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말고 while (4&5)

나는 아픈건 딱 질색이니까 - San Francisco(Scott Mc)

by 박경민


4. 사랑했지만


K는 그 후로도 한동안 애매한 관계로 그녀 곁을 맴돌았지만, 조금씩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졸업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며,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삶이 시작되었고 자연스레 연락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미연 역시 그에게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므로 둘의 관계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계절이 몇 번 바뀌었다.

미연은 업무에 치이며 '오늘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매일을 견디고 있었다.

일 자체는 괜찮았지만, 하루하루가 마치 정해진 패턴처럼 무한히 반복됐다. 기획안을 들고 광고주를 만나 웃는 얼굴로 피드백을 받고,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어김없이 반복되는 상사의 지적을 견뎌야 했다. 회사는 늘 동료들과의 경쟁을 유도했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앞질러야 한다는 압박과 뒤로 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을 심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는 삶.

어떤 날은 하루 전체가 투명하게 지나가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불만은 아니었다.

다만 무뎌진 감각 속에서 ‘이게 맞는 걸까?’라는 의문이 가끔 떠올랐다가 이내 가라앉을 뿐이었다.

가끔은 누군가를 만나기도 했다. 소개로, 업무 인연으로, 아주 드물게는 스쳐 지나던 용기 끝에서. 하지만 그 어떤 관계도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나 어딘가 부족했고, 그 부족함은 결국 상대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은, 더 큰 공허로 되돌아왔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음에도, 삶이 나아지거나 무엇 하나 해결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어디든 멀리 떠나고 싶다는 충동만이 점점 더 그녀의 가슴을 채워갔다.

그렇게 연말이 가까워오던 어느 날, 정말 오랜만에 K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누나, 잘 지내요?'

그 짧은 문장 하나에, 미연은 자신도 몰랐던 그리움이 조용히 번져오는 걸 느꼈다.

마치 비워둔 줄 알았던 서랍 속, 낯익은 종이 한 장이 다시 펼쳐지는 듯했다.

미연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응, 오랜만이다.”라고 답장을 보냈고, 짧은 근황을 주고받는 사이, 둘은 오래된 리듬을 다시 기억하듯 자연스럽게 만남을 약속했다.

그녀는 그 밤에 주고받던 그의 문장 속에서 그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용한 평일 저녁, 신촌의 작은 카페.

미연과 K는 거의 일 년 만에 다시 만났다.

미연의 자리 앞에는 K가 주문해 놓은 따뜻한 라떼가 놓여있었고, 대기업에서 신입 시절을 막 벗어난 K는 전보다 훨씬 단정하고 어른스러워진 모습으로 그 앞에 앉아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예전처럼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편안한 공기가 흐르는 자리였다. K는 여전히 느릿느릿 말했고, 커피를 마시는 동작에도 서두름이 없었다. 회사 이야기를 나누고, 요즘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대학생 시절을 추억하며 한참 수다 같은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 대화 끝자락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미연이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나, 미국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말끝에는 묘한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K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되물었다.

“미국?”

미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예전부터 그런 생각은 있었는데... 잘 안 되더라. 유학도, 취직도, 쉽지가 않더라고.”

그 말 뒤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미연은 창밖의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치만… 여전히 그러고 싶어. 낯선 도시에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 그러면, 나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건 그저 ‘희망’이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닿기 어려운 꿈.

그리고 요즘 들어 그녀의 마음속에 자주 고이는 공허와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도피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만큼은 그 이야기를 K 앞에서 꺼내고 싶었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 아주 은밀하게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뭔가 해주기를.

자기 대신 그 세계를 향해 나아가 주기를.

그러니까, 아직 예전의 마음이 남아있다면, 그걸 증명해 보이기를.

K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머릿속 어딘가에서 흩어진 퍼즐 조각을 다시 맞추는 사람처럼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그는 말끝을 삼키듯 잠시 침묵했다.
“요즘 외국계로 이직 알아보고 있었어요.”

미연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K는 그녀를 바로 보지 못한 채 잠시 시선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쥔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회사도 나쁘진 않은데… 확신이랄까?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인가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뭔가…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물고 있는 기분. 그래서 좀 더 넓은 곳에서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어요.”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작은 침묵의 시간 동안, 둘 사이의 공기는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가 말을 고르며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내가 만약 미국에 취직해서 자리를 잡는다면…"

조심스럽게, 그러나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나랑 같이 가줄래요?”

K의 표정엔 단단한 결심과 조심스러운 기대가 동시에 어른거렸다.

다시 한번 다가서려는 용기와, 또다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충돌하는 것처럼.


반면 미연은 그의 말에 놀라지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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