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번역 실력이 꽤나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일본어를 꽤 오랜 시간 공부했고(일본어와 연이 깊다. 무려 5살 때부터 히라가나와 가타카를 외웠고, 본격적인 일본어 공부는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시작했다) 책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읽었으며 학창 시절에 발표문을 작성하는 건 늘 내 몫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국어 영어 수학 성적 가운데 항상 국어가 최고 점수였다. 덕분에 나는 영어와 수학을 더럽게 못 함에도 불구하고 상위반에 들어가 고생을 했다)
그래서, 아마추어 번역이나 취미 번역이 아닌 소위 <전문적인> 번역을 할 때에도 응당 나의 실력이 최고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내 번역 실력은 말 그대로 “취미”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심지어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그 번역들을 나도 모르게 답습하고 있었다. 번역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번역 샘플을 보내도 돌아오는 건 “죄송합니다”뿐. 돌아오는 피드백은 없었다. 적어도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것 만이라도 지적해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내 번역이 못 하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갔다. 건물이 위태롭게 흔들리는데 그 원인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적당히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보수를 마치고 내버려 두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참 우습게도, 번역 실력은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어>가 좌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사실 얼마 안 된다. 길어야 7~8년 정도. 그래서 대학 다닐 때에는 일주일에 책을 두 권 정도씩 읽었다. 부족한 교양도 쌓고, 맞춤법도 공부하고, 단어 실력도 늘리고. 하지만 위에 썼듯, 그 정도 노력으로는 어엿한 전문 번역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던 찰나, 정말 기적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운 좋게 연이 닿아 번역 회사에 고용 아닌 고용(!)이 되었다. 프리랜서이자 수습(!)을 겸하는 위치이지만, 나의 평소 생각과 번역 실력을 보시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주신 분들 덕분에 번역을 맡게 되었고 짧은 시간 동안 온갖 피드백을 여과 없이 들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나의 단점, 못난 부분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하니까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대학원을 다니며 정당한 지적이나 비판에는 크게 개의치 않을 정도로 멘탈이 상당히 단련된 상태였고, 그러한 지적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기에, 그 말 하나하나가 굉장히 감사했다. (여담이지만 이런 과정이 없으면 사람은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을 굽히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올바른지를 스스로 판단하여 고칠 것은 고치고 가지고 갈 것은 가지고 가는 유연함과 우직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유연함만 있으면 줏대 없는 사람, 우직함만 있으면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되니, 그 중간 어딘가에 있어야 하는데 이게 정말 어렵다)
무엇보다 지적해주신 그 내용들 대부분이 내가 간지럽다고 느낀 부분들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위태롭게 흔들리는 건물을 보던 분이 “여기가 잘못되었잖아 여기가!”라고 명확하게 가리키는 듯한 느낌. 꽉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걸 느낀 적이 있었나. 아마 있다고 할지라도 30년 넘는 인생에서 두 손에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아직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팀에 속한 분들 모두가 경력이 많고 전문가들이시다 보니, 괜히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내 가능성을 보고 뽑아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조금만 어렸다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너무 겸손한 건 또 독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발걸음을 맞추며, 혹시나 내가 그 발걸음을 맞추지 못할 것 같다면 더 열심히 노력하고 그분들의 스킬을 따라 하고 배우며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스스로의 번역 실력을 자만하다가 결국 나의 한계에 부딪혀 절망하고 있을 때 조용히 나를 믿고 손을 뻗어주신 분들 덕분에 나는 흙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번역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이따금 아무 글이나 번역을 하며 지적받은 내용들이 습관으로 변하지 않게끔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 습관이 손에 익으면 굉장히 힘들어지더라. 이번 번역 수업에서도 몇 번이고 지적받은 내용 가운데 하나다.
물론 박사논문도 동시에 진행해야 하다 보니 정신이 없다. 적어도 8월까지는 다 쓰는 걸 목표로 했는데, 조금은 늦춰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썩 초조하진 않다. 나는 그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하면 될 뿐이니까.