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1)

고정된 문

by 박경민

1화. 고정된 문


"언니, 오늘도 퇴근하고 바로 올께."

수민은 언니를 안고 토닥여주며 말했다.

수연은 자신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수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천천히 와도 돼'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동생이 출근하고 나면 집은 조금 더 작아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도, 그녀는 한동안 거실에 서 있었다. 현관 쪽을 바라보는 일은 습관에 가까웠다. 문손잡이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고, 엘리베이터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야 몸이 풀렸다.

21평 작은 아파트는 현관 입구에서부터 작은방, 욕실 겸 화장실, 침대가 놓인 안방으로 이어졌다. 안방 옆으로는 안방보다는 조금 작은 거실, 그리고 싱크대가 놓인 주방, 다용도실을 거쳐 다시 현관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거실과 베란다를 분리해주는 커다란 창틀과 방금 동생이 닫고 나간 현관문을 제외하고 집 안쪽의 모든 문들이 활짝 열려있었다. 벽에 붙어서 단단히 고정된 채로.

수연은 동생이 출근하고 난 뒤, 집 정리를 시작했다. 먼저 아침을 먹은 식기들을 설거지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 청소기를 들고 집 구석구석을 다니며 바닥에 쌓인 먼지를 빨아드렸다.

베란다 창으로 6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들이치며 집안을 밝게 비추었고, 햇살을 받은 먼지들은 허공 위를 떠다니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지만, 수연은 창문을 열지 않았다.

청소가 끝나자 시간은 이미 10시가 넘어 있었다. 무더워진 날씨에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답답한 숨이 가슴을 조금 빨리 뛰게 만들었다. 수연은 욕실로 들어가 입고 있는 옷을 하나씩 벗어 빨래통에 넣고 샤워를 시작했다. 미지근한 물줄기가 머리를 흠뻑 적시고는 유난히도 희고 고운 그녀의 몸으로 흘러내렸다. 샴푸를 하고 몸 여기저기를 바디워시로 씻어내려갔다. 바디워시의 하얀 거품이 그녀의 몸 위에서는 그닥 하얗게 보이지 않았다. 개운하게 씻고 욕실 거울 앞에 서서 물기를 제거하고는 수건을 둘렀다.

그녀가 샤워를 하는 내내 욕실 문은 열려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수연은 거실 구석, 해가 가장 잘드는 곳에 놓인 올리브 나무 앞에 섰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그녀는 아직 물기가 남은 손으로 올리브의 은회색 잎을 하나하나 살폈다.

6월의 태양은 베란다 창틀을 녹일 듯이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열기에 일렁이며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수연의 거실은 정적 속에 박제된 채 서늘했다. 그녀는 화분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올리브 나무는 이 집에서 그녀와 가장 닮은 존재였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타버리거나 꺾여버릴 것이 분명한 생명, 그래서 오직 이 닫혀진 시공간 안에서만 안전할 수 있는 존재.

수연은 분무기를 들어 잎사귀에 아주 세밀하게 물을 뿌렸다. 잎에 맺힌 물방울이 거실의 인공적인 조명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답답하지?"

그녀가 작게 읊조렸다. 마음 같아서는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 시원한 바람과 강렬한 태양빛을 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창문을 여는 순간,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소음과 냄새, 그리고 보이지 않는 위협들이 이 21평의 안식처를 더럽힐 것만 같았다. 수연에게 창문은 외부를 보는 통로가 아니라, 침입을 막는 방벽이었다.

수연은 올리브 나무가 심겨진 화분의 흙으로 손을 뻗었다. 바싹 말라 단단하게 굳어진 흙의 건조함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물을 언제 줬었지?'

마지막으로 물을 준게 나흘 전이라는걸 깨닫고는 들고있던 분무기를 내려 놓고 물조리개에 물을 받아 화분이 촉촉해질만큼 물을 주었다.


그녀는 여름 옷을 챙겨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 활짝 열린 방문들을 하나씩 응시했다. 안방, 작은방, 그리고 방금 나온 욕실까지. 모든 공간이 시야 안에 들어와 있어야만 심장이 정상적인 속도로 뛰었다. 그녀는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들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얇은 셔츠 위로 물방울 몇 개가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은빛으로 빛나는 올리브 나무를 좀 더 바라보다가 주방으로 자리를 옮겨 냉동실 문을 열었다. 차가운 냉기가 수증기를 만들며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냉동실 안으로 손을 넣어 얼음 트레이에서 투명한 얼음 일곱 알을 꺼내 유리컵에 담았다. 뜨거운 커피를 내린 후 커피를 얼음이 담긴 유리컵에 부었다.

뜨거운 커피가 얼음에 닿자, 얼음이 순간적으로 녹아내리며 쨍그렁하는 소리를 냈다. 수연은 유리컵에 차가운 물을 채운 후 책장에서 책을 한권 골라 다시 소파에 앉았다.

이제 오후는 이렇게 책을 읽으며 흘러갈 것이다. 동생이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기 전까지는.

유리컵 겉면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수연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책장을 한 장 넘겼다. 활자들은 질서 정연했고, 거실의 공기는 안전하고 포근한 안식처의 느낌을 품고 있었다.

오후 2시.

동생이 돌아오려면 아직 네 시간이나 남았다. 수연은 다 마신 커피 잔을 씻어서 선반 위에 올려두고는 다시 책 속으로 침잠하려 했다. 양자컴퓨터에 관한 책이었다. 수연은 이 책이 어렵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짜장과 짬뽕 사이에서 번민하고 있는 나’라니. 미소가 지어졌다. 수연은 멀리 떨어진 시공간에서도 서로의 상태에 바로 반응하는 ‘얽힘’이라는 현상에 대해 신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정적의 한복판을 날카롭게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쿵.

수연의 손끝이 움찔했고, 붙잡고 있던 책장이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그녀는 모든 것을 멈추고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했다.

아까보다 훨씬 날카로운 파열음이 일었다. 그녀는 숨을 멈췄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쿵쿵! 쿵쿵쿵!

이번에는 더 급하고 거칠었다. 현관문의 두꺼운 철판을 타고 넘어온 진동이 거실 바닥을 타고 수연에게로 전달되었다. 수연은 그 진동이 발끝에서부터 온 몸으로 전해지는 걸 느꼈다.

사고가 순식간에 정지했다.

6월의 열기조차 침범하지 못했던 거실의 건조한 온도속으로 이질적인 파동이 번지며 수연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누구지? 동생일 리 없다. 택배라면 벨을 눌렀을 것이다.’

수연은 소파에 붙박인 듯 앉아 활짝 열린 방문들을 훑었다. 안방, 작은방, 욕실. 모든 문이 열려있어 집안에 숨을 곳은 없었다. 퇴로가 차단된 짐승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현관문 너머의 누군가는 이제 문고리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철컥거리는 금속음이 거실의 정적을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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