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시간과 거리의 관계(1)
선물
3월 15일.
"무언가 필요한 거 없어요?"
우리가 봄볕을 즐기며 함께 아파트 단지를 걷고 있을 때 그녀가 물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물음을 듣고 빠르게 머릿속을 뒤져보았지만 최근에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필요한 거? 딱히 없는데."
나는 유난히 볕이 잘 드는 곳에 드믄드믄 핀 노란 산수유 꽃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봄이 오는가 싶더니 다시 칼바람이 불고, 봄이 왔나 싶다가도 다시 눈발이 날리는 심술 맞은 최근의 날씨였으나, 볕은 어느새 온기가 가득해져 있다. 내가 입고 있는 얇은 검은색 패딩의 등 뒤로 전해지는 따스함 그리고 나의 발걸음에 맞추어 나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발 밑 그림자의 선명한 경계를 통해 그 온기를 확 느낄 수 있다.
나는 문득 어렸을 적에 돋보기를 이용해서 이 온기를 모아 신문지에 구멍을 내고 불꽃을 피웠던 기억이 났다. 혹시 불이 날지 몰라 수돗가 근처에서 바가지에 물을 한가득 퍼 두고는 돋보기를 손에 들고서 햇빛을 한 지점으로 모아 불 만드는 놀이를 했었다. 신문지에서 연기가 슬슬 피어오르다가 공기 중으로 사라질 때 났던 종이 타는 냄새가 코끝에서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필요한 거 없다고 할 줄 알았어."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금도 충분히 좋아"
왼손을 통해 봄볕만큼이나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손을 맞잡고 계속 걸었다.
한 오분쯤 지나 단지 앞 상가에 거의 도착하여 횡단보도 앞에서 초록색 신호를 가다리고 있을 때, 맞은편에 자전거를 탄 학생이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전거 탄 학생을 보더니 말했다.
"이제 겨울도 끝났으니 다시 자전거를 좀 타야겠어."
그녀는 말이 끝나자마자 집에 가스불을 켜두고 온 것이 생각난 것처럼 갑자기 내 손을 확 잡아끌더니 몸을 돌리며 나를 보고 외쳤다.
"아! 자전거!"
그녀는 봄이나 가을에 날이 적당할 때면 언제나 그녀의 동네에서 멀리까지 자전거를 타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와 함께 자전거를 타면서 계절과 풍경을, 그리고 날씨를 즐기고 싶다 말하곤 했었다. 나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같이 타고 싶다고 했었고...
그래서 자전거라는 그녀의 외침을 듣자마자 난 '오!'라는 생각이 들며 "딱인데!"라고 대답해 주었다.
나보다는 자전거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녀가 어떤 자전거면 좋을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동의 편의성을 위해 접이식이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미니 벨로 스타일은 별로다.', '가격은 너무 비싸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딱 맞는 자전거를 골라주겠다.'며 왠지 활기가 넘치는 표정이 되어 있다.
우리는 내일 오전에 동네 자전거 매장에 가서 직접 한번 보자고 약속했다.
"오빠가 필요하다고 하는 게 있으니 편하구만."
그녀는 며칠 후 내 생일에 맞추어 '무슨 선물을 해줄까?'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여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항상 가지고 싶은 게 있었다.
그래서 나는 딱히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생일 선물로 정했다. 처음에는 생일날에 맞춰 선물을 주었지만 요즘은 어차피 살 거 빨리 사주면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잘 쓸 수 있다면서 한 달 전이고 두 달 전이고 구매해서 선물해 준다.
작년이 아마 자전거 탈 때 쓰고 싶다면서 스포츠 고글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보라 했고 그녀는 며칠 후 마음을 정했다며 나를 이끌고 어떤 매장으로 향했다. 그녀의 생일이 한달도 더 남았던 날이였다. 나는 '이거 생일 선물이야.'라고 강조하며 고글을 선물해주었고, 그녀는 꼭 필요했던거라면서 매우 기뻐했다.
그 후 어느 날씨가 좋았던 날에 그녀는 몸에 딱 달라붙는 스포츠 웨어에 헬멧을 쓰고 스포츠 고글까지 끼고선 자전거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너무 마음에 든다고 공유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햇빛이 강해서 고글 없었으면 찡그리고 다니느냐고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해질뻔했네."
"여름 바닷가에서도 눈 안 부시고 너무 좋네 ㅎㅎ"
"가을이라 날파리가 성수기인가 봐. 고글 없으면 눈을 뜨고 다닐수가 없음 ㅋㅋ"
그녀는 내가 해준 선물이 그리고 그녀가 고른 제품이 마음에 드는 이유를 100가지쯤 이야기해 주었다.
반면에 나는 가지고 싶은 것을 딱히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편이다.
작년에는 런닝화를 선물로 받았던 거 같은데, '있으면 좋지' 정도의 느낌? 아마도 선물을 해주는 입장에서는 너무 재미없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런닝화를 받고 그걸 핑계 삼아 저녁에 퇴근하고 아파트 옆에 있는 체육공원을 조금씩 달리기 시작했다. 해가 지는 하늘 아래, 땀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로 뛰고 나면 숨도 가파지고 기분도 좋았다.
그렇게 뛰다가 가끔 그녀에게 사진을 찍어서 보낸다.
'런닝화 선물 받은 덕분에 이렇게 뛴다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하지만 올해의 선물은 기대가 좀 크다.
'자전거라니.'
일단 출퇴근할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부터 해오긴 했었으니까. 그리고 접이식이라면 날씨가 좋은 주말에 차에 싣고 자전거 타기 좋은 곳으로 함께 놀라가서 나란히 타고다니면 너무 좋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난 딱히 필요한 게 없다고 말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