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과 파랑을 넘어 무지개로
트랜스젠더 여성인 앤드라야는 고교 육상부에 속해 있는 달리기 선수다. 학생들이 자신의 성별 정체성과 일치하는 팀에서 뛸 수 있게 하는 코네티컷주의 법 덕분에 그녀는 여성부에서 뛸 수 있다. 대회에 출전한 그녀는 좋은 성적을 낸다. 하지만 경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녀의 얼굴에 “불공평하잖아!”라는 말이 던져진다. 한 중년 여성은 일장 연설을 한다. “수정안 9조를 위해 여자들은 수십 년을 투쟁했어. 수십 년이나 싸워서 동등한 권리를 얻었는데 또다시 여자에 대한 차별적인 규정으로 빼앗겨 버렸어. ...(중략)... 여자 체육은 어이없게도 웃음거리로 전락했고 여성 인권까지 조롱한 사기야, 사기!”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호통에 앤드라야의 얼굴은 제자리를 잃는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도 모를 만큼 당황한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는 관객의 가슴도 쓰리기는 매한가지다. 내가 단지 나로 존재함으로써 다수 여성의 인권을 하락시켰다는 말을 면전에서 듣게 된다면, 분명 우리 모두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중년 여성의 말은 진실인가. 코네티컷주는 앤드라야가 여성으로 완전히 존재할 수 있게 함으로써 여성들의 권리를 그녀에게 넘겨준 것인가? 생물학적 여성들이 나누어야 할 ‘파이’를 그녀에게 줌으로써 특권을 누리게 한 것인가? 아마 적지 않은 이들이 저 호통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 중에서도 동조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자. 여성 인권 운동은 애초에 여성을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한 성별로 위치 지으려는 구조에 대항해왔던 것이 아니었나. 여성은 천성적으로 공적인 일에 적합하지 않고 사적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관념과 싸워온 게 아니었던가. 여성은 모두 예쁘고 현모양처여야 한다는 오랜 환상을 깨부수려고 해오지 않았나. 그러니까 여성주의 운동은 여성이 여성으로만 설명될 수 없고 모든 여성이 다 똑같지 않다는 말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 영화 속 중년 여성은 트랜스젠더 선수가 여성부 대회에 출전함에 따라 여성 인권이 떨어졌다고 하지만,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라는 외침이야말로 여성을 피해자의 자리에 고정시키려 했던 가부장제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트랜스젠더 선수에 반대하는 한 남성은 말한다. 본인의 딸이 장학금이 달린 대회에 나가야 하는데, 195cm의 장신의 트랜스젠더 선수가 있다면 어떨 것 같으냐고. 하지만 생물학적 여성 선수 중에 195cm에, 남성만큼의 기량을 뽐내는 선수가 없으리라고 우리는 장담할 수 없다. 만일 그녀가 실존한다면, 그녀는 여성이 아닌가?
마이클 바넷의 영화 <게임의 규칙>(2019)은 세 명의 트랜스젠더 선수들을 따라가며 스포츠 내의 성별 분리 정책(정확히는 태어날 때의 지정 성별에 근거해 팀을 고르게 하는 방침)에 따라 생겨나는 문제점들을 짚는다. 영화에는 앤드라야 외에 남성으로 트랜지션 중이지만 여성부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레슬링 챔피언 ‘맥’과 꾸준히 목소리를 내서 뉴햄프셔주의 트랜스젠더 선수에 대한 차별적 방침을 바꾸는 데 일조한 스키 선수 ‘세라’가 나온다. 모두 다른 주에 살고 있는 세 선수의 상황은 상이하다. 맥은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고 남성부에 출전하길 원하지만 여성 선수들과 시합해야만 하며, 고지식한 스포츠 연맹을 대신해서 모든 욕을 대신 받아낸다. 그에 비하면 세라와 앤드라야는 나은 환경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맨 앞에서 설명한 장면에서처럼 그녀들 또한 일상에서 차별적 시선들을 감내해야 한다. 세라는 말한다. “늘 유념하고 있어요. 만약 제가 너무 열심히 하면 남들이 제가 정말 유리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요.” 이들의 생활은 법이 바뀌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감시하는 눈이 외부에도 내부에도 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위협이 아니라고 설득해야만 한다.
결국 <게임의 규칙>은 스포츠 대회에서 트랜스젠더 선수들을 위한 지침이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 이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관객 누구도 트랜스젠더 남성은 남성부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부에서 운동을 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가해지는 불공평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요지는 세상을 천연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나누고 각각의 색에 맞는 성질들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을 우리가 넘어설 수 있느냐에 있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건 지난한 일이다. 우리가 게임의 룰부터 바꿔야 하는 이유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 화장실의 평등」이란 글에서 박한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성별의 화장실을 이용하면 될지 사회가 판단하는 기준은 신분증상 법적 성별도, 유전적 정보도 아니라 외모”라며, 이분법적 성별 구분의 화장실은 “특정성별에 맞는 외모 등이 존재한다는 성별 규범을 재생산/강화”한다고 지적한다(68). 스포츠 규칙과 화장실 이용은 전혀 별개의 주제 같지만 사실 두 사안은 공통된 의제를 갖고 있다. 성별을 단 두 개로 상정하는 것은 기존의 규범을 답습하고 퍼뜨릴 뿐이라는 것. 그럼으로써 차별을 생산한다는 것. 실제로 영화 속에는 화장실 사용을 둘러싼 논란과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변화된 규칙은 실재하는 존재들의 존엄을 지켜줄 뿐 아니라 고질적인 혐오의 전염을 예방하기도 한다.
영화의 처음과 끝은 맥이 훈련하는 모습으로 채워진다. 나는 이 두 이미지가 그가 누구로 보이는가?라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그가 아니고서 누구겠는가, 라는 의문. 보다 많은 이들이 저 질문을 받고 스스로 답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 위 영화는 2020년 12월 1일 개막하는 14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상영작으로, 개막 이후 온라인에서 무료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또한 이 글은 14회 여성인권영화제 웹기자단 피움뷰어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위 글은 본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castleinthetrees)에도 올라온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