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방송은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이었다. 거기선 각자 가진 다양한 탤런트를 뽐내기도 하고, 분야 전문가에게 인정받으며 토너먼트를 통해 서사를 만들어간다. 요새는 한풀 꺾이나 싶더니 트로트나 슈가맨, 싱어게인 등이 또다시 높은 시청률을 차지하고 있다. 음악뿐 아니라 요리도 방송 소재로 자주 쓰이는데, 요리 토너먼트는 한물갔지만 아직도 요리와 관련된 방송은 꾸준한 인기다.
이런 방송에 전문가들이 나와서 항상 지적하는 것이 있다. '진심'이나 '마음'이다. 진심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고 요리를 하면 최고의 예술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 시청자들 또한 그런 서사를 좋아한다. '예술에 진정성 담겨있으니, 그래서 내가 울고 웃는구나!'. 그 진정성은 때로는 어마 무시한 물량공세, 혹은 장인정신, 노력 등으로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드라마 <대장금>에서, 초반에 장금이가 사골국을 끓이는 장면이 있다. 간편하게 종이로 기름을 떠내면 금방 끓일 수 있다고 했다가, 오래 고아 끓이며 기름을 하나하나 건져내 만든 금영이의 사골국에 맛이 못 미쳐 패배했던 경우다. 사람들은 Artist(예술가)와 Artisan(기술가)를 많이들 혼동하곤 한다.
주성치의 영화 <식신(食神, 1996)>은 예술가는 어때야 하는가를 주성치 식의 웃음 속에 버무려 보여주고 있다. <식신>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주성치의 <소림축구>, <쿵후 허슬>의 이전 작으로, 주성치가 무술과 불교에 대해 가지는 철학을 잘 나타내는 영화다. B급 개그 영화이긴 하지만, 상당히 심도 깊은 사회비판적, 권선징악적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이 영화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직전 개봉한 영화라 홍콩영화의 마지막 황금기를 대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내 마니아들은 주성치 영화 중 <서유기>를 가장 쳐주고, 일반인은 <쿵후 허슬>을 쳐주는 사이에 끼어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서비스되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영화에서 주성치는, 자신의 영어 이름 Stephen Chow(스티븐 초우)를 그대로 쓰며 출연한다. 이미 식신을 찍을 때쯤에는 영화배우나 감독으로 대성한 상태여서,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주성치는 사람들과의 교류도 적은 편이고 자신의 사생활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말도 아끼는 편이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주변 풍문이나 영화에 비친 모습으로 밖에 알 수가 없다. 유명한 배우들과 친했다가 소원해지기도 하고, 자신을 비난하는 기사나 발언에 반박하지 않고 침묵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주변에서 주성치를 두둔해 주기도 한다. 잘못에 변명하지 않고 친하다 해도 교류가 적은 타입인 것 같다. 오맹달과 소림축구 이후로 소원해진 것도 많은 루머가 있었지만, 그냥 연락이 뜸해 소원해진 것뿐이라고 오맹달이 루머를 일축한 일도 있었다.
물론 이 영화는 이런 진지한 주제를 다룬다기보다, 주성치식의 완전 병맛 개그가 버무려진 영화이고 결말은 관객을 아주 아스트랄하게 만든다. 특히나 마지막에 심사위원이 주성치 요리의 맛을 표현하는 시퀀스는 요새 예능도 감히 따라잡기 힘든 병맛 연출의 원조를 보여준다. 지금 보더라도 배꼽이 빠질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그럼 대체 이 주성치식 병맛 개그 영화 <식신>에서, 우리는 예술가와 기술가의 어떤 모습을 볼 수가 있으며 대체 기술과 마음은 예술에서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이름값
식신이라 불리는 스티븐(주성치)은 요리대회에서 심사를 맡지만 모든 이들에게 0점을 준다. 그리고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며 자신을 어필한다. 그러나 사실 모든 것은 삼합회와 연결된 사업이었고, 식신이라는 이름값을 이용해 사업을 부풀려가는 사기꾼이었던 것이다. 그가 이전에 식신이 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미식가였거나 음식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는지는 자세하게 나오진 않으나, 아무튼 지금은 오로지 유명세로 음식에 값을 매기는 일을 한다.
사람들에게 식신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식당과 요리들은 맛이 어느 정도 있으니 당연히 잘 팔리지만, 여기서 중요하게 나오는 것은 그의 이름값 때문에 장사가 잘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이들을 하찮게 대하고, 그 과정에서 요리에 대한 진정성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철저히 사업수완이다.
실제로 브랜드 이미지라는 건 정말 중요하다. 백종원처럼 어떤 기업은 사장 자체가 브랜드가 되기도 한다. 요리가 상업적인 제품이라면 예술작품도 예외는 아니어서, 예술가의 이름 자체는 그대로 브랜드가 되어 그 예술가의 작품값을 매기게 된다. 예술작품의 값은 그게 정말 얼마나 철학적인 가치를 지녔느냐보다, 당대의 이슈나 예술가의 이름값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요새는 유명해서 유명해지는 셀럽의 시대다. 왜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SNS 등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즐비하고, 그들이 하는 것들은 돈이 된다.
하지만 결국 유명해서 유명한 것들은 내실이 없으면 금방 잊히기 마련이고, 스티븐도 너무 이름값을 믿고 주변 사람들을 안하무인 하게 대하다 삼합회 회장에게 배신을 당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마음
결국 스티븐은 빈털터리가 된 채 시장바닥에서 구걸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곳에서 노점상 주인 화계(막문위)가 준 싸구려 고기덮밥에 참회를 하게 되고 진정한 맛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화계는 눈앞에 있는 거지가, 사기 쳐서 나락으로 떨어진 식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밥을 챙겨주었다. 화계의 마음이 진정한 맛으로 다가온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마음, 즉 진정성은 중요하다. 내가 그것을 만들 때 정말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 그것을 감상할 대상에 대한 마음, 작품의 스토리에 몰입해 빠져드는 것 등이 얼마나 예술을 '진짜'로 만드는지, 우리는 그런 것들을 수많은 미디어에서 접해왔다. 진정성이 들어가면 그 어떤 기교나 테크닉도 못 따라올 정도로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달해 준다는 것 말이다. '집밥이 가장 맛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야' 같은 이야기들은 영화, 드라마, 만화, 예능에서 정말 많이 나온다. 오디션 프로그램 KPOP-STAR에서 '공기반 소리반'을 외치던 박진영도, 참가자의 마음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심사위원 중에 하나였다.
어설픈 전략적 접근으로 예술을 한다기보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감동을 받았던,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 보여주고 싶어 안달 난 것들을 예술 속에 녹여내면 대중들은 그것을 알아준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마음은 진실이고, 진실된 예술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다른 '마음'이 있다. 바로 돈이나 수완에 신경 쓰기보단,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예술은 혼자서 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마음을 담았어도 예술은 팔리지 않으면 아마추어의 취미일 뿐이다. 그러기에 프로 예술가라면 상업성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현재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반 고흐의 작품에 감동하곤 하지만, 그는 살아생전 동생이 사준 것 말고는 그림 한 장 팔린 적이 없었다. 그가 남긴 편지로 그림에 대한 열정과 마음을 고흐의 처제가 알리게 되고, 후대에 인정받으면서 그림의 가치가 올라간 것이다. 현대에는 살아서 인정 못 받다가 죽어서 인정받는 경우는 없다. 돈 많고 유명한 예술가가 그냥 더 유명하다.
그러기에, 인성보단 사업성 - 어떻게 하면 더 유명하고 어떻게 하면 더 잘 팔리는 예술을 할까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열정 페이를 강요한다든지, 나를 키워준 사람을 배신한다던지, 대리인을 세워서 작품을 대신 만들게 한다던지 하는 일들이 생긴다. 그런 것은 예술 뒤에 숨겨진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지니지 못한다면 자신 역시 똑같이 배신당하고 이용당할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은 자신을 대변한다. 실제 배우 주성치도 삼합회의 압력에 못 이겨 2년 동안 12편의 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영화 속 스티븐이 돈만 추구하며 삼합회와 결탁해 사람을 무시하고 음식에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마구잡이로 지점을 늘리는 모습은 마치 당시 자신에 대한 반성과도 같다.
결국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는 예술은 오래가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기술
식신 대회 날, 스티븐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 도인처럼 등장한다. 스티븐은 최고의 요리사가 되기 위해 전전긍긍하다 소림사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스티븐은 소림 18 동인에게 이유 없이 주야장천 얻어터진다. 어쨌든 스티븐은 한 달 사이에 엄청난 무공을 익혀서 돌아왔고, 무공으로 요리를 시작한다.
일반인들이 예술에서 '마음이 중요해'라고 말하지만, '마음을 표현할 기술'이 없다면 그것은 한낱 아마추어의 울부짖음에 불과하다. 감정을 담아서 하는 노래에는 사실 가수의 대단한 기술들이 숨겨져 있다. '기술''테크닉''기교'라고 하면 보통 알앤비 가수들이 마구 음을 꺾거나, 엄청난 고음과 성량을 자랑하는 걸 생각하기 쉽지만, 자신의 온 마음을 담아 감정이 넘치는 노래를 하면서도 아주 찰랑찰랑하게 담담하게 부를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기술이다. 가수 오디션 프로 보면 자주 나오지 않는가. 관객을 울려야 하는데 자기가 먼저 울어버리는 참가자. 그건 기술보다 마음이 앞선 것이다.
이 '마음'과 '기술'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고 잘 표현한 이야기는 바로 스즈에 미우치의 만화 <유리가면>이다. 이 만화는 연극배우로서 주인공 기타지마 마야와 라이벌 히메가와 아유미가, 명 연극 <홍천녀>의 주연배우가 되기 위해 대결하는 내용이다. 주인공 마야는 배운 것 없지만 엄청난 재능이 있고 온 마음으로 배역에 빠져들어 연기를 하는 반면, 아유미는 기술적으로 연기하는 법을 익혀 당대 최고의 배우로 올라선 사람이다. 이 둘이 대결하는 과정 중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로, 그 둘의 스승인 치쿠사는 여전히 기술이 뛰어난 아유미가 홍천녀 후보로서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홍천녀는 인간이 아닌 신이므로, 신체를 다루는 테크닉이 최고여야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담은 요리를 한다고 해도, 요리에 대한 지식 없이 요리를 한다면 잘된 요리가 나올 턱이 없다. 어떤 것이든 예술을 할 때는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는 연출이 필요한데, 그 연출은 섣부른 마음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장치와 테크닉이 같이 들어가 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장인정신 기술이 가득해 보이는 달인의 작품 등을 보면서 '저건 예술이야!'를 외친다. 하지만 기술이 단지 기술로만 보일 뿐이라면, 완벽한 기술이 아니다.
충분히 숙련된 기술은, 마음과 구분할 수 없다.
사실 예술을 한다는 것에서 무엇하나 중요하지 않은 건 없다. 그러나 관객은 우리가 가진 어떤 환상과 편견으로 '진실성'을 전달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무리 진실하다 해도, 표현되지 못하는 마음은 마음이 아니다. 예술은 작가가 관객에게 건네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주성치는 개그를 연기할 때 애드립으로 하지 않고, 철저히 시나리오대로 계산해서 한다고 한다. 그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병맛 개그도 다 연출된 기술이라는 거다. 주성치 자신이 몸소 예술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에게 진심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난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는데'같은 말은 허공에 외치는 메아리와도 같다. 사랑했다면 그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그것도 나 자신의 마음만 앞서는 게 아니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고 표현해야 한다. 결국 모든 것은 이 영화의 첫 장면에 들어가 있다.
엄청난 테크닉으로 만들어 낸 마음. 그것이 예술의 본질이다.
* 이 글은 <사소하지만 무거운 영화들> 브런치북으로 발간된 글입니다.
영화 리뷰와 인문학을 접목한 재미있는 글들이 많으니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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