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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May 28. 2023

그녀는 인어공주다

5월 28일의 기록

이미지 출처: IMDb



아마도 내가 고등학생 때였을 것이므로, 굉장히 오래전 일이다. 한 친구와 하이틴 코미디 영화 <쉬즈 더 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로, 현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여주인공 바이올라를 연기한 아만다 바인즈의 코미디 연기에 탄복한 나는 그녀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잠잠히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친구는 이렇게 되물었다. “아만다 바인즈? 그 통통한 여자 말하는 거지?”


앞으로도 나는 이 일화를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혹 여러분은 <쉬즈 더 맨>에 나오는 아만다 바인즈의 체형을 본 적이 있으신지? 영화 속 그녀는 매우, 아주, 지나치게 날씬했다! 친구의 되물음에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미쳤어? 그게 어떻게 통통한 거야?!” 친구는 남자였다. 어쩌면 그 사실이 나를 더 화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 나는 진심으로 그의 말에 화가 났고 상처받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세상의 미적 기준은 마냥 추상적인 게 아니라 매우 구체적이며 실재적인 거구나.


물론, 그 친구와의 일화 하나 때문에 내가 외모 지상주의를 깨닫게 된 건 아니었다. 내게는 잡지를 넘기며 한 배우의 외모에 쌍욕을 하던 아이들과, 장르가 로맨스인데 여주인공이 너무 못생겨서 드라마를 보기 싫다고 하던 친구와, 내 앞에서 다른 여학생의 허벅지 굵기에 대해 품평하고 비웃던 남자아이들이 있었다. 가혹한 미적 기준과 그에 미달하는 사람들에 대한 욕을 들을 때마다 나는 움찔거렸다. 나 자신이 그런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니와, 무엇보다 그게 왜 조롱당하고 비웃음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서구 미인의 얼굴과 몸을 갖지 못한 사람은 쌍욕을 들어도 되는 건가?


얼마 전 개봉한 디즈니 실사 영화 <인어공주>는 캐스팅 단계 때부터 무려 한국에서 논란이 되어왔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그것도 역사 영화가 아닌 가상의 세계를 그린 영화에 대체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왜곡’과 ‘변질’이라는 단어를 들이밀며 관심을 기울인 건지, 나로서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백인 인어공주를 흑인 인어공주로 바꿔봤자 발생하는 일이라곤 백인 일색인 공주 스토리에 다양성을 한줌 추가해 자라나는 비백인 어린이들에게 ‘세상에 너를 위한 이야기도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알려주는 것뿐이다. 반면 백인 인어공주를 유지할 경우 그 결과란, 그저 백인 중심의 위계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에 불과하며 ‘세상의 모든 공주 스토리는 백인들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이다. 안데르센 동화를 원작으로 삼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마치 절대 훼손되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는 이들이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원작에 우리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중심에서 비껴 난 주변인의 시선과 얼굴, 그리고 목소리를 주시하고 경청하고자 하는 태도가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에겐 <미나리>도, <파친코>도 없었을 것이다.


인종차별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주인공 할리 베일리의 외모를 조롱한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정확히 인종차별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또한 전형적인 백인 미녀의 얼굴을 모델로 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이 원한다고 말하는 흑인 미녀는 결국 백인 여성의 특징을 가진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할리 베일리도  나름 아름답다는 식의 주장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어차피 ‘그들’의 논리에 내 말은 부식될 것이며, 무엇보다 나는 그녀에게 아름답다는 '평가'를 내리기가 싫다.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의 저자 러네이 엥겔른은 우리가 이 지긋지긋한 외모 지상주의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모두가 아름답다’는 주문을 외기보다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기준’을 멀리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니까 모두가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다. 심지어 공주일지라도 말이다(더욱이 인어공주가 예쁜 사람이 행복을 맞이한다는 세속적 교훈을 전하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그보다 용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극 중 에릭 왕자가 에리얼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전혀 엉뚱하지 않다. 때로 우리는 여주인공의 외모가 개연성을 모두 부담하는 로맨스 영화들을 본다. 하지만 <인어공주>의 에리얼과 에릭은 바다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교감하고 상호작용한다. 시장을 뛰어다니는 에리얼은 통통 튄다. 춤을 추는 에리얼은 귀엽다. 우르술라와 싸우는 에리얼은 멋지다. 그리고 노래 부르는 에리얼은 사랑스럽다. 그러니 이 모든 걸 해낸 할리 베일리는 충분히 인어공주이고도 남는다. 어쩌면 그녀가 인어공주인 덕분에,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모두가 전형적인 서구 미인일 필요는 없으며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생각은 장담컨대,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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