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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Mar 13. 2023

비를 온몸으로 맞는 상상

3월 12일의 기록

영화 <날씨의 아이> 속 한 장면. 어린 시절 비가 올 때 우산을 일부러 쓰지 않은 적이 있다. 영화 주인공처럼 낄낄대며 비를 온몸으로 맞고 싶었다. 지금도 가끔 그러고 싶다. 



엄마와 함께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러 가기로 한 날.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날씨의 아이>를 본 게 그저께인데 창밖 풍경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하늘에 회색빛이 감돌고 빗방울이 흐르는 창문 너머의 바깥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흐리다. 멋진 풍경이라는 생각과 ‘왜 하필 오늘’이라는 불평이 동시에 솟아오른다. <날씨의 아이> 주인공 호다카는 맑은 날씨가 자신을 얼마나 들뜨게 하는지, 밝고 따뜻한 기운이 얼마나 히나를 아름다워 보이게 만드는지 열심히 설명했지만, 정작 나는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장면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내내 스크린으로 손을 뻗어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슥-하고 문질러 보면 어쩐지 손끝에 차가운 물기가 묻어날 것 같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 내리는 풍경은 내게 낭만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부터 ‘내가 좋아하는 비’에 조건을 붙였다. 내가 아무 일 없이 집에서 쉬는 날에 내릴 것. 애석하게도 그런 날은 거의 없었다. 바깥에 나갈 일 없이 집에 있는 날에도 피곤에 몸져누워 있거나 집으로 가져온 일을 하느라 창문을 때리는 비를 구경할 시간이 없었다. 빗소리는 유튜브로 가끔 들으면서도 이상하게 실제 소리는 귓속에 잘 박히지 않았다. 아마도 중학생 무렵이었을까. 어느 눈 내리던 겨울날, 한 선생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희는 눈 내리는 거 좋지? 어른들은 싫어. 도로도 막히고 운전하기 힘들거든.” 그때 나는 선생님이 너무 어른이라고, 너무 동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나는 저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계절을 스크린 속 이미지로나마 즐기는 시시한 성인이 되었다. 오늘처럼 좋아하는 날씨가 부담스러운 날이면 선생님의 말이 선연히 떠오른다. 마치 그 말이 내게 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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