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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Jul 28. 2022

섹시한 종(種)

: <화이트 핫: 애버크롬비&피치, 그 흥망의 기록>과 하이틴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1. 직관적 아름다움 혹은 학습된 매혹


애버크롬비앤피치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미국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패션 브랜드 중 하나였다. 애버크롬비가 청년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섹시하고 쿨한 모델 이미지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야,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어’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물론 어느 브랜드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애버크롬비가 내세운 이미지는 미국의 주류문화가 사랑해마지않는 속성들을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담아낸 것이었다. 하얗디 하얀, 근육질의 남성들이 햇볕 아래서 헐벗은 채로 스포츠를 즐기는 광경. 혹은 마찬가지로 하얗디 하얀, 마른 여성들과 스킨십을 하거나 ‘인생은 즐거워’라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풍경. 그러나 주로는 신체 건강한 젊은 백인 남성의 육체가 발산하는 관능미가 핵심이었고, 이는 사회의 주류에 속한 자들에겐 당연히 가져야 하는 것으로, 비주류에 속한 자들에겐 탐나는 것으로 욕망되었다. 애버크롬비는 그렇게 사회가 규정한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그에 맞는 인생을 꿈꾸는 십 대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버크롬비 제국은 오래가지 않아 흔들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 요인은 단 하나로 수렴된다. 배타적 이미지. 백인 남성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미지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미의 기준인 듯 굴 때, 현실 속의 가부장적, 인종적, 계급적 힘을 지닌 이들에게 그대로 힘을 되돌려주는 이미지를 생성할 때, 우리는 그런 기준과 이미지를 고집하는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학교라는 작은 서열 사회를 지나 더 넓은 세계와 다양성, 그리고 가치 기준을 접하게 된 성인들은 더 이상 애버크롬비를 멋지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고 이는 샘 레이미 감독의 영화 <스파이더맨>에도 반영되었다. 주인공 피터를 괴롭히는 못된 학생(백인 남자)이 애버크롬비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가 개봉되었을 당시, 애버크롬비의 직원들은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애버크롬비의 쇠락은 섹시한 백인 모델들을 기용한 것에만 놓여 있지 않다. 이 기업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이미지로만 전시하지 않고 행동으로도 옮겼다. 인종차별적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팔았고, 매장에서 손님들과 직접 마주하는 직원을 모두 백인으로 채용했다. 백인이 아닌 직원의 경우, 손님이 가장 없는 시간대에 매장 뒤쪽에서 일을 하도록 업무를 배치했다. 한 직원이 이에 항의하고 같은 이유로 차별을 당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소송을 걸자, 애버크롬비는 자신들은 그저 브랜드 이미지에 맞게 잘생기고 예쁜 직원들을 내세우려 했을 뿐 인종차별을 행한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 황당한 변명 앞에 애버크롬비에게 의리를 지킬 소비자는 없었다.


이 모든 내용은 영화 <화이트 핫 : 애버크롬비&피치, 그 흥망의 기록>에 나와 있다. 실제 소비자들과 전(前) 모델 및 회사 관계자들, 그리고 소송에 참여했던 이들의 인터뷰를 넉넉하게 포함해 애버크롬비에 대해 공연히 알려진 사실뿐 아니라 조금 더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 부분(요컨대 CEO와 사진작가가 보여주었던 남성에 대한 욕망)까지 파고 들어간 영화는 퍽 재밌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찜찜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죄책감을 느꼈다. 영화가 애버크롬비의 광고 사진들을 보여줄 때마다 그 이미지에 매혹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며 곤혹스러움을 넘어 혼란스러웠던 지점은 영화가 애버크롬비의 광고 사진을 내게 제시하는 방식이었다. <화이트 핫>은 정확히 하이틴 영화들이 근육질의 잘생긴 백인 남성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애버크롬비 모델 사진들을 활용한다. 흔히 십 대 여성이 음악을 틀어놓고 저 혼자 짝사랑하는 남자의 사진을 다이어리에 오려 붙여 꾸미기를 하듯, 영화는 록밴드 음악(생각해보면 힙합과 정반대다. 이 장르에선 흑인 뮤지션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을 배경으로 스크린 위에 모델 사진들을 올려놓고 그 주위를 꾸민다. 다음 장면은 그런 광고 이미지들에 실제로 매혹됐었던 인물들의 인터뷰로, 이들은 그 모델들이 얼마나 멋있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는지를 설명한다. 비록 영화가 그런 이미지의 기만성을 폭로한다 해도, 그리고 영화 속 인터뷰이들과 관람객인 내가 그런 영화의 지적에 동조한다 해도, 나는 영화 속 이미지들에 흔들렸고 그래서 짜증이 났다. ‘왜 안 그래도 멋있는 사진을 저렇게 귀엽게 보여주는 거야?!’



하지만 영화가 멀쩡한 예쁜 사진을 망가뜨려 놓고 하드록을 틀어서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어야 하는가, 생각하면 그 또한 아니다. 아마 앨리슨 클레이먼 감독은 과거 애버크롬비가 젊은이들에게 소구했던 방식과 특정 소비자층이 애버크롬비를 자신들 문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향유했는지 재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애버크롬비가 젊은이들 눈에 어떻게 읽혔는지를 이해시켜야 이 브랜드를 둘러싼 소음들의 본질을 언급할 수 있으므로. 하지만 나는 클레이먼의 연출을 한 걸음 떨어진 상태에서 관망하지 못하고 향수가 뒤섞인 욕망을 느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애버크롬비 브랜드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광고하는 이미지들에는 익숙했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미국과는 동떨어진 한국에 살고 있는 아이도 배웠던 것이다. 건강하고 관능적이며 해사하고 아름다운 얼굴의 표본은 백인의 것이라는 걸. 여러 하이틴 영화들을 섭렵하며 나는 여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주인공을 마치 그녀들처럼 흠모했다. <화이트 핫>의 초반 장면들을 보며 나는 당황스럽게도 과거 ‘그들’을 좋아하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영화에는 나의 곤혹스러운 감정과 맞닿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한 인터뷰이는 세상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덤덤히 말한다. 그의 말은 여전히 백인 모델의 얼굴을 중점적으로 내세우는 여타 브랜드들과 앞에선 다양성의 가치를 표방하면서 뒤에서 전혀 다른 공작을 펼쳤던 디즈니의 횡포와 공명한다. 그리고 분명, 그의 말은 내가 마음속에서 폐기했던(그러나 문득 의식으로 돌아오는) 선망의 감정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세상이 정말 바뀌지 않았느냐’ 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에 한 표를 던질 것이다. 우리는 아마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는 중일 것이다. 나는 내가 품었던 동경이 미디어의 편향과 교활한 술수에 의한 것임을 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나의 편견을 벗어나려 노력했으며 여전히 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오늘날 시대적 가치로 자리 잡았고, 미디어는 이 흐름을 반영하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이 의식적 노력에는 여전히 개선할 만한 구석이 있다. 때문에 나는 최근 하이틴 영화들의 변화 양상과 그 속에 자리한 미심쩍은 부분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다시 고백하건대, 이 미심쩍은 부분은 내가 <화이트 핫>을 보며 떠올렸던 복합적 감정들과 연관된다.      



2. 얼굴이 예쁜 백인 남성들과 마음이 예쁜 비백인 남성들


하이틴 로맨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캐릭터 중 하나는 준수한 외모, 큰 키와 다부진 체격, 그리고 스포츠에 재능을 지닌 백인 남성이다. 이들은 대체로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해 여주인공과 로맨스 서사를 발전시킨다. 정반대의 역할을 맡을 때도 왕왕 있는데, 이때는 교내에서 인기는 있으나 반(反) 페미니스트적 행보를 보여 여주인공을 각성시키는 인물이다. 인기 있는 백인 남성들 특유의 오만함으로 상대 여성이 ‘아, 사람은 외모만 보고 좋아할 게 아니구나!’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악역일 때조차 이 우람한 백인 소년들은 교내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한다. 누군가는 그들 옆에 서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다. 하이틴 장르를 표방하는 개별 작품이 이 캐릭터를 사용하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이 백인 남성들이 자리한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모든 작품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듯하다. 이들이 가진 외모, 이들이 체현하는 남성성에는 부인할 수 없는 힘과 매력이 있다고 말이다.              


영화 <반쪽의 이야기>


물론 2010년대로 넘어오면서 우리는 위와 다른 양상의 하이틴 작품들을 자주 접하고 있다. 충분히는 아니지만 극 중 매력적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의 인종과 성적지향성, 그리고 성격이 달라졌다. <반쪽의 이야기>는 하이틴 장르 재료를 통해 진지한 성장물을 그린 영화로, 아시아계 미국인이자 레즈비언인 앨리를 주인공으로 세운다. 고립을 자처하는 그녀가 세상으로 조금씩 나오게 되는 건 폴이라는 한 소년과 깊은 우정을 맺으면서다. 그는 전형적인 백인 운동선수의 외관을 갖췄지만, 다소 어수룩하고 못된 말을 내뱉을 줄 모른다. 또한 동성 간 유대를 다지는 데 시간을 쓰기보단 가족을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앨리의 성지향이 밝혀질 때 폴은 (그녀를 좋아했으므로) 당황하지만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폴은 앨리와의 관계에서 멋있는 남성이 아니라, 돌봄과 연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소울메이트로 자리한다. 시리즈물 <하트스토퍼>에는 금발의 럭비 선수 닉이 등장한다. 모두가 ‘이성애자’ 임을 확신하는 그의 겉모습은 하이틴의 전형적 남자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는 오픈리 퀴어(openly queer) 찰리와 친구가 되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동성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깨달은 주류 남성들이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눈앞의 퀴어를 향해 온갖 차별과 폭력을 쏟아내는 서사는 의외로 흔하다. 다행스럽게도 <하트스토퍼>는 그런 서사를 차용하지 않는다. 닉은 정의롭고 귀엽고 애틋하게, 세상이 예측하는 여자친구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남자친구와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간다.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한 에이미 포엘러가 감독한 영화 <걸스 오브 막시>는 어떤가. 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섹슈얼리티를 인정받지 못했던 아시아계 배우를 남자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동시에 백인 남성을 여주인공과의 대척점에 위치시켰는데, 그는 여타의 영화들에서처럼 그저 여주인공의 사람 보는 눈을 길러주고 사라지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로 성장하는 주인공 덕에, 그는 그냥 못난 망나니가 아니라 주어진 특권을 휘두르는 인물로 정체화된다.      


그러니까 최근의 하이틴 영화들은 남성과 여성의 성애적 로맨스만을 다루지 않으며, 이성애를 다룰 때도 기존 공식에서 탈피하거나 변주하기를 택한다. 물론 여전히 전통적인 이성애 커플 서사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작품들도 백인 배우들로만 이뤄진 캐스팅은 피하는 추세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다인종 캐스팅을 갖춘 작품들이 언제나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와 드라마 <지니&조지아>는 남자주인공으로 백인, 서브남주로 비백인 배우들을 기용했다. 두 작품에서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의 어리숙하고 세심하지 못한 면들 때문에 권태를 느끼거나 거리감, 혹은 위험을 감지한다. 이때 등장하는 다른 남성은 자상하고 밝은 모습으로 다가와 주인공들의 관계를 흔든다. 하지만 이 서브남주들은 여주인공의 마음에 따뜻함을 불어넣을지언정 설렘이나 화학적 케미스트리는 만들어내지 못해 사랑받지 못한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남자주인공만큼 충분히 ‘남성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올해 공개되었던 레벨 윌슨 주연의 하이틴 코미디 영화 <시니어 이어>에도 여주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비백인 남성이 등장한다. 최종적으로 여주인공은 잘생긴 (그러나 머리는 텅 비었고 성차별주의자라 할 수 있는) 백인 남성을 단념하고 그를 선택하지만, 이 과정에는 여주인공의 개과천선이 포함된다. 즉, 여성이 자신의 인식을 개선하지 않는 한 남자주인공은 그다지 매력적인 존재는 아닌 것이다.  


남성적인 특성을 지닌 남주와 여성친화적 성격을 가진 서브남주 사이에서 여성은 늘 남성적 인물을 택한다는 것, 그리고 그녀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서브남주가 비백인이라는 사실은 얼마간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왜 성격 좋고 자상함을 지닌 사람들은 섹시하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왜 그들에게는 ‘힘’이 없는가? 왜 그들은 (요즘 들어 자꾸) 비백인의 얼굴로 표상되는가?


내가 제기하는 의문이 내가 봤던 몇몇 작품에만 국한된다는 것, 그래서 이 문제점이 일반화일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세 작품에 대한 감상평 중 (서브) 남주의 외모에 대한 지적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더 많은 걸 생각하고 더 많은 걸 미디어에 요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비백인 배우를 가리켜 하이틴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라고 평하기에 앞서 자신의 생각이 애버크롬비의 잣대와 비슷한 건 아닌지(너의 인종 때문이 아니라 너의 외모가 기준에 맞지 않아 채용하지 않은 거야)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오랜 세월 학습해온 편견을 뿌리 뽑기 위해선 그냥 재현이 아니라 공정한 재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공정함이 현실에 안착하기 위해선 우리 역시 새로운 눈을 장착해야 한다. 밝은 햇빛 아래 해사하게 웃는 미소년의 얼굴이 반드시 높은 콧대와 큰 눈, 그리고 하얀 피부를 지녀야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아시아계 소년일 수도, 흑인 소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들이 서브남주가 아닌 남주로 작품에 등장할 때, 나는 부디 남성성과 섹시함의 기준이 보다 유연하게 흔들리고 휘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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