십 년을 잘 놀던 사람이, 오늘 나를 보며 나와 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내가 알던 그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이었다고 믿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가 나임을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면, 기억의 연결성이 없다면 내가 나라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그때는 '내 육체의 연결성'을 증명해줄 증인들의 증언만이 유일할 뿐이다.


기억의 연결성이 나타내는 나라는 존재는, 내면적 자아보단 사회적 자아다. 지금까지 살아온 사회 안에서의 내 모습이 '나'라는 사람의 연결성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사회 없이 혼자서 살고 있다면, 내가 나임을 확신하는 건 바로 나의 시선, 의식의 1인칭 시점이다. 따라서, 내가 남들 눈에 비치던 이전의 '나'라는 사람의 연결성을 위해서는 나의 기억이 필요하다. 내 기억이 사라지거나, 특별한 체험으로 내 기억이 새로 생겼다면 과연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전자의 경우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경우이고, 후자는 명상이나 신비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회색의 갠달프가 백색의 갠달프가 된 장면을 생각하면 된다. 갠달프는 회색의 마법사였지만 지옥의 끝까지 추락해 무시무시한 전투를 하고 쓰러지고 나서, 생각도 시간의 존재도 잃어버린 채 하루가 지구의 나이만큼 길게 느껴지며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한다. 그 뒤에 동료들이 '갠달프!'라고 부르자, 겨우 생각난 듯이 '내가 그렇게 불리던 때가 있었지'라며 아주 아련하게 이야기한다. 명상과 각성을 통해 남들이 하지 못하는 체험을 한 사람은 기억의 연결성은 있지만 압축된 체험을 경험하게 되고, 경험으로 인해 달라지는 모습의 시간차가 외부의 사람들과 달라 마치 사람이 변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


기억이 달라지면 '나'라는 사람이 달라졌다고 외부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정말 달라진 것일까? 나는 나일뿐인데, 외부 사람들이 나를 정체화 할 수 있는 걸까?





감정과 나

이 영화에서 '나'를 규정짓는 중요한 것은 바로 감정이다. 알렉스 머피는 중반부까지는 기존의 알렉스 머피와 다를 바 없이 기억과 감정을 모두 똑같이 갖고 있다. 그래서 아내와 아들을 만나고, 몸은 변했지만 여전히 '나'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바로 가족에게 갖는 사랑의 감정으로.


그런데 로보캅을 대중에게 처음 선보이는 행사를 하기 위해, 경찰 범죄자료를 로보캅의 뇌에 업로드하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진다. 처음에 머피는 그렇게 자료가 자신의 뇌에 업로드되는걸 경이롭게 생각하다가, 점점 자신이 사고를 당하던 CCTV 등을 보게 되면서 감정이 격해진다. 그리고 너무 많은 범죄자료가 올라가 감정이 따라가지 못한다. 도파민 수치가 위험할 정도로 올라가고, 결국 머피는 쓰러진다. 바로 행사에 참여시켜야 했기에 노튼 박사는 머피의 도파민 수치를 인위적으로 낮춰버린다. 2%까지 낮춰버리자, 머피는 그제야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노튼 박사의 조수는 이야기한다.


'그러면 껍데기만 남아요'


머피는 우리가 영화에서 흔히 보던 감정이 없는 로봇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도파민은 <로보캅 2014>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지어, 뇌를 가진 인간조차 도파민이 없으면 완전히 기계처럼 행동한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물론 로보캅은 뇌에 공급되는 혈액과 영양소를 컴퓨터가 완전히 제어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능한 거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도파민 수치를 그렇게 자유롭게 제어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도파민이 감정에 관여하는 건 맞지만, 도파민이 수치가 낮아지면 기계적이 된다기보다는 우울증이 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보캅 2014>에선 그 설정을 넘어가려고 해서인지 중간에 우울증 약도 투여하라는 말이 스치듯 나온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감정'이 곧 '나'인가?


도파민 수치가 0에 가깝게 떨어진 머피는 표정도 없고 완벽한 로봇처럼 행동한다. 범인을 잡는 자신의 임무에만 집중한다. 중간에 부인과 아들을 만나지만, 무기가 없고 전과자가 아니라는 체크만 하고 가족을 남 보듯 외면한다. 당연히 부인은 거기에서 '저건 내 남편이 아니야'라고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육체를 가지고 기억의 연속성을 지녔음에도, 감정이나 성격이 달라지면 그 사람을 '너답지 않다'라던가 '내가 알던 걔 맞아?'라고 의심한다. 본인은 전혀 '나'라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도 말이다. 연인 사이에도 감정이 달라지면, 더 이상 상대편을 내가 사랑하던 그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감정과 성격은 경험으로도 변하지만, 호르몬이 감정과 성격에 많은 것을 좌우한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내분비계에서 감정 조절하는 호르몬들 수치가 변한 것일 뿐이다.


미드 <닥터 하우스>에서 한 에피소드에서는, 여성인권운동을 하는 착한 남자가 나온다. 하지만 그 사람의 그런 성격은 결국 병 때문이었음이 밝혀지고, 병 치료를 위해 부족한 남성호르몬을 투여한다. 그러자 성격이 180도 달라져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 된다.


우리는 사람이 믿어왔던 신념이나 성격, 인격은 논리적으로 쌓여왔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사실 거기엔 어떤 논리도 인격도 없다. 그저 호르몬 수치가 그 사람의 성격과 성향까지도 결정한다. 육체와 기억이 동일한데, 사람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달라져 버린 사람에게 '돌아오라'며 호소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달라져버린 건 육체도, 기억도 아니라 호르몬 수치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영혼이라는 것은 호르몬 수치인 것인가?


우리는 '나'라는 것을 특정 지을 때 '체질''성격''성향'을 표현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성격은 엄청난 고유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MBTI 같은 성격유형을 따져도 고작 몇십 개 안에 다 들어간다. 재미있는 건 그런 성격 테스트도 대부분 '그게 너야'라고 말하면, 대충 '내가 그런가 보다' 하고 나와 비슷한 부분만 떼어내 생각하고 믿는 게 대부분이다.


'나를 바꾸는 방법'으로 많이 생산되는 자기 계발서는, 바로 이 '성격'을 바꾸도록 하는 책들이다. 위에서 언급한 '나'라는 것들 중, 유일하게 우리가 바꾸도록 노력이라도 해 볼 수 있는 게 바로 성격이기 때문이다. 호르몬에 쉽게 좌지우지되는 게 성격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노력에 따라서 호르몬 수치를 조절할 수도 있다. 부처가 했다고 알려진 마음 챙김 명상 등을 통해 수행하는 것이, 이런 감정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지켜보는 일이다.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나'가 감정 흐름에 휩쓸려가 버린다면, 그것을 관조하는 '나'를 만들어서 쉽게 흔들리지 않게 만드는 것.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나'를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수행이다.






'나'라는 존재를 특정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지가 않다. 우리는 그저 내 시선과 기억과 성격의 연결성으로 내가 나인 것을 가정할 뿐이다. '나'라는 것조차 어쩌면 육체에서 인지할 수 있는 영역에서 만들어 낸 개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로보캅 2014>를 보면, '나'와 '의식' '자유의지'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간단하게 생각해 왔던 것이 어려운 질문이 되고, 어려운 질문으로 생각했던 것이 간단할 수도 있다.


'나'는 외부의 사람들이 규정짓는, 특정한 성격과 육체를 가진 무엇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지만 그건 굉장히 미약한 끈으로 연결되어있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이 나를 특정 짓는가? 우리가 인공지능을 발전시켜 '인공 의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베다 철학이나 불교에서 말하듯, '나'라는 건 그저 연기(緣起) - 이 순간 인과 율에 의해 우연히 뭉쳐져 있는 덩어리의 집합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하는 나'에 갇혀있는 동안에 아직 나는 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볼 수 없다.


그저 여전히 사유할 뿐이다.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

https://brunch.co.kr/brunchbook/haveyouever2


이전 07화 <쇼생크 탈출> 희망이란 무엇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