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2)

닫힌 기억

by 박경민

2화. 닫힌 기억


열한 살의 수연은 똑똑한 아이였다.
그녀의 똑똑함은 단순히 시험지의 정답을 골라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수연은 세상의 모든 현상 뒤에 숨겨진 ‘법칙’을 읽어내는 데 능숙했다. 아빠가 현관문을 열 때 나는 열쇠 꾸러미의 짤랑거림이 몇 초간 지속되는지,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며 식기를 다루는 소리가 얼마나 거친지를 통해 그날 저녁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수연에게 일상의 소리나 말투, 표정에서 느껴지는 것들은 감정이라기보다, 늘 감지되는 어떤 신호 같았다. 그리고 그 신호들은 언제나 같은 순서로 나타났고, 같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작은 어긋남은 큰 소란으로 번졌고, 짧은 침묵은 긴 밤으로 이어졌다. 이 집에서는, 세계가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적어도 수연이 겪어온 시간은 늘 그랬다.

수연은 집 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성적표에 찍힌 '올 수'는 아빠의 기분을 맞추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고, 동생 수민의 울음을 미리 달래놓는 것은 하루를 무사히 마치기 위한 가장 안전한 방어였다.

그녀는 언제나 눈치를 보며, 불행이 비껴갈 좁은 틈새를 찾아냈다. 친구들이 동화 속 기적을 믿을 때, 수연은 자신의 느낌과 계산을 믿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노력에도 일어날 일은 언제든 일어나곤 했다.


그날, 거실에서 첫 번째 접시가 비명처럼 깨졌을 때, 수연은 이미 오늘이 여느 날과 같지 않음을 느꼈다. 아빠의 술 냄새, 엄마의 떨리는 음성, 그리고 공기 중의 습도와 흔들리는 조명. 이 모든 것들이 어린 그녀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주었고, 피부에는 어느새 소름이 돋아있었다. 어린 그녀는 ‘재앙’이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그 단어가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랐다.

“수민아, 이리 와.”

수연은 거실에 멍하니 서 있던 다섯 살 수민의 손을 낚아챘다. 수민의 손은 작고 축축했다. 울기 직전의 아이들이 늘 그렇듯, 체온보다 불안이 먼저 전달되는 손이었다.

수연은 동생과 작은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 밖에서는 파괴의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수연은 자신보다 더 어리고 연약한 동생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예전에 이랬던 날들이 떠올랐다.
아빠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접시가 먼저 깨졌고 그 다음에는 문이 쾅 닫혔고 그 다음에는 누군가 울었다.

수연은 알고 있었다.
지금 나가면 안 된다는 것.
말을 걸면 더 커진다는 것.
울면 들킨다는 것.

동생을 꼭 안은 채, 수연은 생각했다.
움직이지 말자.
숨소리도 작게 하자.
여기 있다는 걸 들키지 말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수연은 문 뒤에 서서, 이 문이 열리는 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벽인 것처럼 가만히, 아주 가만히 서 있기로 했다.

최선의 선택은 이 문이 벽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수연은 ‘절대로 열리지 않아야 하는 문’ 뒤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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