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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구 Jun 11. 2023

그때 그 휠체어

6월 11일의 기록

청각장애를 소재로 한, 실제 농인배우들을 기용해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이라는 쾌거를 이룬 영화 <코다>. 근데 실제로 얼마나 많은 농인들이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관람했을까?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으며 장애에 대해 생각하는 요즘, 오늘 떠오른 잔상은 수년 전 영화관에서의 일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시간이 꽤 흐른 뒤, 휠체어에 앉은 한 사람이 상영관에 들어섰다. 그는 직원이나 다른 동행인 없이, 홀로 관에 들어왔다. 그리고 A열, 그러니까 상영관 맨 앞줄 의자 앞에 자신의 휠체어를 주차한 채 영화관람을 시작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그를 의식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관람경험이 필시 불편할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잠시 그대로 앉아 여운을 식히는 사이, 그는 직원이 열어준 문을 향해 곧장 휠체어를 밀고 나갔다. 나는 그가 G열이나 H열에 앉을 수 없었던 건지, 혹은 앉지 않았던 건지 궁금했다. 그가 G열에 앉고 싶었는데 직원이 도와주지 않은 건지, 아니면 영화관에서는 그런 편의를 제공하지 않는 건지 등등... 그러다 문득 깨달은 무서운 사실은, 내가 영화관에서 휠체어에 앉은 사람을 그날 처음 봤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대중 오락’이라는 것 역시 모두에게 용이한 접근성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따금 OTT 부상으로 인한 영화의 위기론이 대두될 때 반드시 등장하곤 하는,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의 가치’라는 말을 볼 때면 얼마간 주저하게 된다.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란, 그러니까 나의 시각과 청각을 오롯이 가져가 버리는 스크린은 분명 내게 다른 시공간으로의 이동을 확실히 보장해 주지만 애초에 이 ‘오롯한’ 경험이란 모두에게 열려있지 않다. 누군가는 필시 사운드나 시야를 포기한 채, 영화를 관통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장애를 소재로 가져다 쓰지만, 정작 영화관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다. 한글자막과 화면해설을 제공하는 배리어프리(barrier-free) 서비스는 영화관의 문턱을 크게 낮추지 못했다. 배리어프리 서비스관의 접근성이나 서비스 제공의 빈도수가 수요자의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2022년, 시·청각 장애인이 관람할 수 있는 영화관은 0곳이라는 기사가 나왔다(기사는 인천지역 영화관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고작 1년이 지난 2023년, 변화는 없다. 영화관을 꾸준히 들락거리는 내 눈에 띈 휠체어도 그때 그게 마지막이었다.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김승섭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동체의 수준은 한 사회에서 모든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249). 갖은 “K-” “K-” “K-”의 메아리 속에서, 과연 우리가 잘 살고 있는 건지.. 오늘은 자꾸 창문 밖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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